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명색이 아프레걸’, 졸작인가? 범작인가?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명색이 아프레걸’, 졸작인가? 범작인가?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1.01.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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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명색이 아프레걸’은 범작이다. 대본(고연옥)도, 연출(김광보)도, 음악(나실인)도 모두 그렇다. 지금까지 여러 무대에서, 근대와 여성은 꽤 만났다. 한국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은 어땠을까? ‘명색이 아프레걸’에는 ‘얼라를 들쳐 업은’ 박남옥이 계속 등장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박남옥이 연출에게 어떤 의도였겠지만, 내겐 리얼리티의 상실이거나 혹은 여성적 멍에의 강조처럼 부담스럽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음악극일까? 새로 만든 뮤지컬넘버가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서, 음악극이다. 그러나 상황의 인식에서 정서의 심화까지, 노래가 기여하는 바는 크지 않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대사극이다. 박남옥은 자신의 입장에 관한 푸념과 항변을 전제로 해서, 이것을 주변인물과 관객에게 웅변하는 모습이 너무도 많다. 

실제 박남옥이 연출한 ‘미망인’은 어떤가? 작품 속 주인공에 감독(박남옥)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에서의 박남옥은 신념만이 강한 일인 투사로서 매력적이지 못하다. ‘미망인의 ‘이민자’보다 ‘명색이 아프레걸’의 ‘박남옥’이 현실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박남옥이 연출한 영화 ‘미망인’에선 전쟁과 가난, 남자와 아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이 있다. 시대를 원망하고, 여성을 이해하게 된다. 남녀를 떠나서 매우 인간적인 모습에 크게 공감한다. 

‘명색이 아프레걸'의 박남옥은 어떤가? 다른 근대여성과의 다르게, 시대화의 불화를 우울해 하지 않고, 무한긍정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박남옥이 다른 근대여성과의 변별성인가? 확실히 말하겠다. 미망인과 박남옥은 선택해도, ‘명색이 아프레걸’은 손들어주기 어렵다. 

‘명색이 아프레걸’에선 박남옥이 ‘정서적으로’ 안 보이거나, 제작진이 설정한 박남옥만이 ‘설명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시절 박남옥이 아니라, 고군분투하는 배우가 보인다. 경상도사투리를 비롯해서, 노래와 연기에 최선을 다하고자하는 창극배우 이소연이 보일 뿐이다. 

작가는 계속 영화 ‘극 중 극’ 형태로 영화 촬영장면을 충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촬영감독이 박남옥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도 느닷없이 등장한다. 작가와 연출은 관객이 최대한 그녀에게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박남옥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너무 일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극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물(캐릭터)에 대한 확실한 구현이라고 본다면, 이 작품의 아쉬움은 너무도 확실하다. 

‘근대적 서사’와 ‘여성적 서사’라는 측면에서, 박남옥은 그간 무수히 많았던 이런 계열의 작품과 비교할 때 근현대여성으로서 깊게 빠져들지 못하고, 다르게 빠져나오지도 못했다. 박남옥은 계속 대사로 자기웅변을 하는데, 극의 후반에서 오히려 안쓰럽고, 안타까운  심정마저 든다, 오직 영화 한 편 제작을 위해  외로워도 슬퍼도 목숨을 바치겠다는 웅변(대사, 노래)은 한 여성을 떠나서 한 ‘인간적 서사’로서도 단순하고 매력적이지 못하다. 

‘명색이 아프레걸’엔  다소 위험한 대사가 있다.  이화여대를 중퇴한 박남옥을 향해 던지는 기숙사 사감의 대사는  한마디로 대사로 스쳐지나가기엔 매우 냉소적이고 폭력적이다. 장관부인이 되려 하지 영화감독이 되려한다고? 오히려 나의 글 또한 비난의 화살이 받을 소지가 있겠으나, 말하겠다. 오히려 현대에 들어와서 일부 여성으로 인해서 그러하지, 1920년대부터 1950년대의 대학을 선택한 여성이 ‘현모양처’ 또는 ‘장관부인’을 목표로 했을까? 비록 사감을 통한 발언이기는 하나, 이게 궁극적으로 작가의 대본이라고 에 의해서 생각하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여성지식인 또는 여성행동가에게 매우 무례한 발언이다. 

음악극 넘버 중에 ‘모래위의 집’이 있다. 이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야 말로 ‘모래 위의 집’이란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출발부터 든든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예전 국립극장에서 ‘화선 김홍도’ 이후 9년 만에 세 개 단체가 뭉쳤음을 강조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립극장 소속단체가 함께 역량을 결집해서 만든 작품으로 ‘우루왕’이 있다. 이 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더라도 분명한 게 있다. 한 단체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총체극’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거다. ‘화선 김홍도’는 노래와 춤, 연주를 통해 그림(단원의 풍속화)이란 세계로 가게 했다. 비교컨대, ‘명색이 아프레걸’은 새 단체를 통해서 ‘영화’ 한편의 특징과 매력을 알려주었을까? 여성예술인을 항한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을 공감하게 해 주었을가? 

