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거장의 숨결, 김복희 춤인생 50년
[성기숙의 문화읽기]거장의 숨결, 김복희 춤인생 50년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03.1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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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며칠 전 김복희무용단 창단 50주년 기념공연 <춤의 향기>(2021.3.5.~7,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가 열렸다. ‘코로나19’ 상황임에도 무대와 객석 모두 온기로 가득했다. 흔치 않은 거장의 무대였기 때문이리라. <춤의 향기> 무대엔 기존 안무작 ‘피의 결혼’과 남지심 작가의 불교소설 『우담바라』를 무용화한 신작이 올랐다. 팸플릿엔 50년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무용가 김복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현대춤에서 한국성이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일평생 되짚어 왔노라고. 이번 무대는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것이라고 고백한다.  

올해 나이 73세인 김복희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구에서 태어났다. 예술에 조예가 남달랐던 모친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 때 한국 고전무용으로 첫 발을 뗐다. 궁중여령 출신 정소산에게 정재도 배웠다. 무용가로의 입문은 이종사촌 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이종사촌 언니는 신무용가 조용자이다. 타고난 재능과 수려한 외모를 지닌 조용자는 일제강점기 세계적인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의 맥을 이을 유망주로 손꼽혔다. 아쉽게도 그는 6.25 전쟁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에서 생을 마쳤다.

여고시절 김복희는 결정적 순간과 마주한다. 1963년 미국 현대무용의 거장 호세 리몽의 내한공연을 접하고 춤에 대해 개안(開眼)하는 계기를 맞는다. 멕시코 출신의 호세 리몽은 음악·미술을 전공했으나 뉴욕에서 다양한 무용세계를 접하고 무용가의 길을 걷는다. 도리스 험프리 문하에서 동양적 테크닉을 체득하고, 스페인·멕시코 춤스타일에 경도됐다. 스페인 내란전에 대한 관심,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등 사회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등 휴머니스트 무용가로 알려져 있다.

김복희는 고향 대구에서 현대무용가 김기전 문하를 거쳐 이화여대 무용과로 진학한다. 진취적 성격의 김기전은 대구시립무용단 창설의 주역으로 손꼽힌다. 1981년 창단된 대구시립무용단은 한국 최초의 현대무용 전공으로 구성된 공공무용단으로 기록된다. 일본 유학파로 한국 현대무용의 기틀을 다진 김상규를 배출한 대구는 자유로운 창작이념이 구현되는 풍요로운 토양을 가진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학시절엔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 박외선과 육완순을 사사했다.     

무용가 김복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불교적 세계관의 현현이다. 집안내력의 영향으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자(佛子)였다. 스물 셋이던 1971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작품으로 불교를 모티브로 한 ‘법열의 시’를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후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 ‘향’, ‘요석, 신라의 외출’ 등을 안무했다. 줄곧 불교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에밀레종을 소재로 한 ‘뒤로 돌아 이 소리를’, 그리고 선(禪)을 주제화한 ‘아홉개의 의문, 그리고’ 등도 수작으로 평가된다.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도 관심사다. 시와 소설을 즐겨 읽고 근현대 문학작품을 춤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춤을 이른바 ‘몸으로 쓰는 시’라 여긴다.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비롯 신경림의 ‘우리시대의 새’, 그리고 무용평론가이자 시인 김영태의 ‘덫’의 시어(詩語)가 그의 예술적 상상력에 의해 독창적인 몸짓언어로 재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다. 이광수의 소설 「꿈」은 김복희의 안무를 거쳐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으로 재탄생되었다. 한국적 현대무용의 소중한 성취로 회자된다. 그의 문학적 관심은 국경을 넘나든다. 스페인의 저항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3대 비극을 다룬 예에서 찾아진다. ‘피의 결혼’을 비롯 ‘슬픈 바람이 머문 집’, ‘석녀 예르마’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피의 결혼’은 국내뿐 아니라 멕시코,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 라틴문화권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무엇보다 ‘피의 결혼’은 이 작품의 본고장 스페인에서 공연되어 크게 호평받았다.  

중년이후 김복희의 안무는 문학에서 그림으로 확장된다.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다룬 ‘달과 까마귀, 이중섭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중섭의 작가적 고뇌와 비극적 가족사, 치열한 창작정신을 군더더기 없이 정교하게 형상화하여 거장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알다시피 김복희는 해방이후 춤아카데미즘 1세대를 상징하는 무용가로 손색이 없다. 근대화된 교육시스템에서 구현된 소수정예의 질 높은 무용교육 수혜자답게 그는 자신이 선취(先取)한 희소성을 한국의 무용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한국 무용계의 풍토에 견주어 볼 때 스승의 계보에서 이탈하여 독자노선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0대 초반 김복희·김화숙 무용단을 창단, 스승으로부터 ‘독립선언’을 감행했다. 당찬 행보는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예술 도반 김화숙과 함께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불교적 전통과 민족의 고유성을 토대로 ‘한국적 현대무용’을 추구하여 남다른 예술적 성취를 거뒀다. 

김복희는 무용계 지도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국현대춤협회를 조직하고 ‘춤작가12인전’을 창설했다. 작가정신을 표방하며 한국 예술춤의 환경조성에 나섰다. 대한무용학회 회장을 지내며 무용이론과 학술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점도 눈여겨 볼 점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위원으로 활동하며 무용정책 구현에도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이력은 특별하다. 2005년 그가 제19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에 선출된 것은 파격에 속한다. 현대무용 전공의 대학교수였기 때문이다. 역대 무용협회 이사장은 대부분 학원파(무용연구소) 출신의 한국무용가가 주를 이뤘다. 현대무용 전공의 대학교수인 김복희가 무용협회 이사장이 되자 한쪽에서는 우려했고, 한쪽에서는 기대가 컸다. 

기대만큼 성과도 이어졌다. 무용협회 이사장 시절 대한민국무용대상,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를 창설하여 활동영역의 외연을 넓혔다. 무용계의 오랜 숙원이던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아르코예술극장의 무용전용극장 지정 등 공적(公的) 제도화의 영역에서도 유의미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불공정 선정과정에 대한 범무용계 비판에도 협회 차원에서 앞장섰다. 당시 무용계 안팎에선 진정한 리더라는 평이 있었다.  그런 한편 협회 운영방식과 관련 ‘그들만의 리그’ 내지 견고한 카르텔의 지속이라는 우려와 비판도 없지 않았다. 

김복희는 자신의 안무관 내지 창작론 성격의 저서 『춤으로 삶의 집을 짓다』(2013)를 상재했다. 그에게 춤은 곧 ‘삶의 집’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73세의 나이에 신작으로 남지심의 소설 『우담바라』를 무용화한 그의 ‘집짓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노년에 이른 무용가 김복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