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마리아, 정보옥
오키나와의 마리아, 정보옥
  • 이동식 저술가
  • 승인 2021.03.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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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저술가
▲이동식 저술가

"일본 험지에 가서 봉사하던 한국인 여의사가 일본인에게 피살되었다.
어? 이런 소식은 나도 생전 처음 듣는데?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당연히 이런 의문이 연달아 생길터인데 사실이었다. 다만 요즈음 일은 아니고 1979년이니까 42년 전 일이다.

장소는 일본 오키나와의 작은 섬인 북대동도(北大東島, 일본 발음으로는 기타다이토지마). 인구 650명 정도가 사는 작은 섬인 이곳에서 주민들을 위한 병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한국인 여의사 정보옥 씨가 1979년 6월17일 저녁 8시경에 괴한에 의해 피살된 채로 그 다음날 이곳 주민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 섬은 오키나와의 중심지인 나하시(那覇市)에서 동쪽으로 약 350킬로미터 떨어진, 망망대해 속의 작은 섬이다. 숨진 정보옥 씨는 당시 63살, 정씨는 1977년부터 2년 계약으로 단신 이 섬에 부임해 섬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면서 사람들과 상담도 해주고 어려움도 풀어주고 하는, 그야말로 이 작은 섬마을의 마리아(성모)였다. 작은 병원이 있지만 의사가 없어 한국에서 초빙된 정 씨는 낮에는 진료를 하고 저녁이나 다른 때에 주민들의 회합이 있으면 참석해서 같이 즐거움을 나누고 고민도 들어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분이 병원 뒤의 거주하던 집 부엌 안쪽에서 갑자기 목이 졸리고 둔기로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살인 사건이라고는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없을 섬마을로 알려진 이곳에 이런 사건이 생겼으니 당연히 오키나와 전체에 큰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는 큰 섬으로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으므로 범인은 당연히 섬 주민일 터, 자국민도 아니고 외국인 자원봉사자가 피살됐다는 엄청난 사건이 생기자 경찰이 대거 출동했다. 현장을 와서 보니 평소에 잠그고 다니던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정씨가 잠옷 바람이었다는 것이어서 범인은 동네의 주민이라고 추정하고 수사를 벌였다 이윽고 범인은 15살의 중학교 3학년 소년으로 밝혀졌고 범인은 사건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학교에 다니다가 9일 후인 26일에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정 환경이 여의치 않았고 강간 전력도 있는데 오후에 환자인척 하고 들어갔다가 수상하게 여긴 의사가 나가라고 하니까 갑자기 돌변해 강간 살인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진료를 하는 정 보옥 씨
▲진료를 하는 정 보옥 씨

오키나와로서는 얼굴에 먹칠을 한 큰 사건인만큼 이 여의사의 장례에 예를 최대한 갖추었다고 한다. 한참 더울 때라서 곧 시신을 나하시로 옮겨 화장한 다음에 류구대학 부속병원에 시신을 안치하고 서울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38살의 아들 윤정철씨에게 연락해, 아들이 급히 날아와 빈소를 지키며 도쿄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의 김경철 참사관 등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각계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다. 그리고 곧 서울로 운구해서 6월25일에 충현교회에서 고별식을 가졌는데 오키나와 현의 부지사와 이 섬의 촌장이 서울에 가서 고별식을 함께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어떻게 하여 정보옥씨가 한국도 아닌 일본 오키나와의 외딴 섬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게 되었을까? 오키나와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한 이후 미군이 진주해 미군 비행장을 운영하면서 미국이 다스렸다가 일본측의 거센 반환 운동에 따라 1972년에 일본으로 반환되었는데 기반시설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오키나와는 인구가 1만명 정도였는데 의사는 6명 밖에 없어서 의사 1인이 담당할 주민이 천5백 명이 넘어, 일본 본토에 비해 2배 이상 열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본토에서는 이곳에 오려는 의사들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한국에서 구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와 4년 전에 한국에 대표단들이 나와서 해방 전에 일본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집을 하게 되었고 이때 15명의 한국인이 선정되어 오키나와로 오게 되었고 그 중의 한 명이 정보옥 씨였다고 한다. 

그런데 평양 출신으로 일본 나고야 의대에서 의사수업을 한 정보옥 씨는 당시 의사였던 남편 윤성실 씨가 먼저 세상을 뜬 상태에서 역시 의사인 젊은 아들을 두고 이곳 오키나와에 왔다는 것이다. 오키나와로 갈 때에 가족들이 걱정을 하며 만류했지만 오히려 가장 가기 어려워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자원했다고 한다. 그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스스로의 길을 택한 것으로 가족들은 설명한다. 그렇게 해서 변을 당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하루 평균 5명, 모두 합해서 연인원 2천명이 넘는 진료를 통해 지역 주민들의 엄마처럼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동안 환자 가운데 18명은 헬리콥터로 오키나와 본 섬으로 후송돼 살아나기도 했는데, 이렇게 생명을 건진 사람들을 포함해 주민들은 정 보옥 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나중에 시신이 섬을 떠날 때에 300명 이상이 모여 전송을 했고, 촌장과 촌의회의원 전원과 많은 주민들이 시신을 실은 배를 타고 발인이 거행되는 나하시로 건너와 장례식에 참석했고 , 또 섬에서 열리는 가장 큰 체육대회도 이 때에 중단했다고 한다.

