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이승택 화백,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 ①
[Special Interview] 이승택 화백,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 ①
  • 이은영 발행인ㆍ왕지수 기자
  • 승인 2021.02.24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단아로 불린 왕따에서 세계적인 거장을 향해
예술은 ‘역시 비틀어야 하는 것’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왕지수 기자] 지금은 전 세계가 다 아는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이 두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시대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해 재야에 머물렀던 인물들이다.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세상은 비로소 이들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게 됐다.

▲1983년 作인 ‘바람(종이나무)’ 앞에서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는 이승택 화백ⓒ김재성 작가
▲1983년 作인 ‘바람(종이나무)’ 앞에서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는 이승택 화백ⓒ김재성 작가

정말 가치가 높은 것은 쉽게 그 진가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묵묵히 침잠하며 때가 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를 만났을 때 안으로 꽁꽁 숨겨왔던 거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여기 바로 그러한 인물이 있다. 60여 년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한국 예술계를 넘어 이제는 세계에서 주목하는 이승택 화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승택 선생은 그를 항상 따라다녔던 ‘반항’, ‘저항’이라는 수식어가 잘 대변해주듯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언제나 이단아로 불렸다. 1932년에 태어난 그는 1955년에 홍익대학교 조각과에 입학한다. 이후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다. 60년대 초, 김구림 화백이 주도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집단인 AG, 제4집단 등에도 참여했다. 

기존 조각의 관념과 체제와는 다른 길을 간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혀 그는 무리에 섞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스스로 소위 ‘왕따’였다는 선생의 말처럼 이승택 화백은 지난 세월 한국 작가로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오롯이 홀로 작품 활동에 전념해왔다.

그러나 이승택 선생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현실을 창작 활동의 원동력으로 삼아 더욱 새롭고 더욱 괴상하고 더욱 나다운 것을 찾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하는 조각은 ‘조각이 아니다’는 기성 조각의 문법에 도전해 보란 듯이 ‘비조각’이라는 개념을 정립해 일상의 오브제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고, 비물질(연기, 바람, 불, 물) 재료를 시각화 하는 획기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미술/비미술, 물질/비물질 등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해왔다. 전통 옹기, 비닐, 유리, 각목, 연탄재 등 재료 실험에 몰두하고 바람, 불, 연기 등 비물질적인 효소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형체 없는 작품’을 시도한다. 또한 돌, 여체 토르소, 도자기, 책, 고서, 지폐 등을 노끈으로 묶는 ‘묶기’ 연작을 선보이며 사물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이승택, 바람(종이나무), 1983, 한지, 나뭇가지, 가변크기,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바람(종이나무), 1983, 한지, 나뭇가지, 가변크기,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제 그는 더 이상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그를 외면했던 국내보다 해외에선 일찍이 그의 가치에 대해 주목했고 2011년에는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2012년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2013년 <프라하 비엔날레 6>, 2014년 <아르테비다>, 2016년 오쿠이 엔위저가 감독한 독일 뮌헨의 <Postwar : Art Bet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 등에 초대됐다.

2017년에는 뉴욕의 레비고비 갤러리에서, 이탈리아 베니스의 팔라조카보토에서, 2018년에는 영국 런던의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재평가가 다시금 이뤄지고 있다. 작가 이승택에 대한 연구와 그가 정립한 비조각론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한 것. 기존에 존재하는 것, 익히 봐왔던 것에서 벗어나 언제나 거꾸로 사유하고 거꾸로 바라보고 거꾸로 살았던 이승택 선생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가 선생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연희동에 위치한 이승택 화백의 자택, 집 안은 지난 60여 년의 세월 동안 예술 활동에만 몰두한 선생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듯 작품과 다양한 재료들로 가득했다.
▲연희동에 위치한 이승택 화백의 자택, 집 안은 지난 60여 년의 세월 동안 예술 활동에만 몰두한 선생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듯 작품과 다양한 재료들로 가득했다.

