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2020년 대면(對面) 무대에서 본 좋은 공연 10작품
[이근수의 무용평론] 2020년 대면(對面) 무대에서 본 좋은 공연 10작품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 승인 2021.02.24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무대 없이는 무용도 없다. 디지털과 영상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종합예술로서의 무용무대를 재생시키긴 어렵다. 춤이 주는 감동은 현장에서일 뿐이다. “춤은 사라지기 때문에 영원하다”란 알랑 바지유(Alain Badiou)의 명언을 기억하면서 실무대공연이 대부분 사라진 한 해 동안 무용가들을 그리워했다. 평론이 그들을 위로하기 전 무용가들이 나를 먼저 위로해 주었음을 실감하면서 이 공연들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10개 작품을 공연일자별로 추려보았다. 

‘비트 사피엔스’(Bit Sapiens, 김성한, 2.2, 강동아트센터 소극장)는 인간의 형태를 가졌으되 의식은 기계화된 존재인 '비트 사피엔스'를 통해 ‘미래형 인류에 희망은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자연이 파괴되고 프로그램만이 존재하는 미래세계의 우울한 모습이 어둡게 그려진다. 특이한 텍스트와 함께 객석과 무대를 가로지르며 스키장 슬로프처럼 경사를 만들고 무대 끝에 스크린을 설치한 변칙적 무대다. 과학과 예술의 연결고리를 찾는 안무자가 주지적인 실험가운데서도 머리보다 가슴으로 만드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기 바란다. 

‘BODY ROCK’(미나유, 2,19, 아르코 대극장)은 전년도 작품 ‘구토’를 통해 인간실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했던 미나유가 이 시대,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 작품이다. 절망적인 한계 상황에서 “예술은 끝까지 남아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한 배려로서 완성된다.“는 것이 전 편의 메시지였다면 ‘BODY ROCK’을 통해 미나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난해한 주제를 서정적으로 조율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마음의 흐름’(남화연, 3.24~5.10)은 무용가 최승희 아카이브의 종합판이다. 퍼포먼스를 포함해서 사진, 영상, 조각, 기사, 편지 등이 망라되어 아트선재센터 2, 3층을 채웠다. 군데군데 자리잡은 크고 작은 스크린을 통해 초기작품 ‘세레나데’(1936)를 비롯해서 ‘자오선’, ‘습작’(1935), ‘칠석의 밤’(1941), ‘풍랑을 뚫고’ 등 최승희 작품들이 연속으로 상영된다. 일본에서의 첫 안무작인 ‘에헤라 노아라’(1935, 15분)는 정지혜의 퍼포먼스로 보여진다. 최승희 춤을 재현하면서 내레이션을 통한 아카이브를 추가하는 인상적인 퍼포먼스였다.

 ‘오색팔중’(五色八重, 박시종, 7.4, 남산국악당)은 10분 내외의 춤 6개로 구성된다. 임진란 때 원산지 울산을 떠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4백년 만에 환국한 동백꽃이름인 ‘오색팔중 산(散)동백꽃’을 줄인 말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모인 한국무동인회는 이 동백꽃의 귀환을 상징한다. 산동백꽃 한 그루가 5색 꽃을 피우듯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면서 창의적인 춤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읽혀진다. 한국무동인회가 시적 감성과 여백의 미가 넘치는 무용단으로 오래도록 살아남아 우리 전통춤의 이정표가 되고 관객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네긴(Onegin, 7.22~26, 충무아트홀)은 유니버설발레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다. 푸시킨 원작, 존 크랑코 안무, 차이콥스키 음악에 슈톨제 편곡, 3막 6장 120분 공연이 기본 구조다.  세 그루 나무, 커다란 기둥, 등신대 거울 외에 별다른 장치가 없는 간소한 무대지만 사랑에 대한 다양하고 섬세한 감정들이 솔직하게 표현되는 흥미있는 텍스트다. 춤과 함께 뛰어난 연기력이 요구되는 작품에서 주역들의 춤과 출연자들의 마임연기가 함께 빛났다. 36년을 맞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IT 2.0’(신창호, 7.26)은 온라인 강의 형식이지만 효과면에서 오프라인공연과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오늘의 공연현실을 반영한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면서 신창호와 박지희의 대화로 공연은 진행된다. “AI는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AI가 예술가적 공감을 창조할 수 있는가?” “AI가 예술가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시 “MADI(동작의 코드화 프로그램)가 춤 세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까?’, ‘예술가적 감각을 MADI가 표현할 수 있을까?’ “MADI에 의한 춤 평가결과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로 이어진다. 대답은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남정호, 10,16~18, CJ토월극장)는 유희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과 문명사회의 본질을 찾아내고자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고 이를 인간의 본성과 오염된 심성에 대입한다. 흑백의상의 단순한 대비, 미니멀한 무대, 기계음 중간에 삽입되는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안무자는 사람도 자연이고 자연과 인간의 문제가 동일한 것임을 암시한다. 즉흥중시의 안무법을 통해 현학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춤, 난해하지 않으며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현대화된 K-DANCE의 본을 국립현대무용단이 만들어갈 것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패강가(浿江歌, 장현수, 11.6, 아르코대극장)’는 서울무용제의 대표 브랜드가 된 ‘무념무상(舞念舞想) II’ 4 작품 중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이었다. 임제(林悌)의 시조를 원작으로 한국 춤을 정가(正歌)와 결합시켜 임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애틋한 정(情)과 한(恨)이 서린 슬프고 아름다운 이별가를 만들었다. 청안(靑眼, 2017, M극장)’을 공연하면서 무녀(巫女)로 단장한 그녀의 춤이 잠들었던 영혼을 불러 깨우며 닫혔던 마음을 열어갔듯이 ‘패강가’의 춤이 2020년 내내 코로나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이별하는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었기를 기대한다.

‘내 노래의 씨앗’(전건호, 11,13, 아르코대극장)은 서울무용제 경연무대에 오른 8개 작품 중 하나로 이육사의 시 ‘광야(廣野)’가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텅 빈 광야를 떠올리는 무대 위에선 용수를 쓴 남녀들이 절망적인 군무를 펼친다. 용수는 감옥같이 어두운 현실의 질곡이며 제약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광야엔 꽃이 피어나고 노래도 들려온다. 현실이 어두울수록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은 커질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제약 속에서 진지한 고뇌의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해 가는가란 주제를 담백하게 그려준 작품이었다.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에서 12월 8일에 본 두 작품이 가슴에 와 닿았다. 김유연의 ‘Violet525’는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16세에 세상을 뜬 동생에 대한 안무가의 슬픈 독백이다. Violet의 꽃말은 ’나를 기억해주세요‘다. 검정색 의상, 처연한 표정으로 추는 유연한 춤은 서양식 살풀이고 음악의 레퀴엠이다. 수십만, 수백만이 코로나로 죽어가는 이 시대를 표상하면서 안무가 개인의 슬픔을 집단의 슬픔으로 치환시켜준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류지나의 ‘그 틈(the Crack)'에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싼 포대자루 속에 움직임이 있다. 좁고 어둡고 습한 공간,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곳에서 세포가 분열하듯 순식간에 생명체 하나가 탄생한다. 확장된 공간에서 두 여인은 연인처럼 하나가 되었다가 때로는 모녀처럼 둘이 되어 공존한다. 춤구상이 신선하고 유연한 몸들이 앙상블을 이룬 재미있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