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스크린에서 빛바랜 신화를 보다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스크린에서 빛바랜 신화를 보다
  • 윤영채
  • 승인 2021.02.19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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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침대맡에 선물로 받은 민화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가 걸려있다.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된다는 고사를 시각화한 이 그림은 입시를 그만 끝내고 등용하라는 기원을 담아 아버지의 지인이신 저명한 작가분이 손수 그려주셨다. 그러나 모두의 응원과 축복 속에 치른 시험의 끝은 다시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홀로 불 꺼진 방에서 훌쩍훌쩍 눈물이 떨어지는 소주잔을 들고,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용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정말 없는 걸까. 자책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내 마음을 굳혀, 그림은 그림일 뿐 크게 의미를 두지 말자고 다짐하고서야 비로소 눈물을 닦아 낼 수 있었다.

털고 일어나기로 했다. 자신을 스스로 독하게 몰아붙이는 사이, 남들의 인정보다는 성과를, 행복보다는 돈을, 여유보다는 바쁨을 택하기로 했다. 영화를 사랑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포기하지 않고 목표로 하는 학교에 다시 도전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기로 했다. 덕분에 사소한 일 따위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다 좋을 수는 없는 법. 동시에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어변성룡도를 보며 그 깊은 뜻을 상기하려고 했던 지난날과 달리, 지금은 오기와 독기에 눈이 멀어 그림을 보는 일조차 잊고 살아가고 있다.

글을 써본 적도 없고, 영화엔 더더욱 관심이 없던 낭랑 18세 소녀가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제목과 내용이 떠오르진 않지만, 어느 극장에서 봤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저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학교에 돌아와 친구들과 영상 동아리를 꾸리고 뮤직비디오 한편을 만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뮤직비디오를 학교 축제에 선보였는데, 기대완 달리 냉정한 혹평을 받게 되었다. 좌절의 통증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정도 밖에 안된단 말인가? 처음으로 내가 못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간 후 상심은 오기로 나를 변화시켰다.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보다도 성공한 나를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잠 못 자고, 팀원들과 다퉈가며 간신히 기한 내에 만들어낸 5분짜리 영상이 윤영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마음을 먹고 몸부림치다가 여기까지 왔다. 지쳐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버티곤 했는데 대입 도전과 좌절이 반복되는 동안 슬슬 지쳐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내 다짐과 도전이 한심하고 의미 없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영화를 보는 일만큼은 재미있어 멈추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우선 재미있는 일이다. 다른 세상에 사는 인물의 인생을 체험하며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보다 더 고된 삶을 사는 캐릭터로부터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일정한 장면에서 제작자의 의도대로 웃거나 울기도 하고, 감정을 마구 쏟아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화면을 통해 보고 느낄 수 있다니 영화는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이런 이유로 아주 어릴 때부터 극장을 찾았고, 많은 눈물과 콧물을 스크린 앞에서 뿌리곤 했다. 그러나 어변성룡도 앞에서 글을 쓰는 지금,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의도치 않게 장기 입시생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입시에 계속 실패하더라도 먹고 살 기술과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독해지고 말았지만 나는 보기보다 여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삶이란 영화와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내가 윤영채라는 영화의 주인공이길 간절히 바라곤 한다. 운명 따윈 없다고 소리 내어 떠들면서도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고, 인간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유로운 미래를 갈망한다. 이런 모순적인 생각을 이어주는 것은 순전히 영화 덕분이다.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며 삶이 복합적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순적인지, 얼마나 차갑고 따뜻한지 느낄 수 있다. 코엔 형제(Coen brothers)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에서 꿈을 좇다가 신세 망친 남자 이야기를 보며 내 미래를 점쳐보기도 하고,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에서는 여행 도중 강간 미수범을 살해하게 된 여자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용기를 얻는 과정을 보며, 감정을 절절하게 이입해보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현실로 복귀하는 과정은 때로는 아쉽기도 하고 어떨 때는 즐겁기도 하지만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누구든 공감해봤을 것이다.

타인의 삶에 녹아들어 생생히 그 세계를 탐미하게 되면, 반드시 그 끝자락에서 용기라는 결론이 날 마중 나와 있었다. , 영화는 그토록 마음속으로 바랐던 주인공이 되어보는 일, 자유로워지는 일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동시에 남들에게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오기와 패기가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고 나아갔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운 한 마디를 내뱉게도 해준다.

비굴하고 가난한 쪽방 신세지만 뮤지션의 꿈을 버리지 않는 인사이드 르윈속 주인공 르윈처럼, 살인에 강도질로 수배 중이지만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며, 도망치면서도 여행하는 것을 놓지 않는 델마와 루이스처럼 각자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작은 후회와 새로운 다짐을 해보게 된다. 이제 다시 머리맡 그림을 본다. 연극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은 뭐 하나 허투루 나오는 것이 없다고들 한다.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고,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복선이 있다는 것이다. 큰 물고기가 파도를 뚫고 올라와 용이 된다니, 미신을 믿던 옛날에나 통할법한 빛바랜 신화같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새롭게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영화를 보는 의미를 되짚어보니, 어쩌면 저 그림이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 중요한 소품이 되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살이 짓눌릴 것만 같은 거친 파도 속에서 긴 수염과 지느러미를 펼쳐 뛰어오르는 저 한 마리 물고기처럼, 스스로 만든 차갑고 단단한 마음이 내면을 짓밟으려 할 때, 나는 기필코 사력을 다해 튀어 오를 것이다. 수분으로 뒤엉겨있던 약간의 마찰마저도 떨어내고 비상해서 창공의 용이 될 것이다. 떠오르는 해를 가로질러 삶의 주인공이 되고 말리라.

 

영화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마지막 장면 (출처:https://blog.naver.com)
영화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마지막 장면 (출처:https://blog.naver.com)

그동안 봤던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남들의 인정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향해 다시 떠나는 여정에 꿈을 실어보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자, 머리맡에서 용이 되고자 변()을 꿈꾸는 잉어가 내게 주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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