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인간 실격, 배출 그리고 인간 합격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인간 실격, 배출 그리고 인간 합격
  • 윤영채
  • 승인 2021.03.1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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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잠시 부산에 살았던 적이 있다. 벌써 2년 전 이야기다. 엄마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와 그 사이에 붙은 좁은 원룸에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 셋이 살았다. 재수생의 신분으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엄마를 도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나는 섭식장애(마른 몸매에 대한 강한 욕구로 다이어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심리적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으면 모두 토해버리거나 때로는 아예 먹기를 거부했다. 제대로 된 영양분 섭취가 이뤄지지 않아, 변비와 탈모를 남몰래 달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혼자 살기에도 작은 방에서 씻고, 먹고, 토하고 잠을 자고, 이런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서 있기도 좁은 작은 싱크대와 문을 열면 손님들이 이용하는 화장실 문과 맞닿은 한 뼘 복도, 갑갑해서 미칠 수도 있으니 일부러 경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돌아다녔다. 뭔가 분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낯선 부산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반경은 넓지 않았다. 고작 근처 부경대학교 길거리가 전부였다. 외로운 타향살이,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털 수 있었던 곳은 노래방 그리고 중고 서점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책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엄마가 카페를 마감하면, 홀에 앉아 작은 등을 켜고 책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에쿠니 가오리(えくにかおり)도쿄 타워’, 히가시노 게이고(ひがしのけいご)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등 일본 소설이 주류를 이뤘다. 그중 서른아홉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의 천재 작가 다자이 오사무(だざいおさむ)의 소설 인간 실격은 특별한 감흥을 주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화상이라는 평을 받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사망한 작가의 인생과 소설 속 주인공 요조의 삶이 몹시 닮아있기 때문이다. ‘요조는 부유한 집의 아들, 잘생긴 얼굴, 유쾌한 성격 등으로 남부러운 것 없어 보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큰 괴리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모순적인 행동을 거듭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 여자, 마약에 취해 점점 피폐해져 간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그가 유년 시절부터 인간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포를 견뎌왔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삶은 배출이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 그 자체다.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일 수 없었던 사람의 슬픔,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에서 사는 자의 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두려운지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에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유독 이 소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숨 쉴 구멍, 말할 틈 하나 없이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그와 내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허락된 외출,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 노래방에서 갈라진 고음을 내며 감정을 분출하는 일 그리고 똥 꿈을 꾸길 기대하면서 복권을 사는 일뿐이었다. 실제로는 변비로 고생하면서도 꿈에서만큼은 똥을 보길 원했다. 자꾸만 괴상한 생각에 치우치기도 했다. 불안이 커졌고 때로는 우울함에 빠져 눈물을 훔쳤다.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의도를 가지고 못된 말을 내뱉고, 상대를 내 감정의 폐기물을 투척하는 쓰레기통쯤으로 여겼다. 몹시 부끄러운 삶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인간 실격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하루 세 번의 배출을 한다. 아침에 전날 먹은 양식을 배출하는 것, 친구들과 그날 있었던 일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오후의 배출, 저녁에 홀로 산책을 하면서 개인적인 감정을 밀어 보내는 일이 그것이다. 물리적인 배출도 원활하고, 감정에 쌓인 것을 털어내는 것도 잘 해내고 있다. 섭식장애도 완벽하게 이겨냈다. 공복에 유산균을 섭취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울기도 감추지 않고 한다. 저녁에는 귀찮더라도 홀로 사색을 즐기는 산책길에 오른다. 그 길에서 작은 고민을 정리하고, 큰 문제들을 결정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저 토해내듯 울다가 올 때도 있다. 복권 따위의 요행을 좇으며 똥 꿈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항상 준비된 마음가짐으로 있어야 행운이 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배출이 되는 삶을 살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금 인간 합격의 순서를 밟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무언가를 분출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감정 배출의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그것이 노래방이어도 좋고, 친구 또는 애인이어도 좋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가사의 음악을 듣는 것도, 책을 잡는 것도 무방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감정은 꼬이고 꼬여 풀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잘못된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그때는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날씬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마음속에 자란 감정의 골을 해소했어야 했다. 자신을 망치고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기 전에, 그랬어야 했다. 늦은 후회는 소용없으니 이만하기로 한다.

과거의 윤영채는 분명한 인간 실격그 자체였다. 이를 딛고 올라선 지금의 윤영채는 내가 보기에도 꽤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용기를 낼 줄도 알고, 하고프면 실행에 옮겨버리는 결단력도 생겼다. 스스로 섭식장애에서 벗어난 일, 아침마다 쾌변하는 습관, 밤마다 감정을 배출하러 산책하러 가는 내가 좋다. 하루에 세 번 끼니를 챙기듯이, 우리 모두 적어도 세 번의 배출이 있었으면 좋겠다. 작든 크든 마음의 짐을 뱉어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 합격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