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네 번째 좌우명을 찾아서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네 번째 좌우명을 찾아서
  • 윤영채
  • 승인 2021.01.29 12: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물과 같은 사람이 되자.'

어젯밤 13년 지기 선호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랐다. 함께 산책도 하고 그곳에 걸터앉아 서울이 저무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늘이 노랗게 익어가다가 서서히 검붉은 역사 속으로 물들어갔다. 잠시 후, 어두운 밤이 세상에 스미자 눈을 깜빡이듯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빛이 미처 감싸지 못한 어둠과 대비되며 도시는 어느새 광활한 우주가 되었다. 미리 골라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 하나가 유성우처럼 뇌리를 스쳤다. ‘이 짧은 순간에도 세상은 변하는데, 지금 앉아있는 우리는 지난 세월 얼마나 변한 걸까?’ 친구는 더 강하고 단단해진 것 같은데 그는 내가 유순해졌다고 한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세상을 극단의 감정으로 바라봤던 내가, 이제는 약간 중간을 찾은 듯하다. 아침과 밤만 있던 세상에 해 질 녘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있었던 건, 저 좌우명 덕분이다.

물과 같은 사람이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려 하며, 생명을 잉태하고 살리는 어미 같은, 또 범람하면 온 지구를 재앙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거대한 자연의 힘, 그런 물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칫 나의 오만함으로 무시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집중하고 새기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또 하나의 우주로 보려고 한다. 그들의 세상이 시시각각 변해가면서 발산하는 색채를 천천히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섬세한 감정을 지닌 친구들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가끔은 여전히 그들의 고민에 공감하거나 동화되기도 전에 해결책부터 제시하고 마는 딱딱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흐르는 물보다는 얼음에 가까운 성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지난해 여름, 우울증 중증 진단을 받았다.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뜩 내가 참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책이 이어졌고 존재의 의미를 잃은 몸뚱이엔 암처럼 서서히 우울한 생각들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커튼을 치고 누워 눈물만 흘리다가 간신히 일어나 목을 축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무기력했고 그래서 잠시 끊었던 담배에 손을 댔다. 뜨거운 불빛이 태워낸 회색 연기가 내 폐를 스치고 다시 입 밖으로 뿜어져 나갈 때, 그 순간만 내가 숨 쉬고 있음을 인식할 뿐이었다.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난 우울증 환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처방받은 항우울제와 심신 안정제 그리고 수면제를 먹어도 잠은 오지 않았고, 그저 내가 우울증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을 가기 전보다 더 많이 눈물을 흘리고 뺨과 머리를 스스로 때리는 자학행위를 하기도 했음을 비로소 고백한다. 길을 걸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가끔은 시공간이 울렁이는 듯한 정신적 착란이 지속될 무렵 지방에 계시던 부모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영채야 네 마음속에 우주가 있고, 네 마음이 곧 정답이란다. 그저 너 자체로 너다움을 만들고 찾아가길 소망한다.”

긴 편지글 속에서 찾아낸 작은 문장이었지만, 이 대목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렇지 나에게 답이 있었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미래에서도 살고자 요동치는 작은 심장이었다. 살고 싶었고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삶을 헤쳐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다만 도전하는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 사랑하는 것들이 변하는 것에 상처받았을 뿐이었다. 이 슬픔을 누가 위로해주지 않아서 자신을 스스로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 모습을 즐기는 변태적인 행위를 반복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다시 일어나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문장을 아직도 가슴 깊게 새기고 산다. 또다시 꿈을 찾는 여정에 올랐지만 살고자 하는 마음의 답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효율을 따져보자. 쓸데없는 감정 낭비는 하지 말자.’

지금의 나는 모든 우울에서 벗어나 빠르게 달리는 준마다.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쳐 세상을 바라보던 10대 때와 거듭되는 실패에 방황했던 20대 초반의 경험은 오늘의 나를 아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슬픔에 빠져있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현재 내게 닥친 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는 전략가가 되어가고 있다.

내 가슴과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좌우명도 가끔은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유발 하라리의 책 호모 데우스를 읽는 순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죽음 극복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현대 인류의 과제가 인간의 개인 차원을 넘어서 세계를 주름잡는 이들에 의해 계획되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돈이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비용을 받고 개발한 기술을 제공할 목적이다. 뭐든 이윤을 따지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지만, 창의력과 예술 그리고 종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행복과 죽음이 사업으로의 수단이 된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걸까. 문뜩 이런 회의감이 들었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 지금까지의 이해관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300년을 살 수 있는 인간에게 결혼과 자녀의 양육은 일생에 아주 짧은 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녀와 부모의 관계, 부부의 관계 그리고 선생과 제자 등 다양한 인간관계가 새로운 패러다임과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른 교육과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세상은, 물과 같은 사람이 되자던가, 내 안에 이미 답이 있다는 철학적인 생각이 통하지 않는 미래처럼 들린다. 예술과 종교가 숨 쉴 구멍이 없는 곳, 모든 것이 펼쳐져 다 드러나 버리는 벌판 같은 세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지 두렵다.

이즈음 나의 네 번째 좌우명을 새로이 만들고 정립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물, 내 안의 답, 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고 타파하려는 마음이 모두 합쳐진다면 새로운 미래를 헤쳐 나아갈 네 번째 문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2021.01.27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서울
2021.01.27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서울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어떤 세상이 닥쳐와도 통용될 수 있는 당신만의 단 한 줄이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