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눈물을 내 안으로 모아서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눈물을 내 안으로 모아서
  • 윤영채
  • 승인 2020.12.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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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윤영채님 불합격입니다.’ 시원하게 또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나오는 길이다. 집에 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읽기만 했지, 책장에 먼지가 스민 것도 모르고 지내왔는데 이제야 조심조심 털어내 본다. 그리고 음악을 틀어놓고 스물두 살의 윤영채가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운전면허 따기, 장편 소설 쓰기, 신춘문예 등단하기, 베이킹 배우기, 연재한 글 모아서 책 내기, 홀로 호주 여행 가기, 이 모든 것을 하는 내내 놀랍도록 차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왜, 나는 울지 않았을까.

시험 당일, 엄마가 정성껏 차려준 밥을 먹고 시험장으로 출발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그날은 뭐랄까,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노란 조명이 내리쬐는 극장의 무대에 놓인 책상에서 시험을 치렀다. 수험번호 5번을 받고 앉아 차분하게 핸드폰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아빠로부터 긴 문자가 와 있었다. 하루 전 내가 쓴 글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 지금 여기, 나는 종이 앞에 앉아있다. 누군가는 두려워할지도 모를 이 여백이, 나는 참 좋다. 처음부터 글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열아홉 이전의 나는 논술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기조차 써본 적이 없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영화과 입시를 위해 펜을 들기 시작했다. 1,000자 원고지에 하고픈 말을 적는 것이 버거워서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얇은 종이에 숱한 구멍이 뚫릴 때 즈음, 한 편의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든 대학으로부터 거절당한 뒤, 성인이 되었다. 스무 살에 마주한 세상은 말 그대로 ‘공포’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소중한 친구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내 몸에 그림을 그려줬던 타투이스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모든 절망을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나는 다시 원고지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 발달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의 정신. 지금의 나는 적어도 상처와 충격에서 조금은 해방되어 자유 정신에 도달한 사자다.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는 ‘나’라는 존재의 생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기회가 닿아 오고 인연이 다해 떠나는, 그런 무수한 연의 고리에 의해 오늘의 내가 탄생했다고.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의지가 아닌 운명과 인연의 고리에 의해 만들어진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구나. 라는…….

  관습에 순종하는 낙타에서 사자의 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글을 쓰는 행위 덕분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과 나의 절망이 활자화되어 종이를 가득 메울 때,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잔혹함을.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나’라는 인간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니체가 말한 아이의 정신에 도달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20.12.20. 지독했던 입시를 마치며.

 

이거 읽다가 눈물 났어. 아빠 고마워. , 시험장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갈게. 사랑해이렇게 답을 보냈다. 시험을 마무리하고 고사장 후문으로 향하면서 생각해봤다. 시험날, 내가 썼던 저 글을 보낸 아빠의 마음이 무엇이었을지.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응원해준 그의 배려에 또다시 눈물이 났다.

그렇게 2시간 반,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엄마의 손을 꼭 맞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1년을 준비해 영화 한 편 보는 시간으로 희극 또는 비극으로의 결말, 이 하루가 나에겐 영화 같았다.

다시 돌아와,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울어야 하는데, 아니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저 차분히 내일의 나를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길 뿐.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난 왜 매번 실패할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날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니까. 그러나 스물한 살에 세 번째 입시를 치르며 삶의 지혜를 얻었고, 그것이 깊은 슬픔과 분노, 좌절로부터 날 살렸다.

삶은 영화다. 대게 영화는 기, , 전 그리고 결말이 있다. 그러나 인생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2시간짜리 영화와는 다르다. 서론과 중론을 나누기 어렵고, 결말은 언제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삶이란 그저 영화적인 하루하루가 모인 일종의 모노 필름 같은 것이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영화를 주도해 나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자 숙명이며 두려움이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 장()이 있기에 매번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기도 하다.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2시간의 러닝타임 영화와 달리, 우리의 인생은 876,000시간이 있다. 내 의지로 그것을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배운 지혜였다.

살아보려 한다. 패배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 젊음을 보내보려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생각에 잠시나마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입시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라는 삶의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살다가 기쁨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것을 내 안에 모으기로 했다. 행복의 눈물, 좌절의 눈물을 모아 거대한 바다를 이룰 때 즈음, 작은 돛단배 위에서 그동안 써 내렸던 글과 기억을 종이배로 띄워 보려 한다. 이제 곧 사수생이 되는 윤영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