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故 이석우(1941-2017) 선생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故 이석우(1941-2017) 선생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02.2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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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새벽에 일어나 서가를 정리하다 보니 엽서가 하나 눈에 띈다. ''이석우, 읽고 쓰고 그리다''.

2017년 2월 초의 어느 날, 나는 뜻밖의 부음을 들었다. 이석우 선생 별세. 아니 이럴 수가! 연세는 좀 있지만 늘 활력있고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빈소에서 유족으로부터 들은 사인은 폐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직분이 장로인 독실한 크리스찬에 평소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던 분이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역사를 전공한 사학자로서 경희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미술 평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틈만 나면 늘 그림을 그려 쌓이면 이따금씩 전람회를 열었다.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조용한 성품이었다. 선생은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회원으로 만족하였으며 어떤 자리를 맡는 것도 극구 사양하였다. 그런 그가 학교를 정년 퇴직한 뒤, 2009년에 서울 강서구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여 작고한 해인 2017년까지 약 8년간 재직하였다. 

아마도 전공인 사학과 미술비평이 맞아 떨어져 겸재 정선의 예술혼을 오늘에 살리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선생의 가슴 속에서 용틀임쳤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이가 지긋하여 관직에 앉으면 업무상 스트레스가 적지 않은 법인데 그것은 또 어떻게 견디셨을까. 

옥스퍼드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교 연구교수, 영국왕립협회 해외 펠로우,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장을 역임한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자리를 맡기까지에는 오늘의 한국 문화와 예술이 처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 위기란 작게는 비전문가가 자신에게 합당치 않은 어떤 자리에 앉아 파행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데서 오는 적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크게는 원대한 문화예술의 비전이 결여된 데서 오는 걱정일 수도 있다. 이는 특히 선생의 전공이 사학인 점을 상기하면 평소 역사학자로서 느낀 어떤 소회가 그를 그 자리로 이끈 요인이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아무튼 선생이 미술관장으로 재직한 팔년 간의 노력은 이제 서서히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될 것이거니와, 이제 후학들을 위해 할 일은 학술세미나를 비롯한 구체적인 행사를 통해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되새기는 일일 것이다.

▲고 이석우(1941-2017) 선생, (좌측)중학생 시절 어머님을 모시고(중)저서 표지(우측)이석우 선생의 그림
▲고 이석우(1941-2017) 선생, (좌측)중학생 시절 어머님을 모시고(중)저서 표지(우측)이석우 선생의 그림

고인은 생전에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전공인 역사 분야의 책들도 여러 권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미술서적들이 눈길을 끈다.《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역사의 들 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 하),《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등등, 주로 작가론을 모은 것들이다. 미술 분야의 주저인《예술혼을 사르다가 간 사람들》은 수화 김환기를 비롯해서 고암 이응로, 내고 박생광, 우현 박래현, 박수근, 권진규, 양수아, 박항섭, 하인두 등 근현대 한국미술계를 수놓은 근현대 작가들을 비롯해서 박길웅, 손상기, 오윤, 최욱경 등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들을 아우르고 있다. 

직접 그림을 그려봐서인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다루는 선생의 글 솜씨는 미술에 깊은 지식이 없는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 만큼 정감 있는 필치였다. 역사학자로서 나름의 미술을 바라보는 미술사관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아 오히려 평이하단 느낌이 들 정도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조는 작가들의 삶과 예술에 대한 진한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밑에 한 사람의 미술평론가이자 역사학자 이전에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그는 손상기의 삶과 예술을 다룬 글의 끝을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로 끝맺고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비록 화가가 되진 못 하였으나 선생은 화가에의 꿈을 놓지 못 했다. 못 이룬 그 꿈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그림의 길로 인도해 준 중학교 시절의 은사 양수아에게로 이끌어 훗날 그에 관한 작가론을 쓰게 한 동력이 되었다. 선생은 틈틈이 그림을 그려 수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마침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양수아 초대전이 열리고 있어서 겸사겸사 몇 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