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물음표’와 ‘느낌표’”
[Special Interview]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물음표’와 ‘느낌표’”
  • 이은영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2.2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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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무대 예술의 마지막 자연물”
무용 창작 환경의 지속 가능한 발전 위해 ‘안무랩’ 운영
시즌 첫 프로그램 <빨래>, 존재 탐구의 과정
힙합-현대무용-국악 장르간 협업으로 예술성·대중성 확보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진보연 기자]‘새로운 춤’이라는 뜻의 누벨 당스(Nouvelle Danse)는 프랑스의 모던 댄스와 컨템퍼러리 댄스에 걸쳐있는 사조다. 누벨 바그(La Nouvelle Vague)가 영화의 전환점이 되었듯, 누벨 당스 역시 특수한 형태로 발전하며 현대 무용의 위상을 높이게 됐다. 기존 관습을 떨쳐내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해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만큼 무용계 내부 문제점도 과감하게 들추고 다가올 앞날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누벨 당스 작품들은 이런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보다는 예술적으로 승화했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

누벨 당스는 영화나 연극적 요소를 도입해 움직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험이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 만큼 표현의 한계는 무한 확장돼 갔고, 작품 소재도 다양해졌으며, 시각·청각적 요소의 도입도 빈번해졌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더 이상 하나의 단일한 ‘테크닉’에 속하지 않았고, 많은 누벨 당스 안무가들은 전통적인 무용 교육을 받지 않은 채 각기 다른 배경에서 등장했다. 새로운 무용극으로서 누벨 당스는 혁신적이었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춘 지금, 우리 시대는 프랑스의 누벨 당스와 같은 새로운 예술적 변화의 길목에 서 있다. 그리고 남정호 단장이 이끄는 국립현대무용단은 이 흐름에 맞춰 주저 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중이다. 

대부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1980년대, 남 감독은 프랑스를 택해 3년 반 동안 프랑스 장-고당 무용단(Cie Jean-Gaudin) 단원으로 활동했다. 귀국 후에는 춤의 기술을 익히는 데만 주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가 들어간 ‘몸짓언어’로 관객과 소통했다. 부산 경성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부산여름무용축제’를 만들어 대학생들이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장을 마련했다. 

부산 경성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를 지내며 현대무용단 ‘줌(Zoom)’을 창단해 창작활동을 이어갔으며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설립된 이후에는 창작과 교수로 위촉돼 2018년 정년퇴임 전까지 현대무용 인재를 양성했다. 이어 지난해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남 단장이 부임한 직후 코로나19 여파로 무대라는 물리적 공간이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내 최초 인공지능 안무작으로 공개 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신창호 안무가의 신작 <비욘드 블랙>은 기다림 끝에 온라인 무대에서 초연했다. 

남정호 단장은 코로나19로 공연장 문이 닫힌 이 시기를 전화위복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무대를 지켜봐 주길 바란다”라며 “다만 관객의 수에 지나치게 연연하기보다는 그들의 니즈가 제대로 반영된 작품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다.

공연장의 안과 밖, 예술의 장르 구분이 흐려지고 있는 시대 흐름에 맞춰 국립현대무용단은 올해 기획공연을 통해 다양한 예술인들과 호흡하며 변화를 주도하려 한다. 힙합, 비보잉, 팝핑, 락킹 등 스트리트댄스와 현대무용, 국악 등 장르 간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현대무용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확대할 계획이며, 디지털 작업을 통한 댄스필름도 제작된다. 

쉼 없이 내면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띄우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 남정호 단장을 만나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공연 모습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공연 모습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얼어붙었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 취임 후 1년은 어떠했나?

