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공자와 오타쿠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공자와 오타쿠
  • 윤영채
  • 승인 2021.02.15 2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나는 오타쿠다. 어느 분야의 오타쿠냐 하면, 여러분이 떠올리는 이미지 그대로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피규어를 사 모으거나 코스프레를 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창조한 시공간을 초월한 세상을 체험하는 일을 사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극장에서 봤던 신카이 마코토(しんかいまこと) 감독의 너의 이름은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황혼의 시간엔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만날 수 있다.’ 이 한 줄의 대사가 나를 오타쿠의 길로 이끌었다. 본능적으로 끌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었다. 영화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숱한 실패를 거듭해서 조금은 성숙해진 지금은 이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밤에 홀로 언덕에 올라,

예고치 않게 등장한 COVID-19 바이러스가 인간을 병들게 하자, 우리는 집 밖에 나가는 일을 조금씩 멈췄다. 그렇게 좋아하던 브런치 카페도, 한강도, 노래방도, 서울 도서관도 가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봤다.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이 서서히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지치고, 무료한 시간 속에서 간단히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서기로 했다. 아주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새벽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참을 걸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가 있는 상명대학교 운동장에 가서 걷기도 하고, 부암동 고개 창의문을 넘어가면 만날 수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올랐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걸으니 숨은 차고, 인중에 작은 콧방울이 맺혀 간지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걸었다. 도착해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잠시 마스크를 벗었을 때 풍광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뛰는 가슴, 거친 호흡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서울의 빛들. 그 위로는 오리온자리와 북극성이 떠 있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이 모든 것에 집중해본다. ‘아 이것이었구나. 이것이었다.’ 겨울의 적막을 깨는 거친 심장 박동이 내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대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3차원까지만 볼 수 있는 인간이, 순간마다 변화하는 만물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가상이 바로 시간이다. 4차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길을 걷는 나의 모습이 이어져 이상한 파노라마가 된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있다. 운명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너머의 차원을 볼 수 없기에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복잡한 진실 위에서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힘은 존재하는 걸까.

다시 돌아와 그날의 언덕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단 몇 초 후도 예측할 수 없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나의 심장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것도 심장이 없다면 불가능하지 않는가. 어젯밤 또 한 번 언덕을 오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누굴 사랑하고 싶은지 알 수는 없지만,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아주 먼 미래에서도 나는 언덕을 오를 것이란 것을. 심장이 뛰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울이 펼쳐낸 광활한 먼지와 빛을 가만히 바라보리라는 것을 알았다.

황혼은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비록 사람이 없는 새벽을 택해 산책을 나섰기에 일몰을 보지는 못하지만,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잇는 마음을 느끼러 가는 일이었다. 열여덟에는 석양과 마주 서서 미래의 남편과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보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들을 보고 싶었다. 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에 어둠으로 뒤바뀌는 순간에 이들을 만나 묻고 싶었다. 제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누군가를 웃게도 울리게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영화 연출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지금은 다르게 묻고 싶다. 먼 그곳에서의 나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또 얼마나 행복한지. 오늘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이런 것들을 마음으로 물어본다.

공자를 본다.

동시에 공자와 논어가 수천 년이 흘러도 살아있는 이유, 활자화되어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를 묻는다. 세계·우주가 개벽할 때부터 다음에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는 겁()이 다 지나가도 그는 살아 숨 쉴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유교를 몹시 비효율적이고 고리타분한 학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과 맞지 않는 규율과 예를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일정 부분 공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논어엔 단순히 예와 인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며 자연과 조화되게 살라는 공자의 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심장 그 자체다. 그래서 시공간이 1만 번 무너져 내리고,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오늘 내가 언덕에서 스스로 묻는 말과 공자의 말은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우주를 떠돌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인간이 만든 작품의 초현실 세계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느끼곤 해서이다. 그것은 형태가 다른 곳에서도 생명은 결국 어떻게든 통한다는 깊은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1210일 오후 626분에 존재하는 오타쿠 윤영채와 2060210일 오후 626분의 진화된 오타쿠 윤영채도, 기원전 551년에 태어난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마음도 영원히 살길……. 우주 소멸의 끝에서 마주할 수 있길. 우리 모두 황혼의 시간에서 서로의 차원을 넘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顔淵死, 子曰: "! 天喪予! 天喪予!"

 

제자 안회(顏回)가 죽자, 공자가 말했다. “아아 하늘이 내 희망을 빼앗아 가는구나. 하늘이 내 희망을 빼앗아 가는구나.”

내가 말한다. “아아. 공자 선생 우린 죽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당신의 말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분명 안회도, 나 윤영채도, 당신도 영원히 살아 황혼에서 마주할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