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nterview] 이동식 인문탐험가 “스스로 정의 내린 ‘인문탐험’, 새롭게 발견될 세상을 추구하다”
[Special-Interview] 이동식 인문탐험가 “스스로 정의 내린 ‘인문탐험’, 새롭게 발견될 세상을 추구하다”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0.12.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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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34년, 문화·예술, 역사, 문화재 취재로 사회 공헌…2017년 은관 문화훈장 수상
1989년 국내 최초 중국 실크로드 답사, 윤이상ㆍ이응노ㆍ이우환 예술세계 조명 등 문화,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
‘국악’을 ‘한국음악’으로 바꿔야 한다는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운동 앞장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진보연 기자]가야금 명인 고(故) 황병기 선생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라고 말했다. 

전통과 새로움, 연주와 창작, 국악과 현대음악. 분리되어 있던 두 세계를 고루 엮어서 최고의 경지를 끌어냈던 황병기 선생은 항상 새로운 음악에 대해 갈망했고, 이는 ‘옛 음악어법을 배우고 지켜야 한다’는 것과 ‘서양 음악과 우리 전통음악을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역설적이지만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법을 배우고, 그 법의 토대가 되는 사고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동식 인문탐험가는 1977년부터 2013년까지 36년간 KBS에 재직하면서 문화전문기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사회부 기자, 문화부 차장, 북경 특파원, 런던지국장을 거쳐 보도제작국장, 정책기획본부장, 해설위원실장, 부산총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제작 PD로서 백남준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던 그는, 취재 과정에서 백남준과 절친했던 황병기와도 인연을 맺게 됐다. 황병기 선생과 생전 연이 깊었던 이동식 인문탐험가 역시 그의 가르침을 꾸준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1989년 중국 실크로드를 국내 최초로 답사, 프로그램을 보여 주었으며, 윤이상, 이응노, 이우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다큐로 소개했다. 또 1987년에는 국산 자동차로 북미대륙 2만km를 4개월 동안 달려 9편의 문명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문화와 역사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국내에서의 문화재 발굴, 역사유적 보호, 각종 예술 활동 진흥 등 자신이 보관해 온 주요 프로그램 원고에다 데일리 뉴스 원고들도 모두 수록해 80년대 한국 TV 문화뉴스의 역사와 그 내용까지 총망라하여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저서는 《책바다 무작정 헤엄치기》《천안문을 열고 보니》《길이 멀어 못 갈 곳 없네》《찔레꽃과 된장》《우리 음악 어디 있나》《아니되옵니다》《숨 좀 쉬어요》《거문고》등 총 21권이다. 또한, 그는 퇴계 이황의 바로 위 형님인 온계 이해 선생의 15세손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사료를 섭렵하고, 심도 있는 고증과 현장 취재를 거쳐 최초로 온계 이해의 ‘평전’을 완성했다. 

지난 2017년에는 문화ㆍ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역사, 문화재, 고고학 등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우리 사회에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받아, 10년마다 수여 되는 방송진흥 유공 정부포상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더불어 그는 국악의 새 이름을 찾는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서양음악은 성악, 기악, 작곡 등으로 구분되는데, 우리 음악은 그냥 ‘국악’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것에 부조리를 느낀 탓이다.  지난해 국악TV방송을 발족을 계기로 뭔가 이름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새 음악 이름을 찾는 작업을 하고 그 결과 우리 음악의 바른 이름을 ‘한국음악’으로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의 것을 지켜 중심을 잡으며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이동식 인문탐험가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지나온 길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 문화예술, 인문학이 나아갈 길에 관해 물었다.