우리는 준비도 없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를 맞이했다. 더구나 지난해는 국립현대무용단이 10주년을 맞이하던 해였다. 그래서 괜찮은 잔치 계획을 멋지게 세워놨는데 안타깝게도 전부 비대면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우리는 극장에서 관객을 직접 만나 함께 호흡하는 공연에 익숙해졌기에, 영상으로만 촬영하고 송출되는 방식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쉽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영상이 남는다는 장점은 있다. 이렇게 남겨둔 기록은 영원히 소장할 수 있는 우리의 자료가 되지 않나.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롭게 채워가고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분명 대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공연예술은 객석의 관객들이 있어야만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관객의 역할을 카메라가 대신해야 하니 끝난 후에도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있다. 무대와 객석 간에 오가는 정서, 오감의 교감이 공연의 마침표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중이다.

▲국립현대무용단 <비욘드 블랙 > 온라인 상영회 장면
▲국립현대무용단 <비욘드 블랙 > 온라인 상영회 장면

창단 10주년 기념작으로 처음 오프라인 무대로 선보인 작품은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였다. 연극적 설정을 녹여내고, 수화를 등장시키고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해 뚜렷한 메시지 전달을 했다. 명료한 전달을 위해 굉장히 절제된 안무를 선보임으로써 무용수에 작품이 내재화됐다고 느껴졌다.

굉장히 공을 들여서 만든 작품이다. 초반부는 14명의 무용수의 역동적인 군무로 채워지지만, 이어지는 다양한 장면에서 점차 생존에 실패한 ‘실종자’들이 발생한다. 변덕스러운 룰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 대열에 합류할 수 없고, 그렇게 생존자의 수는 점점 줄어 결국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모두를 죽이고 혼자 남은 하나는 행복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메시지를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관객은 한 명씩 무대에서 퇴출될 때 관객은 마치 자신이 퇴출당하는 피해자가 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를 퇴출시키는 가해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몰입은 현장에서 직접 관람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는데, 코로나19 상황으로 오프라인 공연 기간을 짧게 갖고 온라인 송출을 병행해야만 했던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올해 다시 선보일 계획이다.

방역지침으로 대면 공연이 대부분 중단된 상황에서도 국립현대무용단의 움직임은 계속됐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초연했던 <비욘드 블랙>의 과감한 시도는 예술성과 기술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이 작품의 시작은 역시 대면 공연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가장 먼저 영상화가 결정됐다. 안무자와 기술ㆍ영상 감독이 합의를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시간도, 노하우도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앞으로 여러 시도를 통해 축적해 나가야 하겠다. 특히 이번에 느낀 것은 기술력을 지닌 전문가와 안무자가 작업의 시작부터 함께 작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겠다는 점이다. 기술과 예술의 타협점을 찾는 데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며, 안무자가 어떤 미적 가치관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기술로 구현되지 못한다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비욘드 블랙>이 우리 무용단의 디지털 작업의 시작을 알렸으니, 앞으로 다양한 작업을 통해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내세우는 기업이 아닌 예술단체의 시도라고 하기엔 대담한 도전으로 비치며, ‘프로그램이 인간의 움직임을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원론적 의문을 동시에 가져오는 작업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간의 몸이 마지막 남은 자유물이다. 무대 예술의 마지막 자연물이 바로 몸이며,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움직임이 춤이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신체로만 표현하는 작업 그리고 현재 발생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작업 즉,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 투 트랙으로 뻗어가는 것은 이제 불가피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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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질문에 답변 중인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

현대예술에 속하는 현대무용은 시대를 비추는 ‘동시대성’과 미래를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실험성’ 모두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현대무용에서 ‘대중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공연 예술인들은 작품을 선보이는 그 자리에서 보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야 하는 운명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객석에 앉길 바라고, 우리의 무대를 지켜봐 주길 바란다. 다만 관객의 수에 연연하기보다는 그들의 니즈가 제대로 반영된 작품을 만들고 싶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을 보러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과 뮤지컬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이 공연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다. 더욱 많은 대중에게 현대무용의 매력을 알리되 불필요한 소스는 뿌리지 않을 것, 이 점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춤추는 강의실>이 상당히 호평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 누벨 당스(Nouvelle Danse, 새로운춤, 프랑스 앙드레말로가 문화예술정책으로 탄생시킨 프랑스적 예술정책) 챕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화가, 건축가, 철학자 등 무용계 밖의 우수한 인적자원을 무용계로 유입시켜, 무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낸 문화정책인데,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이런 정책을 도입하기 어려울까? 

