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성현이 아니면 아니 되옵니다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성현이 아니면 아니 되옵니다
  • 주재근/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21.01.2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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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성종24년(1493년) 8월3일. 당시 장악원 제조(掌樂院 提調, 현 국립국악원장에 해당)인 유자광(柳子光)이 성종에게 아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내용이다.

“장악원의 제조는 악공(樂工)이 보는 실기시험을 듣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음율을 잘 아는 관리를 임명하였습니다. 음악의 실체를 잘 모르는 제조를 임명하시어 전악(典樂, 현 국립국악원 음악감독)의 말만 따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음율에 정통한 성현(成俔)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한다고 하시는데 경상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장악원의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안됩니다.” 이를 들은 성종은 결정을 바로 번복하여 성현을 다시 경직(京職)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당시 음악의 국가적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크게 인식하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조선의 아홉 번째 임금인 성종(成宗)은 조선 초기 국가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통치 규범인 예악(禮樂)을 완성하였다. 성종의 증조할아버지 세종(世宗)은 오례의(五禮儀)의 기틀을 잡게하였으며 『세종실록악보』에 오선보와 같은 음악기보법인 정간보(正間譜)를 창안하여 당시의 왕실음악을 수록하였다. 

할아버지 세조(世祖) 또한 오례의의 실용적인 내용을 모아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오늘날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이자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처음으로 종묘에서 연주하게 하였고, 그 음악이 『세조실록악보』에 오늘날 음악 그대로 기보되어 있다. 할아버지에 이어 성종은 드디어 1474년 국가의례의 의범(儀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왕실의 예법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493년 예조판서(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해당) 성현이 성종의 명을 받들어 1493년 세계 최고의 실용음악이론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함으로써 음악의 제도를 완성하였다. 

성현이 지은 『악학궤범』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귀중하고도 소중한 내용이 있다. 

“음악이란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 붙인 것이요 허(虛)에서 발생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케 하는 것이다.   느낀 바가 같지 않음에 따라 소리도 같지 않아서, 기쁜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날려 흩어지고, 노한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거세고, 슬픈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애처롭고, 즐거운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느긋하게 되는 것이니, 그 같지 않은 소리를 합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의 인도 여하에 달렸다. 

인도함에는 옳음(正)과 어긋남(邪)의 다름이 있으니, 풍속의 성쇠 또한 여기에 달렸다. 이것이 음악의 도(道)가 백성을 다스리는데 크게 관계되는 이유이다.” 백성들이 어떤 음악을 듣고 즐기는가에 따라 국가의 흥망과 성쇠가 달려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의범으로 『악학궤범』을 찬정한 것이다.

현재 1493년 『악학궤범』 원본은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호사분꼬(蓬左文庫)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610년(광해군 2), 1655년(효종 6), 1743년(영조 19)에 복간된 것이 있으며 국립국악원에는 1743년 『악학궤범』이 소장되어 있다. 

『악학궤범』을 지속적으로 편찬하여 후대 왕들이 참고하게 한 것은 그만큼 음악의 국가적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는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대악전보(大樂前譜)』와 『대악후보(大樂後譜)』의 악보를 편찬하게 하였다. 정조(正祖)는 음율에 밝은 김용겸(金用謙)을 장악원 제조로 특별히 발탁하여 당시 궁중 음악을 바로 잡고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 정조는 명령을 내려 음악이론서인 『시악화성(詩樂和聲)』 (1780년) 과 『악통(樂通)』을 편찬하게 하여 음악 제도의 정비와 음악을 부흥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 세조, 성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들이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제도적 지원, 인재 활용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트롯전국체전, 미스트롯, 트로트의 민족, 트롯파이터 등 온통 TV음악프로그램을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까지도 진한 사랑과 슬픈 이별의 아픔을 쥐어 짜내고 있다. 몸을 상하게 하는 코로나19의 광병은 치료제라는 희망이라도 있다. 트롯과 같은 순간의 음악적 쾌락이 마음의 치유제가 될 수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음악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학궤범』 서문에 나와 있듯이 인간의 희노애락(喜怒愛樂)이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적절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라 여겼던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문화와 예술, 관광과 체육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의 늪에서 분노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은 우수한 인재가 좋은 토양에서 지속적인 지원제도하에 창의적으로 역량을 펼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올해로 개원 70주년 맞이하는 국립국악원은 신라시대 음성서(音聲署) (651년, 진덕여왕 5) 이후 1400여년의 국가음악기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만큼 위상과 상징성에 맞는 오늘날 국립국악원의 시대적 역할과 임무를 대내외적으로 크게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임명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국립국악원장이 어느 시기보다 중요하다.   

몇 년 전 독일의 메르켈총리가 베를린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 남편과 참석하여 일상처럼 음악감상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러한 총리가 있는 독일이어서인지 작년 4월 독일은 문화예술창작자에게 3개월간 최대 9,000유로(한화 약1,210만원), 기업을 대상으로는 3개월간 최대 15,000유로(약 2,010만원)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당 지원금은 상환없이 즉시 현금으로 지급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조선조 문화의 성군이라 할 수 있는 성종이 성현의 문화적 식견과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를 겸하도록 하였던 것 처럼 문화예술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그리고 국립국악원장이 더욱 기대되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