▲남편 윤성실 씨와의 약혼사진
▲남편 윤성실 씨와의 약혼사진

장례식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와서 산림청직원으로서 또 민예연구가로서 우리나라의 민속 생활문화재들을 찾아서 정리하고 산림녹화에도 기여를 한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1891년 1월 15일 ~ 1931년 4월 2일)를 다시 보는 듯 하다. 아사카와 다쿠미도 30대 초반에 갑자기 세상을 떴을 때에 청량리 일대 수 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그의 운구를 따라 망우리 묘지에 가서 안장을 지며보며 애통해 했다. 말하자면 한국에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가 있다면 일본 오키나와에는 한국인 정보옥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이 일본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던 도중에 살해된 이 사건은, 자칫 민족감정을 유발한만한 큰 사건이었는데도 당시 조용히 처리된 것은 유족들이 이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은 고인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고 이에 오키나와에서 온 사람들이 이러한 유족의 태도에 몸둘 바를 몰랐다고 증언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로부터도, 일본측으로부터도 정보옥 씨가 거의 잊혀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보옥 씨를 아는 분이 아들 윤정철 씨 등 유족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는 듯 하고 언론들도 잊은 지 오래인 듯 인터넷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1979 사건 발생을 보도한 중앙일보만 검색이 되고 6월25일 고별식에 대한 한국일보 기사도 검색이 안될 정도로 우리들에게는 잊혀져 있다. 일본측도 마찬가지이다. 정보옥 님이 근무했던 그 섬의 사무소 구내에 높이 2미터의 비가 사망 1년 후에 세워져 있고 제삿날에는 주민들이 참배를 한다고 하는데 그 섬 외에서는 더 이상 정보옥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평론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미우라 코타로( 三浦 小太郎)씨는 지난해 4월에 야마토 프레스라는 매체를 통해 이 사건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시위 등에 정치적인 연대를 하는 운동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몸을 바쳐 오키나와를 위해 일한 진정한 의미의 봉사자로서, 한국과 오키나와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강렬한 사례이므로 더 많은 일본인들이 이를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었다. 미우라 씨는 1974년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이후 한일 관계가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정보옥 씨가 오키나와에 가겠다는 자원을 한 것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여러 많은 은원관계를 뛰어넘어 두 나라 사람들이 하나가 되자는 기독교인의 휴머니즘, 그리고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이런 여성을 오키나와와 일본에서 더 많이 추도하여 두 나라 국민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고인의 비극적인 죽음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사실 정보옥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더 빨리 잊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언론계에 종사한 필자도 몰랐던 사안이니 말이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올해 초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거기 서재에 꽂혀 있는 『남쪽 섬의 마리아(南の島のマリア)』라는 작은 책을 하나 발견해, 이 책이 일본에서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오다라는 여성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책장을 넘기다가, 정보옥이란 이름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카미사카 후유코(上坂冬子)라는 일본의 여성르포작가가 썼는데 이 여성은 우리에게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청년들과 사랑을 맺고 결혼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던 일본인 여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알려준 『경주 나사레원(慶州ナザレ園)』이란 책으로 유명하다. 이 책이 나온 뒤에 경주 나사레원의 문제는 일본의 NHK가 다큐멘터리로 제작 보도하곤 해서 한일 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나사레원에 대한 지원도 많아졌다. 카미사키 씨는 나중에 다시 나사레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사레원을 운영해 온 김용성 이사장으로부터 이러한 충격적인(?) 뉴스를 뒤늦게 듣고 추적을 해서 1994년에 일본의 문예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펴냄으로서 이러한 사건이 일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이 친구의 서재에 꽂혀있다가 이번에 필자에게 발견된 것은 아마도 올해가 일본에 가서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다 숨진 청년 이수현씨의 20주기로서 지난 달 일본에서 대대적인 추모행사가 열린 것에 맞추어진, 운명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지하에 계신 정보옥 씨가 굳이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수현 씨를 비롯해 정보옥 씨등 일본을 위해 자신의 목솜을 바친 분들이 기억되면 한일 두 나라 국민들 사이에 더 깊은 이해와 애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와서 친구가 된 일본인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도 일본인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상호이해에 도움이 되라고 누군가가 이 책을 나에게 알려준 것 같다.

정보옥, 이 분을 우리가 일본인들과 함께 기억하고 기려서 두 나라의 보다 좋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다리가 되라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