■인문탐험으로 전통 발굴하고 지키며, 새로운 문화 -집필로 전할 것

한 매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다양한 소재로 칼럼을 쓰고 있다. 예술에 관한 담론부터 주변의 소소함까지 담아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늘 움직이는 것이고 그러면서 늘 생각을 한다는 뜻이지 않나. 나의 저서 중 『걷기』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의 모든 순간은 움직임, 곧 걷기라고 할 수 있다. 움직임을 통해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세상이나 사람의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이제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은 멈출 수 없기에, 모든 순간순간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서 드러내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1986년 백남준 작품 바이바이 키플링 한국편 공동제작 당시 사진. 백남준 씨가 사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모니터를 그래픽으로 그려 넣고, 사인해서 작품으로 선물한 것.
▲1986년 백남준 작품 바이바이 키플링 한국편 공동제작 당시 사진. 백남준 씨가 사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모니터를 그래픽으로 그려 넣고, 사인해서 작품으로 선물한 것.

KBS에서 오랜 시간 기자로 활동했고, 다양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책도 많이 냈지만, 본인은 자신을 전직 기자나 작가가 아닌 ‘인문탐험가’로 소개하고 있다. ‘인문탐험가’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최근 인문학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기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다뤄야 할 특정 분야나 주제가 늘 있었고, 거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자의 속성은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발굴하는 일보다, 남이 한 생각이나 발걸음을 따라가며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이 더 많았기에 그 틀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현직이라는 굴레랄까 제한을 떠난 시점이 되니 뭔가 문학ㆍ예술ㆍ역사ㆍ철학 등 그동안 접하고 관심을 가졌던 정신적인 영역을 종합적으로, 통섭적으로, 그것도 남들이 가지 못한 곳까지 가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기존의 틀이나 굴레를 벗어난 인문의 영역,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인문탐험’이라는 말을 찾아냈다. 

■기자로서 달려온 ‘최초’의 길…“백남준, 윤이상 그리고 실크로드”

1977년 KBS 춘천에서 첫 기자 생활을 시작해 서울로 올라와 사회부, 문화부 등을 거쳐 중국 북경, 영국 런던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다. 이후 보도제작국장, 방송문화연구팀장, KBS 부산 총국장 등으로 일하며 34년 동안 근무했다. 언론인으로 활동한 짧지 않은 세월 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아쉬웠던 일을 꼽는다면?

기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34년이란 시간은 늘 새로움과 만남 그리고 도전이었다. 내가 활동할 때는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지상파에서 위성 시대로 바뀌는 과정 중에 있었다. 이에 텔레비전의 역할이 문화ㆍ예술 면에서 크게 늘어났는데, 시대의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제작하고 보도를 한 것이 보람이자 복이었다. 

아울러 백남준 씨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던 일, 그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영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중국의 실크로드를 우리 텔레비전으로 처음 답사해 방송한 것, 국산 자동차로 미주대륙을 넉 달 동안 다니며 문명의 의미를 탐색한 것, 백남준ㆍ윤이상ㆍ이응노ㆍ이우환 등 여러 예술가를 만나고 그들의 예술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 등 많은 일이 스쳐 간다. 중국 특파원으로 있을 때에 탈북자 문제를 처음으로 보도해, 탈북자 문제를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정책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동식 인문탐험가의 2017년 방송진흥유공 정부포상 은관 문화훈장 수상 모습
▲이동식 인문탐험가의 2017년 방송진흥유공 정부포상 은관 문화훈장 수상 모습

요즈음에는 PD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일들을 그전에는 기자들이 맡았다. 주로 문화ㆍ예술 분야를 다루며 미술, 음악, 역사, 문화재, 고고학 취재를 통해 작게나마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시대적 행운과 노력 덕분에, 2017년 방송 90주년을 맞아 정부가 주는 문화 부문의 최고 훈장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0년에 한 번씩만 수여 되는 훈장을 받음으로써, 맡은 직위로서가 아닌 보도 제작한 방송 내용의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니 최고의 영예를 받은 셈이다. 때문에 커리어 면에서의 아쉬움은 크지 않다.

