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이승택 화백,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 ②
[Special Interview] 이승택 화백,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 ②
  • 이은영 발행인ㆍ왕지수 기자
  • 승인 2021.02.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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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
현대 미술은 고도의 지적인 놀이, 작가는 공부 게을리 해선 안 돼
▲이승택 화백은 지난 60여 년 동안 다양한 재료와 자연환경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비조각’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론을 구축했다ⓒ김재성 작가
▲이승택 화백은 지난 60여 년 동안 다양한 재료와 자연환경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비조각’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론을 구축했다ⓒ김재성 작가

[1편에 이어서]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50

무엇이든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 자체가 작품
선생님의 60여 년 작품 세계를 관통했던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는 예술관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비슷한 건 가짜다!’ 조선시대 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이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슷한 건 정말 가짜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이 말을 알고 내 마음에 새겼다. 비슷한 건 계속해봐야 소용없다. 비슷한 것은 사조가 변하면 그냥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항상 고민했다. 최고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예술이 무어냐? 긍정하기보다 거부하는데 있다’라고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몇 년 후에 그 진가를 알았다.

사실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영화를 하려면 다양한 문화 등 아는 것도 많고 상상력도 좋아야 한다. 내가 충무로를 얼쩡거리던 시절,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또 그만큼 많이 봤다. 그때 당시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화가 최고였다. 그 영화들을 심취해서 보다가 느낀 것이  ‘예술은 역시 비틀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창작을 할 때 전부 있는 그대로보다 뒤쪽이나 밑에, 보이지 않는 곳들을 신경 쓰게 되었다. 세상을 봐도 거꾸로 생각하고 살았다. 어떤 정상적인 사물이라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이상하게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보다 그걸 뒤집으면 작품이 되는 거다.

▲이승택, 기와 입은 대지(2020 재제작), 전시마당 설치전경(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기와 입은 대지(2020 재제작), 전시마당 설치전경(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일성 동상부터 맥아더 장군 등 제도권의 주문을 받아 동상을 작업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기존 조각 체제에 도전한 저항미술을 추구해왔던 선생의 가치관과 행보와는 모순된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작품을 하면서 비굴해지거나 남들 눈치 보고 싶지 않았다. 예술, 미술은 창조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용기인거다. 남들 눈치보고 비굴해지기 시작하면 자유롭게 창작을 할 수 없다. 

자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이유는 예술가 스스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구상했을 때 그 평가에 대해 눈치 보는 비굴함은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가난이 결국 작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용기와 대담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예술도 그렇지만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잘 살고 마음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힘차게 살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유하고 독창적인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거다.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80년대 이후 경제가 좋아지면서 이후 젊은이들이 제대로 살고 제대로 먹고 제대로 생각하고,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됐다. 그러므로 문화에 독창성이나 개성, 다양성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나는 동상 작업을 하고 경제력이 좋아졌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니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이승택 선생이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일 당시 첫 과제물로 제출한 나무 조각 작품. 나무 조각 밑에 다리 이미지는 훗날 이승택 선생이 새롭게 조합해놓은 것이다.
▲이승택 선생이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일 당시 첫 과제물로 제출한 나무 조각 작품. 나무 조각 밑에 다리 이미지는 훗날 이승택 선생이 새롭게 조합해놓은 것이다.

끊임없는 탐구와 공부, 그것이 내 작품의 영감의 원천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 미술은 고도의 지적인 놀이다. 인문학이나 철학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이것을 깨달았다. 

한때 나는 시립대학에서 축소 조형론을 대학원생에게 가르쳤다. 80년대 즈음이었다. 4~5명 정도 되는데, 당시에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내가 지금 말하는 건 프로의 세계다. 아마추어 세계가 아니다. 프로의 세계를 이제부터 말할 테니까 지금까지 배운 것은 쓸모가 없으니 버려라”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프로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가르쳤다. 

그게 무엇이냐면 우선 비평력. ‘이게 좋다, 나쁘다’를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과 비평력을 키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문학이고 뭐고 그 모든 작품이 좋고, 아니고를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판단력과 비평력을 습득해야 한다.

