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장현수의 ‘패강가’와 전건호의 ‘내 노래의 씨앗’
[이근수의 무용평론]장현수의 ‘패강가’와 전건호의 ‘내 노래의 씨앗’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1.2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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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패강(浿江)이 대동강의 옛 이름이니 패강가(浿江歌)는 대동강 가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16세기 중반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임제(林悌)의 시조가 한국 춤과 한국 음악을 만나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애틋한 정(情)과 한(恨)이 굽이굽이 서린 이별가가 되었다. 이 시를 원작으로 장현수(국립무용단 훈련장)가 안무한 패강가(11.6, 아르코대극장)가 슬프고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2018년 육완순, 김매자 등 춤계의 마에스트로를 무대에 세움으로써 시작된 ‘무념무상(舞念舞想)’이 연륜을 더하면서 서울무용제의 대표브랜드가 되었다. 41회를 맞은 서울무용제에는 양성옥, 양길순, 박재희, 채상묵 등 원로무용가를 개막공연에 초청한 데 이어 중진대열에 접어든 김지영(발레), 장현수(한국), 이경은(현대), 차수정(한국)을 초청하여 ‘무념무상(舞念舞想) II’를 구성했다. 4작품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이 ‘패강가’였다. 

혼례를 앞 둔 신부 역을 맡아 정가(正歌)를 부르는 정마리, 정인을 뭍에 남겨두고 신부를 따라 떠나야 하는 최호종, 사랑하는 남정네를 떠나보내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장현수다. 강가에 신부가 타고 떠나야할 작은 꽃가마가 내려져 있다. 

미니어쳐 꽃가마를 앞에 두고 흰 족두리, 소복의 신부가 꾀꼬리같이 청아한 목소리로 정가를 부른다. 투명한 잠방이, 편안한 바지를 입은 신랑은 어정쩡한 마음이다. 정인과 신부의 가운데서 그의 홑 춤은 강렬하고 미안하고 운명적인 남자의 심상을 표현한다. 맨발의 장현수는 초록색 고깔에 긴 소매달린 초록색 의상으로 무대를 누빈다. 

넘치는 신명과 함께 일가를 이룬 장현수의 춤 속엔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체념과 함께 깊은 한이 서려 있다. 그녀의 춤은 승무를 닮았다. 고운님을 떠나보낸 후 그녀는 아마도 여승이 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들가지처럼 초록색으로 감싼 여인, 흰옷의 남자, 족두리의 신부, 이 셋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노래와 함께 이 그림은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사에서 되풀이되는 드라마일 것이다.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가지 꺾어
    천 가지를 다 꺾어도 임을 붙잡지 못했네
    붉은 소매 아가씨들 눈물이 많은 탓인가
    물안개 지는 해도 고금에 수심이네.“

정마리가 부르는 노래 가락 속에 세 남녀의 마음이 섞여서 하나가 된다. ‘청안(靑眼, 2017, M극장)’을 공연하면서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 비춰진 삶의 고단함을 한국무용을 통해 담담히 표현하고자 했다”던 장현수의 말을 기억한다. 그 작품에서 무녀(巫女)로 단장한 그녀의 춤이 잠들었던 영혼을 불러 깨우며 닫혔던 마음을 열어갔듯이 ‘패강가’의 춤이 2020년 내내 코로나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이별하는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었기를 기대한다.

서울무용제의 역사가 된 경연부문엔 8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나는 두 번째 날(11.13) 장석순 안무의 ‘챌린저스 2.0’과 전건호 안무의 ‘내 노래의 씨’ 두 작품을 보았다. 앞 작품이 대상과 최고 남자무용가상을 받았다. 나는 수상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참가한 듯한 ‘전건호 창작춤집단 휘랑’의 진솔한 작품이 더욱 인상에 남았다. 

태고 적 세상이 처음 열리는 듯한 텅 빈 광야에 한 남자의 검은 실루엣이 드러난다. 무대 위에선 용수를 쓴 남녀들이 절망적인 군무를 펼친다. 용수는 죄수들이 머리부터 목까지 길게 뒤집어쓰는 두건을 말한다. 감옥같이 어두운 현실의 질곡이며 제약을 상징할 것이다.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이육사의 시 ‘광야(廣野)’가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어두운 조명아래 남자(박정한)의 고뇌가 계속된다. 무대 가장 깊은 곳에서 한 여인(김지성)이 나타나고 그녀의 서정적인 춤사위는 듀엣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흐르고 광야엔 꽃이 피어나고 노래도 들려온다. 다섯 개 꽃잎을 상징하는 듯한 화려한 여성5인무에 이어 김지성이 이끄는 남녀군무진이 활기차면서도 절제된 춤을 보여준다. 

무대는 곧 이들의 춤으로 가득 채워진다. 현실이 어두울수록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은 커질 것이다. 그들은 힘을 합쳐 한 그루의 나무를 세운다.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바위 얼굴’이 생각난다. 소년시절부터 큰 바위를 닮은 위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던 어니스트의 꿈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우리는 결국 초인을 만날 것이다. 

‘내 노래의 씨앗’은 의식 있는 현대인이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제약 속에서 진지한 고뇌의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해 가는가란 주제를 담백하게 그려준 의미 있는 30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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