다만, 방송계를 나올 때도 그렇지만 방송국의 수장이나 경영진을 뽑는 것이 여전히 정치적인 힘의 대치와 대립에 좌우되다 보니 방송 본연의 역할을 펴지 못하는 측면이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방송이 인생의 가치를 가르치고 깨달음을 통해 사람의 삶의 의미를 구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과 교양 수단인데 말이다.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무언가 3번’을 소개하며,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와 1988년 이응노 화백의 다큐멘터리 방송에 관련된 개인적 일화를 연결하여 풀어내는 글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백건우 씨가 연주하는 가브리엘 포레의 ‘무언가 3번’에 갖는 애착의 기저에는 죄송함이 깔려 있다. 1988년 겨울,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나는 파리로 향했고, 이듬해 초 그의 미술 세계를 중심으로 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이 나간 후 백건우ㆍ윤정희 부부로부터 이북의 앞잡이로 간첩 노릇을 한 이들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방송을 하느냐고 항의를 받았다. 물론 나는 이 방송을 만들면서 이응노ㆍ박인경 부부의 행적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이응노 화백이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에 휩쓸려서 오랫동안 우리 대한민국이란 조국을 잊고 살아온 점을 지적하고 그의 예술적인 귀향(歸鄕)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인데, 백건우 윤정희 두 분은 아마도 KBS가 방송한 것 자체가 마치 이들을 정당화시켜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당사자들로선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이 가운데 백건우 씨가 늘 포레의 작품을 즐겨 연주하신다기에 거기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고 사죄의 마음을 글에 녹여냈다.

■‘국악’이 아닌 ‘한국음악’, 이름 바로 세우기

음악 전반에 조예가 깊지만, 그 중 특히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 음악 정명(正名)찾기> 모임을 통해, 우리 음악을 칭하는 ‘국악’이라는 이름을 ‘한국음악’으로 바꿔야 한다는 운동을 계속해왔다. 이 운동이 시작된 계기와 명칭 변경의 필요성, 현재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추진 방향성 등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린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돼 못하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현악반에 들어가 콘트라베이스를 배웠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클래식 기타를 배우며 동아리 활동도 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었다. 기자가 되고서 문득 서양음악은 성악, 기악, 작곡 등으로 구분되는데, 우리 음악은 그냥 ‘국악’이란 말 하나로 분류되는 것을 보고는 “이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이 들었다. 

바탕은 국악이지만 국악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내야 우리 음악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러려면 국악이라는 이름을 대신할 새로운 개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국악TV방송을 발족을 계기로 뭔가 이름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새 음악 이름을 찾는 작업을 하고 그 결과 우리 음악의 바른 이름을 ‘한국음악’으로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찾은 이름으로 우리 음악의 길을 열어가려고 했지만,  코로나 19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가 어려워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BTS 현상과 셰익스피어를 비교한 글을 봤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과거 내려오는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이웃 나라의 모든 소재ㆍ형식을 다 채용해서 새롭게 만들었기에 그것이 인류의 공동자산으로 올라서게 됐다. 같은 맥락에서, 노래 역시 미국식 힙합과 랩이 포함된 BTS의 노래는 한국적 장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노랫말의 상당 내용이 한국 젊은이들의 고민과 갈등,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처럼 BTS는 외래문화의 ‘형식’을 차용했으나 그들이 다루는 ‘내용’이나 ‘정서’는 한국적이다. 

대중음악이나 순수음악, 또 국악이나 서양음악 등 장르 구분이 없어 그 모든 것을 통합하고 넘어서는 한국 음악을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2년 가을 . 백남준문화재단 발족 후  이사장인 고 황병기 선생(우측 세번째)과 당시 재단의 이사였던 이동식 인문탐험가(좌측 두번째)
▲2012년 가을 . 백남준문화재단 발족 후 이사장인 고 황병기 선생(우측 세번째)과 당시 재단의 이사였던 이동식 인문탐험가(좌측 두번째)

국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는 故 황병기 선생의 영향도 컸을 줄 안다. 인연의 시작은 무엇이었으며, 선생의 음악을 통해 받은 가르침이 있다면?

선생님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즈음이다.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창작곡 레코드판을 써서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직접적인 인연이 닿은 것은 1984년 백남준 씨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면서부터다. 

