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피아노의 시인, 쇼팽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피아노의 시인, 쇼팽Ⅱ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03.17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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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4번 F단조 Op. 52는 많은 사람들이 ‘쇼팽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다. 쇼팽이 32살 되던 1842년에 만든 이 곡은 소나타 형식과 변주곡 형식이 얽히며 거대한 구조를 만들고, 우아한 클라이맥스를 거쳐 비극적인 느낌으로 끝난다. 원숙한 쇼팽은 이 곡에서 현란한 화성과 대위법을 구사했다.   

발라드는 원래 ‘이야기를 담은 성악곡’을 가리켰는데 쇼팽에 의해 기악곡으로 자리 잡았고, 훗날 브람스와 포레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남겼다.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쇼팽이라면 바로 저렇게 연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유연한 연주를 들려준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는 디테일에서 충분한 루바토*를 구사, 시적인 느낌을 진하게 표현했다.  

* 루바토 : ‘잃어버린 시간’이란 뜻. 연주할 때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시간을 늦추는 기법.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모차르트와 쇼팽은 오른손으로 섬세한 루바토를 구사했고, 이때도 왼손은 박자를 정확히 유지했다. 

고결한 춤곡, 왈츠
쇼팽의 매혹적인 C#단조 왈츠, 애수어린 주제가 반복되고 공기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춤춘다. 담담히 생각에 잠겨 노래하는 중간 부분에 이어 다시 매혹적인 주제로 돌아온다. 이 곡은 실제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브루농빌이 안무한 최초의 낭만 발레 <공기의 요정>의 주제곡이다. 쇼팽이 이 곡 하나만 남겼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루빈슈타인도 이 곡을 사랑하여 앵콜곡으로 즐겨 연주했다. 

쇼팽 왈츠 C#단조 Op.64-2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19세기 전반, 나폴레옹의 전쟁이 끝나자 정치와 혁명에 염증을 느낀 빈 사람들은 향락으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고,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빙빙 도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크게 유행했다. 쇼팽은 1830년 빈에 머물 때 이 왈츠를 듣고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지 “빈의 왈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쇼팽의 왈츠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언제나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 한 쇼팽, 그의 왈츠는 폴란드 시골 춤곡인 마주르카에 가깝다. 슈만은 “쇼팽의 왈츠는 그의 몸과 마음이 춤추는 음악”이며, “여기에 맞춰 함께 춤 출 파트너는 백작부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빈의 왈츠에 비해 훨씬 더 고결한 시정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첫 왈츠인 <화려한 대왈츠> Eb장조는 그의 음악 중 가장 즐겁다. 곱게 치장한 폴란드 농촌의 젊은 남녀가 환한 표정으로 군무를 추는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쇼팽은 “이 곡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쇼팽 화려한 대왈츠 Eb장조 Op.18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파리에 정착한 뒤 쇼팽은 마리아 보진스카라는 폴란드 귀족 가문의 여성에게 마음을 주었다. 마리아는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할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고 쇼팽의 초상화를 그린 재능 있는 화가였다. 쇼팽은 1837년 2월 그녀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딸이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리아와의 사랑이 싹틀 무렵 공교롭게도 결핵이 발병했고, 이 때문에 사랑마저 잃게 된 것이다. 쇼팽은 마리아 보진스카가 보낸 편지 묶음에 ‘모야 비에다’, 곧 ‘나의 슬픔’이라고 써 놓고 평생 간직했다. 그녀와의 만남을 기념하며 작별 선물로 준 곡이 ‘이별의 왈츠’ Ab장조 Op.69-1이다. 

쇼팽 왈츠 Ab장조 Op.69-1 <이별>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생애 마지막 해인 1849년, 결핵이 절망적으로 악화된 쇼팽은 누나 루드비카에게 썼다. “이번에 아픈 게 나으면 정말 폴란드에 돌아가고 싶어.”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쇼팽은 그해 10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10월 30일 파리 마들렌느 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오르간으로 연주한 그의 프렐류드 E단조가 구슬피 울려 퍼졌고, 이어서 그의 유언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그의 몸은 파리의 페르 라섀즈 묘지에 묻혔지만, 심장만은 그의 유언대로 누나 루드비카가 조국 폴란드로 가져와서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예르치 안차크 감독의 영화 <쇼팽, 사랑의 열망>은 러시아의 압제에 신음하는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하는 쇼팽의 마음을 그렸다. 이 영화의 주제곡은 쇼팽이 생전에 발표하지 않아서 유작이 된 왈츠 A단조다. 쇼팽의 음악에서 단 한 곡만 추천하라면 나는 이 곡을 들 것이다. 쇼팽의 피아노곡 중 가장 짧고 쉬운 이 곡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테크닉을 사용하지 않았고, 쇼팽의 내면을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노래했다. 쇼팽은 “단순한 게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장 단순해서 가장 아름다운” 이 A단조 왈츠는 쇼팽의 심장에서 피어오른 한 떨기 꽃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쇼팽 왈츠 A단조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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