우리는 무용단이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주도했던 누벨 당스처럼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긴 힘들겠지만, 다양한 예술인들과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시대 예술로서의 역할은 잘 해내고 싶다. 기획공연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타 장르 외부 안무자와의 협업도 그 일환이다. 더불어 디지털 작업을 통해 약 5개 정도의 댄스필름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미술에서 작품의 결과물보다 작가의 창조적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보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 경향이 존재하듯, 무용에서도 이러한 개념을 적용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특정한 용어로 규정짓지 않았을 뿐, 현대 무용에서 개념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명확한 가치, 개념을 가지고 무용하는 친구들을 위한 장을 조성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무랩(Choreography LAB)이다. 무용 창작 환경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이며 올해는 공영선, 나연우, 윤푸름, 이선아, 이세승, 이윤정, 정금형, 정세영, 최민선, 표상만 등 안무가 10명을 선정했다. 국내외 무용계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각자의 안무 색깔을 구축해온 안무가들이다.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다각적인 실험을 하는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힘을 실어주면 현대 무용계의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라 기대한다. 

<유연한 하루>, <댄스 온 에어> 등 국립현대무용단이 관객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유튜브 콘텐츠도 반응이 좋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강화된 온라인 플랫폼에서 새로운 무대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올해는 강의 형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안무가를 초대해 직접 대담을 나누는 살롱 형식의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의 작업 과정이나, 예술적 가치관 혹은 작업 파트너와 함께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아가 관객들도 함께 참여하며 현장 질의응답이나 작가와의 대화와 같은 시간이 마련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남정호 <빨래>
▲남정호 <빨래>(사진=남정호 저서 ‘현대 무용 감상법’, 1999, 대원사)

<빨래>가 2021년 시즌 첫 프로그램으로 무대에 오른다. 올해 첫 작품으로 선택된 이유와 시간이 흐르며 작품 내 달라진 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궁금하다.

내가 해왔던 작품 중 하나를 레퍼토리화 한다면, 그 작품은 당연히 <빨래>가 될 거라고 생각해왔다. 이 작품은 1993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 공연으로 초청된 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며 나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이 작품 사이사이에는 나의 시선이 많이 쌓여있다. 시간이 흐르며 작품도 많이 달라졌다. 어떤 부분은 더 깊어지고 어떤 부분은 훨씬 간결해지며 굵은 나이테를 만들어내고 있다. <빨래>를 작업하는 중에는 내 안에서 많은 대화가 오고 간다. 옛날의 나도 불러보고 미래의 나에게 찾아가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오기도 하고, 얼굴도 모르지만 내 DNA 안에 들어있을 고조할머니나 증조할머니 같은 조상들을 불러 모아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과거에 해왔던 <빨래>가 지금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고민해봤다. 우리는 너무 새로운 것에 현혹되어 있다. 새것이 나오면 옛것은 버려지고 마는 이 순간, 잠시 멈춰 내 시간의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더불어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와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탐구해서 발전시키는 ‘조상(祖上) 재창조’의 과정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최근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참전해 저격수가 되거나 탱크를 모는 등 그동안 전쟁 회고담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전쟁 가담 경험담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먼 나라 여성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나는 문득 봉산탈춤에 등장하는 ‘미얄할미’를 떠올렸다. 전쟁통에 헤어진 영감을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안에는 해학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품은 에너지가 우리 안에도 분명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이번 작품을 통해 그것을 표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1호 프랑스 유학생이다. 학창 시절에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춤을 선택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게 좋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를 상상해보곤 했다. 초등학교 때 가정통신란에 ‘주의가 산만하다’라는 말이 빠진 적이 없었다.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항상 움직이는 모습이 선생님들 눈엔 산만하게 보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계속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이 인터뷰 도중 파안대소하고 있다.

