[이근수의 무용평론]‘2020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에서 본 다섯 작품
[이근수의 무용평론]‘2020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에서 본 다섯 작품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0.12.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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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프랑스 바뇰레 국제안무대회 파견을 위해 1991년 시작된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eoul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 SCF)이 올해로 30년을 기록한다. 첫해 예선을 통과한 안애순이 ‘씻김’을 가지고 프랑스 본선에 진출한 것을 효시로 하여 이제는 매년 스무 명 넘는 젊은 안무가들이 이 대회를 통해 국제무대를 누빈다. 대회명칭이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된 지도 올해가 13년째다. 13이란 숫자 때문일까,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린 올 행사는 안타까웠다. 불과 3일 동안, 아르코 소극장에서 객석의 1/3만을 채운 채 15분 내외의 소품 16개가 무대에 올랐다. 나는 둘째 날 한 자리를 차지하고 다섯 작품만을 볼 수 있었다.  

양승관의 ‘Home(집)’은 회화(繪畵)적이다. 창고와 같은 공간에 가구들이 무질서하게 늘어 놓여 있다. 책상과 의자, 옷걸이, 조명등, 작은 화분과 책들까지...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어딘지 어지럽고 불안정한 느낌이 한 폭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은 계속 바뀌는 조명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의 두 남녀(양승관과 안유진)는 동거인일까, 부부처럼 보이지만 함께 하기보다는 따로 하는 일이 더 많다. 홈이라기보다는 하우스란 제목이 더 어울릴듯하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가정의 패턴일까. 아니면 젊은 부부들이 살아가는  현실일까. 안무가는 많은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삶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춤추는 마지막 2인무는 인상적이다.  

김유연의 ‘Violet525'는 안무가의 슬픈 독백이다. 동생이 죽었다. 장기를 기증하고 16세 어린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떴다. 동생이 태어난 날인 5월25일의 탄생화는 삼색제비꽃이다. 팬지라고도 하고 Violet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의 꽃말은 ’나를 기억해주세요‘다. 잠자리 날개 같이 투명한 보라색 겉옷을 입은 여인이 비탄에 젖어 춤을 춘다. 허물을 벗듯이 그 옷을 벗어서 가운데 모셔놓고 검은 옷차림이 된 그녀가 그 앞에서 다시 춤을 춘다. 서양식 살풀이춤이고 음악의 진혼곡(레퀴엠,requiem)이다. 보라색 겉옷으로 가려진 앞부분이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통의 춤이라면 뒷부분은 아픔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춤이다. 작은 체구, 검정색 의상, 유연한 춤사위, 처연한 표정이 수십만, 수백만이 코로나로 죽어가는 이 시대를 표상한다.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David Lang의 음악(I Lie)을 배경에 깔면서 개인의 슬픔을 집단의 슬픔으로 치환시킨 15분 무대였다.      

류지나의 ‘그 틈(the Crack)'은 독특한 구성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싼 커다란 포대자루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두 개 뿐이던 발이 네 개가 되고 흰 포대자루의 아랫부분이 터지는가 했더니 알을 낳듯 한 여인이 틈새로 빠져나온다. 좁고 어둡고 습한 공간,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세포 하나가 두 개로 분열되듯 순식간에 생명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두 배로 확장된 공간에서 두 여인(류지나와 김남희)은 때로는 연인처럼 하나가 되고, 때로는 모녀처럼 둘이 되어 무대 위에 공존한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음향은 그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배경이다. 안무가의 춤 구상이 신선하고 크고 작은 유연한 두 몸이 앙상블을 이룬 재미있는 무대였다. 

최재혁의 ‘무게 위의 시간’은 한 남자의 무거운 고뇌를 표현한다. 무대를 오가며, 때로는 자리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여 가며 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낮과 밤이 바뀌어도 고뇌는 계속된다. 의자 위에 등불을 올려놓고 옷을 벗어 등받이에 걸고 옷소매를 둘러 등불을 감싼다. 멀리 떨어져 선 그가 두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등불은 커졌다가 작아지고를 반복한다. 몸의 움직임을 따라 변하는 등불은 그의 감정이며 고뇌일 것이다. 막시밀리언 헤커의 부드러운 음색의 노래(‘Feel like Children’)가 흐른다. 개인적 고뇌가 관객의 공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고뇌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불안하게 사용된 소도구(등불)와 함께 주제가 아쉬운 작품이었다.   

조현상의 ‘이상한 꿈’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연상케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이 이상하다. 어젯밤에 꾸었던 이상한 꿈은 이 세상을 빗댄 것일까, 아니면 꿈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나의 현실일까. 비몽사몽(非夢似夢), 무대는 꿈과 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간다. 한 남자와 두 여자, 검정과 흰색의상, 끊김과 이어짐을 반복하는 기계음과 침묵, 어두움과 밝음이 반복되고 누워서 흐느적거리다가 일어서서 춤추고 흩어짐과 모아짐도 되풀이된다. 안무가의 의도는 혼란스럽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도,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란 체념도 그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현실 같은 꿈, 꿈같은 현실을 번갈아 보여줄 뿐이다. 2013년 서울무용제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수작 ‘Talking In Your Sleep’가 기억난다. 경쾌하고 건강미 넘치는 군무, 도시적 세련미를 보여주는 무대미술과 조화로운 음악을 통해 관객 전달력을 확보하면서 꿈은 도피처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할 자유로운 세계라는 해답을 제시했던 그가 아닌가. 한예종 이전, ‘Adam's Apple' 등에서 보여주었던 순수했던 그의 열정을 2021년 새해에는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