▲이승택 화백이 자신의 자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만나 인터뷰를 나누고 있다ⓒ김재성 작가
▲이승택 화백이 자신의 자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만나 인터뷰를 나누고 있다ⓒ김재성 작가

그럼 그걸 어떻게 하냐? 그러려면 작가는 많이 알아야 한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철학에 관한 공부도 많이 했다. 그전에 나온 학문이나 문학 또는 여러 예술을 직접 보고 듣고 스스로 생각하고 비평도 해보고 이런 거를 해야 한다. 

나는 솔직한 이야기지만 철학을 공부할 때 어렵고 정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그래도 ‘아, 이게 철학이니까 알아야지’라고 생각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자꾸 친해지려고 했다. 철학은 ‘옳다, 아니다’의 정반합의 원리를 알게 된다.

책을 볼 때도 빠르게 내용이 무엇이고 핵심이 무엇인지 통찰해야한다. 또한 좋은 얘기, 명언 좋은 시, 속담 등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 참 좋은 거 많다. 나는 그거를 몽땅 찾아 전부 기록했다. 역사, 철학, 인문학적인 좋다는 것들을 다 습득한 것이 그것이 지금까지 제가 작품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영감의 원천이자 나의 밑거름이다.

그래서 난 젊을 때나 지금이나 최근까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샘물 같이 예술에 대한 영감이 막 나온다. 그걸 자제하는 게 힘들다. 

머릿속이 작품으로 가득 찼다. 자다 말고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까 꿈속에서도 고민하고 잠이 안 올 때 작품 생각을 하면 정말 즐겁다. 작품은 남들을 위해 만든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스스로 좋은 것을 만들고 즐거워하는 거다. 남들은 작품을 새롭게 창작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냐고 말을 하는데 난 지금까지 늘 즐겁게 힘들지 않고 작업을 해왔다.

나는 작품을 매 순간 구상하면서 스케치를 한다. 여담이지만 스케치 한 것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작품이 될까?”하고 물으면 아내는 설거지 하다가도 답변을 해준다. 아내가 “괜찮은데?”라고 하면 벽에 붙여놓고 그것을 보면서 바로 작업을 하고, “별로”라고 하면 그냥 찢어버리기도 한다. 

▲이승택, 성장(오지탑)(2020 재제작) 옹기, 360x50x50cm.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성장(오지탑)(2020 재제작) 옹기, 360x50x50cm.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났나?
학교에서 만나 연애를 했다. 나보다 7살 어린데, 아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다니던 학교 교수님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을 했다. 아내가 인기가 워낙 좋아서 6명인가 경쟁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명문대 박사도 있었다. 기라성 같은 경쟁자 중에 내가 선택을 받았으니 ‘나는 복권 당첨됐다’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니까 내가 그림을 잘 그려서 좋았다더라. 아내는 그런 나를 참 좋아해줬다.

아내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다. 그리고 손재주가 정말 좋다. 아내가 젊었을 적 호랑이 민화 작가로 활동했는데 그 시절에는 나보다 더 유명했다. 지금까지 내가 별다른 친구가 없는 건 아내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좋기 때문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천사 같다. 게다가 요리도 정말 잘한다.

현재까지 작품을 하는 이유, 인간의 한계점 뛰어넘고 싶어…
서두에도 잠깐 말씀하셨듯이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오셨다. 이러한 자신감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한 일주일 전에 광주 미술관의 윤학이 책을 냈다고 내게 가져왔다. 나와는 예전부터 친한데 그가 이번에 새롭게 기고한 책 맨 끝에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 ‘김환기와 이우환, 그 외에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이승택 선생님이다’라고.

세계적인 대가들은 젊은 때는 다 좋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시들해지고 만다. 그들은 대체로 평생에 걸쳐 대표작이 10점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나는 100점이 넘는다. 이것은 허풍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남을 따라 하기보다 내 것을 만들어야 함을 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했다. 이것이 내가 90살까지 살며 쌓은 업적이며 지금까지도 나는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난 내 마음속에서 이미 세계 최정상을 달리고 있고 또 3천여 점의 작품들이 건재하다. 세계에서 나만큼 개념과 소재,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현재까지 작품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점을 뛰어넘고 싶어서다.

