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피아노의 시인, 쇼팽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피아노의 시인, 쇼팽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02.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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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쇼팽의 키는 170Cm, 몸무게는 45Kg…. 무척 가냘픈 모습이었다. 작곡가 모셀레스는 “쇼팽의 얼굴은 그의 음악처럼 생겼다”고 했다.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음악은 섬세하고 매혹적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태생이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다. 그는 39살 짧은 생애의 전반을 폴란드에서 살았고, 후반을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섀즈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돼 있다. 그의 음악은 조국 폴란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고 있다. 

쇼팽은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상류사회에 들어가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 등 부유한 파리의 후원자들이 앞 다퉈 그를 초청했다. 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쇼팽 때문에 모든 숙녀들은 넋이 나갔고 모든 남편들은 질투에 불탔다.” (제레미 니콜러스, <쇼팽, 그 삶과 음악>, 임희근 옮김, p.91) 하지만 쇼팽은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는 허세를 싫어했고, 과장된 칭찬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피아니스트를 입에 발린 말로 추켜세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안느 벨르빌은 쇼팽이 극찬한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바르샤바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은 쇼팽은 말했다. “여기 피아노를 가볍고도 우아하게, 매우 잘 치는 벨르빌이란 프랑스 여자가 있습니다.” 쇼팽은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하여, 10여년이 지난 1840년 왈츠 한 곡을 헌정했다. 이 곡을 벨르빌에게 보내며 쇼팽이 동봉한 편지. “이 조그마한 왈츠는 당신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나는 이 왈츠를 당신이 갖고 있기 원할 뿐,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이 왈츠를 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쇼팽 왈츠 F단조 Op.70-2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이 곡은 쇼팽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작’으로 남았다. 누군가에게 헌정했는데,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서 쓴 곡이기 때문에 ‘유작’이 된 것이다. 이렇게 유작으로 남은 곡이 또 있다. 매혹적인 선율에 애틋한 시정을 담은 녹턴 C#단조다. 

쇼팽 녹턴 C#단조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쇼팽은 고향을 떠난 직후인 1830년, 빈에서 이 곡을 작곡하여 누나 루드비카에게 보냈다. 이 곡은 선율이 무척 아름다워서 ‘노래하는 악기’인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쇼팽 자신은 이 곡을 ‘녹턴’이라 부르지 않고 악보에 ‘느리게, 짙은 표정으로’(Lento con gran espressione)라고 써 넣었는데 출판업자가 “녹턴이라 해야 악보가 잘 팔린다”고 누나 루드비카를 설득한 결과 ‘녹턴’이 됐다. 쇼팽 시절에는 녹턴이 그만큼 인기 있는 장르였음을 짐작케 한다. 녹턴은 보통 ‘야상곡’으로 번역하는데, 꿈꾸는 듯한 선율에 매혹적인 밤의 상념을 담은 세도막 형식의 독주곡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녁의 시정, 녹턴
시인 김선우는 “일상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기 좋은 음악”으로 모차르트와 함께 쇼팽을 꼽았다. 쇼팽의 생전에 가장 인기 있었던 녹턴은 지금도 쇼팽의 곡들 중 가장 사랑받는다. 이 곡들은 쇼팽 음악의 본질인 서정성과 노스탈자를 담고 있으며, 선율과 장식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살롱 스타일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들려준다. ‘쇼팽의 또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의 연주로 들어보자. 그는 20세기 쇼팽 해석의 이정표를 세운 폴란드 출신의 거장이다. 감상에 잘도 빠지던 중학 시절, 저녁때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그의 LP를 듣고 또 들은 추억이 있다. LP 표지는 파란 바탕에 밀로의 비너스상이 그려져 있었다.  

녹턴 1번 Bb단조 Op.9-1은 플랫이 다섯 개 붙은 희귀한 조성이지만, 가장 전형적인 녹턴이다. 저녁 시간의 달콤한 서정을 이렇게 매혹적으로 표현한 곡은 드물다. 녹턴 중 가장 유명한 곡은 Eb장조 Op.9-2로, ‘쇼팽의 녹턴’ 하면 이 곡을 가리키는 걸로 이해된다. 따뜻하고 달콤한 선율, 친구가 곁에서 정답게 말을 걸어주는 느낌이다. Db장조의 Op.27-2는 조금 뒤틀린 듯한 멜로디 선이 매력적이며, 꾸밈음이 정교하고 달콤하다. 단조로 변하는 대목은 약간 애수가 드리우지만, 차분히 노래하는 후반부는 정다운 대화처럼 들린다. 