이 작품을 출발부터 ‘모래위의 집’이다. 연출, 작가 작곡가에게 묻고 싶다. 세 사람은 국립극장의 전속단체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작품을 통해서 세 단체의 어떤 또 다른 면을 끄집어내고 싶었는가?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교훈조로 세 번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세 번 반복되기에 거의 외워버렸다. 과거 투포환선수이기도 했던 박남옥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다음 대사를 그대로 그들에게 해야만 한다.

“투포환은 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오른손’과 ‘어깨’와 ‘몸뚱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력, 국립무용단의 안무력, 국립창극단의 연기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들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간 여러 무대를 통해서 실험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에도 이미 능숙하다. 과연 작곡가와 작가, 연출이 이 들의 ‘오른손’과 ‘어깨’와 ‘몸뚱이’를 개별적으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무리 첫 번째 작업이라는 것을 고려한다손 치더라고, 이것은 단체 또는 장르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부족해서, 극언이 가능하다면 ‘예술적 결례’라는 표현까지도 등장시키고 싶다. 무례까지는 아니라고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작품 전체적으로 창극 특유의 호흡, 창극만이 갖는 긍정적 너스레, 창극대사가 갖는 ‘찰진 맛’, 비유 또는 첩어를 통한 ‘감정적 이입’ 등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최고의 한계는 음악이다. 작곡가의 스타일이 이렇다는 건 인정하지만, 최소한 국악기(국립국악관현악단)를 등장시켰울 때의 편곡법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 마치 20년 이전으로 돌아가서, 클래식악기, 국악기, 전자음향이 음량이나 음색을 전혀 고려치 않고, 파트를 가른 연주를 듣는 듯 했다. 심지어 피리, 대금 등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해금만이 객석에서 조금 들리는 편이었다. 어떤 부분에서 들었던 거문고도 국립창극단이나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대중적’ 공연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마치 고급회화도 능숙한  그들에게, 서툰 기초회화를 말하게 했다면, 내가 작곡가에게 무례를 한 것일까? 내 귀에는 실제 그렇게 들렸다. 이건 건반 하나에, ‘팀프’ 앙상블의 일부 연주가, 해금 등 국악기 한 두 개면 오히려 음색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편하고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형태였다. 

무용단과의 협업을 강조했지만, 지금까지 국립창극단의 공연에 합류한 국립무용단의 장면보다도 정말 나을 게 없었다. 안무와 무용을 탓하는 게 아니다. 몇 장면도 안 되는 무용장면도 단원들이 거울보고 연습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무용이라는 특성을 잘 이용해서 색다른 판타지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품의 성패는 연출에 돌려야 한다.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져드는 기쁨’울 주지 못한다. 같은 연출의 ‘사회의 기둥들’(2014)를 보면, 정격적 연출을 지켜가면서도 끌고 가는 힘과 받쳐주는 무대가 매력적이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이런 방식과 저런 방식을 이이어 부친다.  여러 면에서 심화(深化)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본 작가, 작곡가, 연출의 다른 작품은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실망은 매우 크다. 무모한 것은 실험이 아니며, 무리가 지나치면 무례가 된다는 교훈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작품은 기존의 뮤지컬단이 하면 어떨까 생각할지 모르겠다. 실제 그렇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한계가 분명한 작품일지라도 다시 작품을 다듬는다면,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달리해야 한다. 음악극의 보컬 트레이너를 투입해야 한다. 뮤지컬처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역량있는 창극단 배우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음악(노래)도 점차 창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대한민국 뮤지컬에 만연한, 누구에게 익숙해도 누구에겐 귀에 거슬리는 ‘뮤지컬쪼’ 발성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중음악에서 ‘가이드’ 녹음이 있는 것처럼,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가이드를 바탕으로 그것을 자기화 혹은 창극화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한다.

이소연 (박남옥) 유태평양(전창근) 민은경(윤심덕) 은 이미 타 장르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김지숙 (김신재) 김미진 (이민자) 조유아(방영자)의 연기와 노래에 큰 박수를 보낸다. 이들은 뮤지컬(음악극) 발성과 판소리(창극) 발성에서의 접점을 찾았으며, 그걸 대사를 확실하게 구현하면서 노래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방식을 자신만의 노하우가 보인다. 

명색이 아프레걸에선, 15곡 정도의 넘버는, 단체의 성격을 모르는 작곡가엔 무리였다. 관객들이 극의 맥락과는 거리 있지만  ‘뜬금없이’ 등장하는 ‘사의 찬미’를 관객이 좋아하는 건, 이 때 비로소 숨통을 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강조하려 한다. 70년을 넘긴 국립극장의 역사에서 단체 간의 합동공연을 전제로 한 작품으로서 총체성과 실험성을 지향한 ‘우루왕’과 ‘화선 김홍도’와, ‘명색이 아프레걸’은 도저히 동일선상에 놓을 작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러 면에서 그렇다. 

이 작품이 졸작과 범작 사이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크게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작품 속에 과장과 허세는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작가, 작곡가, 연출의 기존의 작품은 물론이요, 이번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작품에 관한 제작진의 얘기가 궁금하다.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무거운 꿈’을 이해하게 될까? 나는 그들을 최대한 이해하면서도, 이 작품이 갖는 또 다른 측면의 한계 또한 짚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