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하남과 김유정이야기(2)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하남과 김유정이야기(2)
  • 유승현 /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1.01.2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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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유승현 /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검단산 
하남시 중부면 산곡리 근처에 산 하나가 있다. 백제시대 검단선사가 머물렀다하여 검단산인데 정기가 남다른 모양이었는지 예전에는 산곡리를 중심으로 고시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검단산 밑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해마다 국가고시를 치루기 위해 각처에서 모인 수험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으로 유난히 책 냄새가 많이 나는 곳이다. 또한 이 검단산에는 골짜기가 유독 많기에 현재까지도 동리마다 오르는 길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고 수려한 산새를 계절마다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수도권근처 인기 있는 산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봄 검단산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보면 강한 향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겨울을 이겨낸 노송 사이사이에 피어오른 노오란 생강 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산동백이라고 부르는 이 꽃나무는 생강향이 나서 생강나무인데 생강처럼 살짝 매운 듯 알싸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겨울을 마친 이듬해 봄, 군락을 이루며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듯이 잎이 나기도 전에 노란 꽃망울을 마구 피워댄다. 검단산 자락에는 유독 산동백나무가 많이 보인다. 골짜기마다 산동백이 가득하다. 노인정에 가보면 예전부터 이 산곡에는 동백이 많았다는 마을어르신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김유정의 소설속 동백꽃이 이곳 검단산 자락 산골에 가득하다. 소설가 김유정이 기거한 하남시 중부면은 검단산 밑이다.

산곡과 산골 
조선시대 ‘산골’을 한자로 ‘산곡’이라 칭한 것인데 하남시 산곡은 상산곡과 하산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당시 조선시대 명문가인 기계유(兪)씨의 세력을 분리하기 위해 학교 한 곳을 중심으로 위쪽은 상산곡, 아래쪽은 하산곡이라 칭했다고 한다.(하남문화원 하남지명지 참고)
이렇듯 산곡, 즉 산골이라는 지명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필자역시 도로명주소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산곡(산골)으로 우편물을 받았다. 구전되어지는 지명은 산곡이 산골이며 산골이 산곡이다. 이 마을 원주민들은 정감 있게 산골로 이야기하며 이 동네를 산골로 말한다고 이상스레 여기는 이는 없는 듯하다. 김유정의 소설, 산골나그네 역시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가 김유정의 누이
천재소설가 김유정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를 한 덕에 누이들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성장했다. 1933년경부터 소설을 발표한 그는 오랜 지병인 폐결핵이 심해지며 다섯째 누이인 김복달의 집에 요양차 몇 해를 오가게 되며 작고하기까지 집필에 몰두한다. 당시 김유정의 누이 김복달은 경기 광주 중부면(지금의 하남)유세준에게 시집을 와서 4남3녀를 낳는다. 김유정은 매형인 유세준과 같은 제동보통학교를 다녔기에 누이만큼 매형과도 친분이 남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세준은 매제 유정을 위하여 사랑채와 꽃밭사이에 방2칸을 들여 하나는 연장방으로 사용하고 하나는 김유정이 산골에 올 때마다 기거하게 하였다. 꽃밭이 약간 언덕이었는데 그 방에 책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단다. 꽃밭 주변이 아주 예뻤고 그 사이에 있는 방에서 김유정은 늘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고…….때로는 몸이 아픈 김유정이 글을 쓰고 난후 매형 유세준이 우체국에 가서 출판사에 원고를 송부했거나 큰조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던 일화도 있다. 당시 동부면에 있었던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원고를 발송한 것이며 서울의 신문사로 글들이 보내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주옥같은 김유정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던 원고일수도 있다. 김유정의 다섯째 누이는 그림그리기와 이야기 만들기에 능했다. 그의 자녀중 현재 2남 2녀가 생존해 있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 김복달과 외삼촌 김유정에 대한 기억을 비교적 상세하게 하는 편인데 유정의 누이인 김복달은 어린 아들의 딱지를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놀이감에 직접 그림을 그려주거나 한복에도 그림을 그리는 등 당시로는 드물게 예술적인 소견이 있던 여인이었다. 한가지의 주제를 확장시키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그 재미난 일화들을 잊을 리 없다. 혼을 내야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하나하나씩 예를 들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기술이 있었기에 동생 김유정의 집필활동을 지지하고 감흥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때로는 동생 김유정의 미완성된 글감을 들어주고 모티브를 제공하는 데 충분한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판명이 된다. 김복달이 “내가 소설을 써야한다. 글을 써야 한다” 고 자주 말했다고 자녀들이 기억을 한다. 김유정은 누이의 집에 머무를 때 어린 조카들의 손을 잡고 산골 산책을 자주했다고 한다. 조카가 잘 걷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하산을 했다고 한다. 언제인가는 조선일보사에 보낸 소설이 상을 받자 그 상금으로 누이와 조카들에게 옷을 선물하는 자상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누이에게는 꽃주황색 치마저고리를 사다주고 어린조카에게는 검은 벨벳 옷을 사다주셨는데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 이었다고 한다. 하얀 조카의 얼굴과 어울리는 색으로 옷을 선물하는 사랑이 많은 외삼촌이었다고 지금은 90세가 된 그 조카는 늘 대화를 해주시는 정이 많은 삼촌으로 김유정을 기억 한다. 

*김유정이 작고하기전 머물렀던 하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그동안 거의 없었으며 
최근 ‘하남시의 인물 찾기’에 소설가김유정이 언급되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필자는 김유정의 누이 김복달의 친손녀로 현존하는 유족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하남에서의 김유정 발자취를 본 신문에 차곡히 기록하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