쇼팽이 쓴 21곡의 녹턴 중 초기 작품들은 더블린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존 필드(1782~1837)의 녹턴에서 자극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필드의 연주를 평하며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취향(taste)을 갖고 있고, 불변의 우아함과 섬세함, 감정적 표현이 뛰어나고, ‘벨벳 위의 진주’처럼 흘러간다”고 극찬했다. 왼손이 화음으로 반주할 때 오른손이 우아한 선율을 노래하는 쇼팽 녹턴의 특징은 존 필드의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쇼팽의 녹턴은 존 필드가 보여주지 못한 열정을 담고 있으며, 표현 방식도 매우 참신하다. 평론가 하네커는 말했다. “쇼팽은 필드가 창안한 형식을 한층 발전시켜 극적인 숨결과 정열과 웅장함을 부여했다.”

쇼팽은 자기가 존 필드와 비교되는 것을 자랑스레 얘기한 적이 있다. “내게서 배운 학생들은 내가 필드만큼 훌륭하다고 얘기해요.” 이 무렵 쇼팽의 연주를 들은 존 필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병실에서 방금 나온 재주꾼에 불과하군.” 쇼팽의 음악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첫 인상을 거칠게 내뱉은 걸로 보인다. 존 필드는 훗날 쇼팽의 녹턴이 자기의 녹턴보다 인기가 높은 것을 몹시 질투했다고 한다.   

쇼팽의 음악은 어떤 장르의 곡이든 조국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담고 있는데, 녹턴도 예외가 아니다. <향수>라는 별명이 붙은 G단조 Op.37-1을 루빈슈타인의 연주로 들어보자. 첫 음의 루바토*에서 벌써 목이 멘다. 눈물을 머금은 채 우수에 잠겨 끝없이 걸어가는 쇼팽의 모습이다. 중간 부분에서는 아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간다. 이 곡에 표현된 내면의 목소리와 절제된 슬픔은 존 필드와 비교할 수 없는 쇼팽만의 개성을 들려준다. 

‘피아노의 시’, 4곡의 발라드
쇼팽을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른다면 4곡의 발라드를 빼놓을 수 없다. 1835년, 라이프치히를 여행 중이던 쇼팽은 동갑내기 작곡가 슈만 앞에서 자신의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슈만은 자신이 발행하던 <음악신보>에서 “여러분, 모자를 벗으세요, 천재입니다,”라며 쇼팽의 음악을 소개한 바 있다. 쇼팽의 연주를 끝까지 들은 슈만이 말했다. “당신의 작품 중에 저는 이 곡이 제일 맘에 듭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쇼팽이 대답했다. “아주 기쁜 일이군요. 실은 저도 이 곡이 제일 좋아요.” 발라드 1번 G단조 Op. 23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알기 전부터 나는 이 곡을 가장 좋아하고 있었다. 

이 곡의 악상을 얻은 것은 쇼팽이 파리에 도착한 이듬해인 1832년이었다. 바르샤바의 민중봉기는 러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됐고, 독립운동 지도자 차르토리스키와 시인 미츠키에비츠 등 폴란드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망명지 파리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G단조 발라드는 미츠키에비츠의 시 <콘라드 와렌로드>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표제 음악처럼 시의 내용을 묘사한 게 아니라, 듣는 이의 가슴에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시’라고 할 수 있다. 1번 G단조는 다른 세 곡에 비해 ‘서사시’ 같다는 느낌을 준다. G단조의 첫 주제, 그리고 장조로 전개되던 선율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우면서 단조로 바뀌는 부분들은 젊은 쇼팽이 느끼던 짙은 고독과 우수를 말해준다. 이 곡의 깊은 상실감은 낙엽지는 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태인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한 게 바로 이 곡이다. 

쇼팽 4곡의 발라드(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2번 F장조 Op. 38은 여름의 오후다. 미츠키에비츠의 시 <비리스 호수>에서 영감을 얻었다. 6/8박자의 첫 주제는 신기하게도 그늘진 숲속의 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킨다. 조용한 주제가 끝나면 갑자기 포르티시모의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온갖 환상이 펼쳐진다. 장르는 다르지만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나 말러 교향곡 7번의 ‘세레나데’가 들려주는 매혹적인 여름밤의 정취를 맛보게 해준다. 3번 Ab장조 Op. 47는 <물의 요정>이란 시를 읽은 뒤 작곡했다. 일정한 형식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롭게 흘러가지만 역설적으로 네 곡 가운데 가장 세련된 균형미를 느끼게 한다. 가벼운 요정처럼 날아다니는 매혹적인 선율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쇼팽의 음악은 그 자체가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한다”며 구체적인 해설을 회피한다. 영국의 화가 비어즐리는 이 곡을 듣고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우아한 숙녀를 그렸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