지난 세월, ‘서자’, ‘왕따’ 취급당해
작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생의 60여 년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展이 개최됐고, 10월에는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 ‘이승택, 한국의 비조각’이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이 진행됐다. 규모가 큰 전시를 연달아 준비하며 작년 한 해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3년에서 5년 전에 외국 미술계 전문가들, 그러니까 컬렉터들이나 큐레이터들이 찾아왔을 때 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아주 바빴다. 새로 작품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에 열린 전시들은 나의 지나온 작품 세계를 회고하는 성격의 전시였기에 이미 그 전에 작업해 놓은 작품들을 위주로 전시를 준비했다. 때문에 특별하게 바쁘다거나 신경을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두 전시는 그동안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해 온 선생의 기나긴 여정을 총망라하고 집중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였다.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는 학술 컨퍼런스까지 열어 선생에 대한 연구와 나아가 ‘이승택론’이라는 학문적 예술론 구축을 시도하는 움직임도 보였다. 작년 한 해는 작가로서 국내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할 수 있겠다. 작년 한 해에 대한 선생의 소회가 궁금하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말하자면 한국에서 서자 취급을 당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례로 10여 년 전에는 앙케이트라고 해서 ‘한국 작가 30명’, ‘20’명 등 국내를 대표하는 작가를 뽑아 신문에도 나오고 했었다. 그렇게 뽑힌 작가들 중에는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이우환, 박서보 등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이 국내 미술계에서 흔히 말하는 대세였다. 그런데 나는 그 20~30인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80년대에 두 비평가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60인을 선정했는데 거기에도 내가 빠졌다. 한 번은 조각과 관련해서 한국작가 101인을 뽑아 화집을 낸 적이 있다. 거기에도 내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미술학계든 예술론이든 전혀 이야기가 되지 않더라. 

▲이승택 화백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만나 자신의 60여 년 예술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김재성 작가
▲이승택 화백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만나 자신의 60여 년 예술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김재성 작가

심지어는 7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출신 작가들을 모아놓고 연합전을 열었다. 나도 홍익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당연히 연합전에 출품을 하지 않겠나? 그런데 한 서울대 출신 조각가가 나더러 “빨랫줄 작가가 어찌 조각가냐?”라며 항의를 하더라. 그래서 그 연합전에 나만 빠지게 됐다.

5ㆍ16 혁명이 일어나면서 국전에서 탈락한 작가들을 초대작가로 추천해 전시를 연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쪽에 전화해서 “거기에 좀 들게 해주십시오” 했었다. 처음 하는 부탁이었다. 그쪽에서 알겠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결국 그 전시에도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일을 허다하게 겪었다. 한 번은 어느 책장수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그 책장수가 서울대학교에 내 작품 도록을 가져갔다더라. 지나가는 어느 한 대학원생에게 “이 책을 사보라”라고 했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무슨 조각책이 이래?”라고 하며 탁 던지더라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때부터 우리나라와는 더 이상 얘기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국내 미술계를 아주 떠났다고 할 수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지금은 관계가 없다.

최근에 창원조각비엔날레 등에서 나를 주목하고 있지만, 나는 그전부터 국내에서 날 알아주지 않으니 나도 반사적으로 아예 그냥 무시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작년 11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회고전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오!’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언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상 미술사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인데, 국내에서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를 하고 있다”라고. 그러니까 아무런 말을 못하더라. 그만큼 국내에서는 ‘이승택’이라고 하면 잘 모른다. 

국내가 아닌 세계로 활동 영역 확장해…
예술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에 그 가치를 인정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어느 시대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국내 추세를 살펴볼 때 그래도 선생은 늦게나마 그 가치를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닌가?
물론 지금 국내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들이 상황이 아주 나빴던 시절보다는 좋다. 하지만 난 1970년대부터 이런 말을 했다.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라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선언했다. 국내가 아니라면 그것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히고자 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무언가를 하는 거야 좋기야 좋겠지만 이제 나는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다.

국내에서 선생님에 대한 재평가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와 달리 해외에서는 선생에 대한 예술적 가치를 국내보다 더 일찍이 알아봤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예술적 업적은 무엇인가?
2017년 10월에 파리 M. Economic 야외전시에 출품한 ‘새모리 바람’ 작품이 프랑스 신문에 크게 실렸었다. 또한 2013년에 열린 세계적 아트페어 중 하나인 베를린 아트페어에는 나의 노끈 설치 작품(1966 作)만 크게 나와 영광스러웠다.