황병기와 백남준. 위대한 두 예술가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황병기 선생님은 백남준 선생님과 다양한 공연 협업을 통해, 서로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동반자가 되어주셨다. 당시 10년 전쯤 이미 작고한 아티스트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되살리기 위한 사회적인 작업을 시작하면서, 황 선생님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게 됐다. 

황병기 선생님은 전통 음악만 존재했던 가야금 세계를 현대적 창작 세계로 인도해 우리 음악에 새 지평을 넓힌 분이다. 몇 년 전 갑자기 돌아가셔서 참으로 우리 문화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문화를 전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온계이해평전(이동식 저, 휴먼필드)
▲온계이해평전(이동식 저, 휴먼필드)

■‘온계 이해’ 후손의 역할, 역사에 묻힌 또 다른 역사를 찾아서

지난 5월 최초로 온계 이해의 평전을 완성하여 발간했다. 퇴계 이황의 친형으로서가 아닌, 온계 이해 자체로의 역사를 전하게 된 이유와 온계의 삶ㆍ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마침내 왕위에 올라선 정조대왕의 첫 말씀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이에 나는 “진성 이 씨고요,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한다. 진성 이 씨라 하면 다들 퇴계 이황을 떠올리지만, 나는 퇴계의 윗 형님이신 온계 이해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늘 선조 생각을 해왔다. 

올해로 온계가 돌아가신 지 470년인데 그동안 온계를 알리는 책이 거의 없었다. 성리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가치는 경(敬)과 의(義)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도산서당으로 들어가 경(敬)의 가르침을 줬다면, 온계는 올바른 관리의 길을 가기 위해 의(義)를 택하고 이를 목숨과 바꿨다. 오늘날 퇴계에 비해 온계의 생각과 행동은 역사 속에 묻힌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온계가 의(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절의를 후손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고, 평전을 통해 온계의 삶을 되살리게 됐다.  

지금까지 발표한 많은 책 가운데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지난 5월에 발간한 『온계이해평전』은 나의 21번째 책이다. 중국과 우리 역사에 관한 책 3권, 일본에 관한 책 3권, 음악에 관한 책 3권,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멋을 찾아본 책 3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책을 썼고, 저로서는 다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중 굳이 하나를 꼽자면, 백제 무왕의 부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아들과 함께 오늘날 일본 황실을 열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쓴 『일본 천황은 백제 무왕의 자손』(2015년, 국학자료원)이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다.

출간을 위해 새롭게 집필 작업 중인 책이 있는지?

몇 년 전 크게 인기를 끈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가 있다. 도입부에 평안감사가 밤중에 닥친 관병들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광해군 때의 평안감사였던 박엽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박엽은 성정이 포악하고 백성들을 수탈했으며 학정을 일삼았던 인물로 실록에 기록되고 있지만, 그의 죄명인 잔인함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많으며 전쟁을 목전에 둔 장수에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바로잡으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도 정치적 세력 다툼으로 숙청되어 그릇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에 대해 새롭게 기록하는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동식 인문탐험가의 집필 서적 일부
▲이동식 인문탐험가의 집필 서적 일부

세상의 수많은 가치 속에서 ‘우리’만의 본질을 찾는 일을 강조하고, 이 부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두가 혼란한 가운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문화ㆍ예술 분야를 취재하다 보니 우리가 놓친 것이 너무나 많음을 절감했다. 일제강점기, 미군정, 6ㆍ25, 경제난, 경제발전 등을 거치면서 우리 것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알던 많은 상식과 교양은 다 영어나 일본말로 대체됐고 우리의 가치는 서양의 개인주의에 묻혀버렸다. 이미 잃은 것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가꾸는 전통,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부모와 친척들 사이의 유대 등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개발해야 한다. 선조들이 기록으로 남긴 방대한 사상의 체계와 영역, 정보를 섭취하고 제대로 소화해야만 세계의 한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종선조이신 퇴계 할아버지의 묘비는 ‘도산으로 물러와 은거한 진성이씨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며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진성이씨 온계의 후손의 묘’라 새겨진 묘비를 감히 바라본다.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