▲이승택, 무제, 1994, 혼합재료, 가변크기, 작가소장/작가는 이 작품을 ‘동학혁명의 타오르는 횃불’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무제, 1994, 혼합재료, 가변크기, 작가소장/작가는 이 작품을 ‘동학혁명의 타오르는 횃불’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선생의 수많은 작품 중 바람 연작이 유명하다. 그 중 1983년 作인 나뭇가지에 종이끈을 매달아 설치한 ‘바람(종이나무)’은 1984년 미국 LA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되어 큰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이 특히 궁금하다.
“나무가 종이로 변하더니 바람이 인다. 그리고 자유가 흥겹게 춤을 추게 한다.” 이 작품은 나무로부터 탄생한 종이를 나뭇가지에 매달아 보이지 않는 바람의 미세한 흐름을 표현한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만들었다. 이 말은 50년대 말부터 내가 신주 모시듯 귀하게 여기는 말이다. 이 개념은 문학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후 미술로 이 개념이 옮겨왔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철학적인 의미가 깊다. 어떤 작품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아!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우리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만들었던 80년대에는 팝아트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의 미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들을 거부했냐면 예술 강대국이라고 하는 그들의 문화에 상대적으로 약소국이며 제3국이라 불리는 곳은 그냥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나는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것 말고 우리나라에서만, 우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번외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니 3년간은 옹기 공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연구와 고민 끝에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 환경, 의식주, 나무 그런 것들을 다 통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동학 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회에 출품한 대형 설치 작품 ‘무제’도 있다. 혁명을 상징하는 불꽃이 그려진 회화 작품과 ‘사발통문’이라고 쓰여 진 광목천 위에 요강이 놓여 있고, 흙과 쇳가루를 뿌린 설치 작품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나도 그 작품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인데, 그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할 당시 그 작품에 대한 평에 작가인 내 이름도 제대로 적어 놓지 않았다. 내가 화가 나서 그 전시회에 가서 말도 없이 그 작품을 그냥 들고 나왔다.

▲이승택, 무제, 1968/2018, 스테인레스스틸, 스틸, 우레탄, 비닐, (좌)363 x 185 x 110cm, (우)335 x 130 x 150cm,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무제, 1968/2018, 스테인레스스틸, 스틸, 우레탄, 비닐, (좌)363 x 185 x 110cm, (우)335 x 130 x 150cm, 작가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현재 우리 미술계, 공부하지 않고 유연성 없는 관료제 만연
현재 대한민국의 현대미술계를 바라보는 선생의 시선이 궁금하다.
젊은 작가들, 책을 안 보는 작가나 교수들이 뭘 할 수 있겠나? 공부를 안 하고 책도 안 보는 작가들. 그러니까 생각이 하나같이 다 뻔한 거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죽었다. 죽어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 후배들이 나왔으면 하고 바란다. 바라고 있지만 공부들을 안 하고 책을 안 읽으니 그게 나올 수가 있다. 제발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또한 아주 그냥 이 나라에 여전히 살아있는 지독한 관료제. 형편없다. 그런 딱딱하고 경직된 관료제가 만연한 미술계가 한국의 현대미술을 죽이고 있다. 

후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미술의 역사는 새로움의 역사이다.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낳는다. 이건 진짜 명언이다. 예술의 역사란 미술사, 예술사의 새로운 고수의 역사다. 새로운 것은 전과 다른 것이며 나는 그 새로운 힘을 전파시키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새롭다는 말은 그 원형적 뿌리는 먼저 모험 정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대체로 나의 지난날의 작업들은 실험예술이고 작업 현장에서의 작가에 대한 격렬한 퍼포먼스이다. 

더 이상 ‘세계적이다’라고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 그 자체로 세계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승택의 존재를 옛날처럼 숨길 이유가 없다. 세계에 대고 큰소리를 치고 싶다. 이제 세계에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고개 들고 떳떳하게 큰 소리 치고 싶다. 누구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도록 하고 싶고 그런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