2013년에는 MOMA(이하 모마)의 관계자들이 모마에서 한국현대 미술전을 계획 중이라며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내 집 앞 골목에서 AIDS 술 따르기와 대형 여체 행위 예술을 감행했는데, 모마의 일행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다. 일행 중 한 여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내게 말했다. 물론 그 전시는 빛을 보지 못하고 무산됐지만 소위 세계적인 예술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알아보고 감탄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승택, 무제, 1968/2018, 스테인레스스틸, 스틸, 우레탄, 비닐, 가변크기, 작가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무제, 1968/2018, 스테인레스스틸, 스틸, 우레탄, 비닐, 가변크기, 작가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세계 어디에도 없고 무조건 새로운 것, 독특한 개성이 배어 있는 오리지널리티 추구
해외에서 선생의 가치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2017년에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레비고비 갤러리는 뉴욕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곳이다. 날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 큐레이터 두 사람이 우리집에 찾아 왔다. 이 사람들이 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첫 번째로 세계에 없는 것을 보여줘야 하며 새롭고 신선한 것, 두 번째로 뉴욕 시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미술품이어야 한다고 대뜸 말하더라.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내게 말했다. 

고압적인 태도였지만 내심 난 뉴욕쯤은 가볍게 누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사실상 통념적으로 이 두 가지 주문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의외로 내가 그들의 요구를 자신만만하게 여긴 것은 나의 실험 미술이 지금의 뉴욕 미술계를 능가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난 웃으면서 “OK”라고 대답했다.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에 도착해 노끈 작품을 장장 8시간에 걸쳐 벽에 설치하는 등 출품할 모든 작품들을 디스플레이 해놓았다. 그러자 갤러리 직원들이 전부 나와 나의 작품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특히 묶기 기법으로 작업한 큰 칼과 톱 작품을 굉장히 인상 깊게 보더라. 이것은 으레 있는 관행적인 것이 아니라 전해 들어보니 내 작품에만 박수를 쳤다고 한다. 

더불어 뉴욕타임지에 전시 광고도 크게 실어 주었다. 그렇게 2017년 5월에 열렸던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 초대전은 대성공 했고, 전시 작품이 거의 팔렸다고 한다. 그들이 요청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롭고 신선한 것, 그리고 뉴욕 시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한 것이다.

여태까지 세계적 유명화랑계의 큐레이터, 컬렉터, 예술총감독, 평론가, 사학자 등 총 30여 명이 나를 내방해 만났는데, 그들 태반은 상술이 뛰어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전문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냉혹한 국제성과 깊고 치밀한 경쟁성, 주도면밀한 이론과 미술사조 유행 변화에 대한 박식함에 놀랐고, 차원이 다른 국제적 전문성에 놀라웠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나도 그들 앞에선 별안간 서울 촌놈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고, ‘우리의 미술 수준도 후진국에 머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외국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내가 적어둔 것이 있다. 

▲이승택 화백은 대학 시절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승택 선생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수첩 안에 기록한 글 중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이승택 화백은 대학 시절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승택 선생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수첩 안에 기록한 글 중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이승택 작가가 직접 작성한 글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놀랍게도 고유 전통이나 동양적인 것을 싫어했고, 장식적인 것, 구질구질하고 울긋불긋하고 원색적인 것, 불상 등 부석물을 외면하고 옛것을 싫어했다. 이런 시각은 서부 현대미술의 종주국이라는 자존심과 백인 우월 주의적 뿌리가 깊어 동양 경시 풍조로 이어져 왔다. 

설명적인 것, 정치적인 것, 형태가 있는 것, 동양화, 풍물 사실화 등 구시대의 미술은 아예 무시해버렸다. 

시대 유행에 지난 것, 덩어리 조각물, 상식적인 추상화, 양식화된 설치미술, 아류를 변조한 현대미술, 누구의 것 비슷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관심 있게 선호하는 미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고 무조건 새로운 것. 미술사조나 유행에 없는 것, 독특한 개성이 배어 있는 오리지널리티. 이것도 미술인가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해괴한 그 무엇, 괴상한 것, 괴이하면서 호기심을 끄는 것, 여태껏 처음 보는 미술로 새롭고 신선한 것들, 세련된 단순미, 미니멀리즘을 찾아 헤매는 마약 찾는 세파트 개처럼 호기심 많은 전문가들이었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