무용가로서 프랑스 유학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 됐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쉽게 말해 수입 대리점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걸 한다, 세상이 이렇게 많이 변했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자’와 같은, 먼저 보고 듣고 배운 사람으로써의 계몽적 사명감이 아니었나 싶다. 나를 알리기보다는 내가 겪었던 것을 한국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했던 것 같다. 

결혼과 출산 이후 나는 또 한 번 변화했다. 한 여성이 으레 겪는 인생의 과정을 지나오며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라는 각성이 있었다. 혹자는 프랑스 인형처럼 배워 온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내게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남들의 기대 보단 내 판단대로 나아가는 걸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표현될 수 있는 작품을 통해 나를 완성시켜 갔다. 

▲국립현대무용단 신규 기획 공연 ‘HIP 合’ 안무가 김보람, 김설진, 이경은 ⓒBAKi
▲국립현대무용단 신규 기획 공연 ‘HIP 合’ 안무가 김보람, 김설진, 이경은 ⓒBAKi

올해는 예년보다 많은 8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이 가운데 가장 기대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
무엇 하나 마음 가지 않는 작품이 없지만,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는 ‘Hip 合’에 대한 기대가 높다. 김보람(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김설진(무버 예술감독), 이경은(리케이댄스 예술감독)의 만남으로 힙합, 비보잉, 팝핑, 락킹 등 스트리트댄스와 현대무용, 국악 등 장르 간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현대무용의 예술성과 대중성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댄스필름과 함께 제작될 예정이다.  

직접 진행한 <춤추는 강의실>에서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는 양보다 질을 생각하고, 남의 것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변화를 내다봤다. 국립현대무용단에 있는 동안 이를 적용해 나가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일까.
사실 양과 질 가운데 한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양날의 검이 될 것이다. 양보다 질을 선택한다는 말이 엘리트주의적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고, 폐쇄적인 입장으로 대변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한 양보다 질은 조금 다른 의미다. 

지난 한 해 국립현대무용단은 온라인 강의나 오픈 워크숍 등을 통해 현대 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넓히는 작업을 해왔고, 올해도 여러 형태를 통해 더 많이 개방할 것이다. 하지만 접근성을 높이되 퀄리티는 유지되어야 한다. 세금을 내는 모든 국민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계속될 것 같다. 

교직에 굉장히 오래 몸담았는데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점이 있었다면?
부산에서 13년 그리고 서울에서 22년, 교직에 35년간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Why not?”이었다. 도전하기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걱정부터 하는 애늙은이 친구들이 많이 있지 않나. 그럼 그 옆에서 되레 내가 철없는 것처럼 한번 해보자고 이야기해 줬다. 그런 정신으로 쭉 학생들과 함께했고, 지금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만나는 학생들의 세대가 완전히 달라지는 걸 느끼면서, 후반부에는 빨리 그만두고 싶었다. 매년 오는 어린 학생들을 만나는 게,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을 마주하는 듯했다. 이질감이 좀 생기더라. 간극을 좁히기 위해선 학생들이 올라오거나 내가 그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세상으로 학생들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 생각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세대 차이에서 오는 힘듦, 가치관의 변화를 야단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두려 인내하려 노력을 많이 했지만, 많이 고민하고 갈등했던 시간이었다. 

나이에서 오는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 자기 성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내면에 가지는 젊음은 숫자로 표현되는 나이와 동일하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과거 ‘젊다는 것은 아주 빨리 호기심과 감동을 가지는 것’이라 막는데 여전히 그러한가.
젊음이란 자기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물음표와 느낌표이고, 그것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는 것 같다. 

어떤 무용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무용은 몸으로 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욕심이겠지만 내 영혼이 잘 드러나는 춤을 추고 만드는 무용가가 되고 싶다. 모범생 같은 답이 되겠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겸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