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태평무 명인 이현자 회고
[성기숙의 문화읽기] 태평무 명인 이현자 회고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02.2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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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맘 때면 늘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태평무 명인 이현자(李賢子, 1936~2020) 선생이다. 이현자는 남다른 고집과 진념으로 우리 춤의 원형을 보존 계승한 공로가 크다. 이현자 명인이 작년 12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도 소망하던 태평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른지 1년 만이다. 실로 안타깝다. 우리 무용계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936년 성북동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난 이현자는 서울 토박이다. 고급공무원을 지낸 부친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혜화보통학교를 거쳐 사립명문 풍문여중고를 다녔다. 어린 시절 딸 모두에게 피아노레슨을 시킬 정도로 부모님은 문화적 소양을 중시한 열린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춤꾼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우연이었다. 풍문여고 1학년 때 학교 학예회에 선보일 작품을 구상하다가 을지로에 있던 강선영무용연구소를 찾아간 것이 운명이 됐다. 모시한복을 입고 춤추던 강선영 선생의 단아한 모습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5년 강선영 문하에 입문하여 일평생 오로지 한 스승만을 섬겼다.

강선영 문하에서 한성준으로 표상되는 중고제 전통춤 전반을 섭렵했다. 어느 정도 춤이 몸에 익자 연구소 조교로서의 소임이 주어진다. 또 모교인 풍문여고를 비롯 경기여고 등 최고의 명문사학 여학교에 무용강사로 출강하며 전통춤 교육에도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특히 무용콩쿠르에 참가한 제자들의 화려한 수상이력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기억할만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화여대 무용과를 창설하여 춤아카데미즘의 활로를 튼 박외선 선생이 그를 강사로 초빙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는 얘기다. 일본 유학파인 박외선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무용지성으로 이화여대 무용과를 창설한 춤의 개척자로 명성이 높다. 서양무용 전공자인 박외선이 한국춤 강사를 섭외하면서 이현자를 눈여겨 봤다는 사실이 놀랍다. 박외선의 수준 높은 안목과 심미안을 충족시킨 이현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무용가로서의 활동도 남달랐다. 26세 때 명동 국립극장에서 첫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승무, 산조춤, 장고춤 등을 선보여 극찬받았다. 무용극 ‘향배의 정열’을 비롯 ‘백사부인’, ‘황진이’, ‘가무보살’ 등의 작품에서도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현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스승 강선영을 보필하는 일에 전념한다. 강선영은 국립무용단 안무를 비롯 해외에서 개최되는 박람회, 엑스포 등 정부 파견 예술인으로 뽑혀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이현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까지 바쁜 스승을 곁에서 보좌했다. 고졸 학력이 평생의 한(恨)이 되어 가슴에 깊은 상흔(傷痕)을 남겼음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스승 강선영은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그 이듬해 1989년 이현자는 태평무 제1호 이수자가 됐고, 1990년 첫 번째 전수조교로 낙점된다. 그리고 1993년에 보유자후보(준보유자)가 되었다. 보유자후보는 무형문화재 후계구도에서 예능보유자 사후(死後) 영순위에 해당되는 지위로 이해된다. 이런 연유로 제92호 태평무 후계구도에서 ‘강선영-이현자’의 도식은 보편적 인식으로 여겨졌다.

태평무 명인으로서 이현자의 존재론적 의의는 전문가들의 평가에서 확인된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민속학자 정병호 교수는 “한국 전통무용을 잇는 수많은 후계자들이 있지만 이현자의 춤은 너그러운 인품과 큰 키에서 시원스럽게 발산되는 심오한 예술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名舞』의 저자 구희서 역시 태평무 후계자 중에서 가장 오랜 제자로서 이현자의 존재를 눈여겨 봤다. 이은영 서울문화투데이 대표는 강선영류 태평무의 참맛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현자를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무용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강선영의 평전 『여유의 춤 금도의 춤』의 저자 언론인 이세기는 서울신문에 연재한 「태평무-이현자」에서 그의 남다른 태평무 배움의 내력과 특별한 사제지간을 인상 깊게 피력한 바 있다. “이현자에 대한 강선영의 제자사랑은 친부모 이상이며, 자신을 대신할 사람은 이현자 밖에 없다”고 술회한 강선영의 구술을 기록으로 남겼다. 

알다시피 강선영은 한영숙과 더불어 근대 전통춤의 시조 한성준의 직계제자로 통한다. 태평무 예능보유자인 그는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거쳐 예총회장 그리고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富)와 명예,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셈인데, 무용가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무용가 강선영의 성공 뒤엔 제자 이현자의 희생과 헌신이 컸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주지하다시피 말년 이현자의 생(生)은 고단하고 굴욕적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스승의 사회적 존재감이 부각될수록 그녀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1990년대 이후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인기종목 예능보유자들이 소위 대학교수를 선호하는 엘리트 춤꾼 영입경쟁이 극에 달하면서 고졸 출신인 그녀는 스승에게 부담스런 존재로 전락했다. 

심지어 2015년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심사에서 대학교수인 후배(또는 제자) 무용가에게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불공정심사의 결과였다. 당시 불공정심사는 무용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등 초유의 사태로 비화됐다. 

매서운 꽃샘추위가 휘몰아친 2016년 3월 10일 이현자는 태평무 의상을 착용하고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로부터 3년 후 2019년 11월 그는 태평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1년 후 2020년 12월 19일 그는 세상과 영원히 이별을 고했다. 겨우 1년 남짓 예능보유자로서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코로나19’ 상황으로 춤의 날개를 펼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작년 12월 20일 저녁 8시경 이현자 선생의 빈소를 찾았다. ‘코로나19’ 탓도 있었겠지만 빈소는 더없이 썰렁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영정사진 모습에서 일평생 겸손과 섬김의 미덕으로 살아온 ‘2인자(?)’로서의 비운의 삶이 스쳤다. 비록 육신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춤의 여운은 여전히 우리 가까이 부유(浮游)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현자는 태평무의 고유미를 훼손하지 않고 ‘본디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한 보기 드문 춤꾼이었다. 천기(天氣)로 호령하는 활기 넘치는 춤사위는 지상의 만물을 제압하는 듯 강건하고 기운찼다. 연륜 배인 몸짓이 자아내는 융숭 깊은 멋은 깊은 울림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태평무의 예맥을 순혈주의(純血主義)적 전통으로 이어온 공로가 적지 않다. 서울문화투데이 무용대상(2014), 한성준예술상(2017) 수상이 그의 업적을 증거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태평무 명인 이현자! 우리 무용사가 기억해야 할 특별한 이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