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삶, 비극, 고기 그리고 영화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삶, 비극, 고기 그리고 영화
  • 윤영채
  • 승인 2021.03.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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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우리 집엔 격주로 생고기가 배달된다. 지금 당장 냉장고를 열어보면, 포장된 갈빗살과 국거리용 소고기가 쌓여있다. 엄마는 어린 시절, 고기를 부위별로 나눠 먹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엔 고기가 귀해서 부위를 나누지 않고 국에 넣어 끓이는 것이 전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갈매기살, 안심, 등심, 갈빗살, 치마살 등 각종 부위가 집 앞 마트에만 가도 널려있다. 당신은 이것을 진정 풍요라 생각하는가. 입의 즐거움 뒤에 가려진 쓰라림의 여정을 제대로 보려 한 적 있는가.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속에 숨겨진 소와 돼지라는 가축, 포유류의 생애를 살아보길 바란다. 지금 당신을 그들의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한날한시에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내가 인간인 줄 알았다. 동물과 나의 태생이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생후 3개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나에겐 옷을 입혀주지 않았다. 분명 저 동물은 옷을 입고 있는데. 내겐 추운 날씨를 견딜 헝겊이나 천 쪼가리 따위도 주어지지 않았고, 따뜻한 젖을 물려주었던 어미는 지난날 갑자기 사라졌다.

저 존재는 인간이라고 불리나보다. 인간은 나를 본다. 그 눈빛이 싫다. 조금은 두렵게 또 약간은 안쓰럽게 그리고 아주 조금 기쁘게 바라보는 눈길이 무섭다. 그들은 매일 나를 보러 온다. 그리고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모양이다.

형제들이 트럭에 올라타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사라진 식구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나는 저 인간과는 달리 학교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크고 나면 정해진 짝과 교미를 통해 무엇을 낳아야겠지. 그리고 그것이 땅에 네 발로 설 때 즈음일까, 아마 나도 트럭에 오를 것이다. 그 이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거겠지. 들판으로 가서 어미와 형제들이랑 뛰어노는 거면 좋겠다. 그리운 엄마의 젖을 물어봤으면 좋겠다. 나를 핥아주던 그 따뜻한 정을 다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도 해보고 도란도란한 가정을 꾸려 함께 그 초원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면 좋겠다. 나도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다. 이곳은 너무 춥다. 좁다. 배고프다. 극심한 좌절 그리고 지독한 절망이 나를 으깨는 것만 같다. 나는 누구일까. 왜 태어났을까.

인간은 존재함과 동시에 사냥과 채집을 했다. 필요한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사냥은 반드시 필요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을 보라. ‘산업의 수단으로, 같은 포유류를 한 곳에 집어넣고 좁은 공간에서 살 권리를 박탈시키고, 원치 않는 교미와 임신 그리고 출산을 대여섯 차례 반복하고 나면, 이 생명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를 잃는다. 정확히 말하면 잃는 것이 아니다. 먹히기 위한 마지막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쓸쓸히 도살장으로 떠날 테니 말이다. 매주 배달되는 고기는, 어쩌면 나와 한날한시에 태어났을지 모르는 존재의 절망과 좌절을 머금은 사체다.

먹고 먹히는 생태계 사슬에서 동물은 언제나 불안하다. 비단, 가축과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도 강자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악을 쓰고 산다. 발전하지 않으면 금세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이 우주 속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이다. 행복한 일도, 소중한 경험도 결국 비극 속에 피어난 파란 장미일 뿐.

영화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가상이다. 질투, 증오, 사랑, 욕망, 좌절 등 스쳐 지나가는 희망이 이 가상을 지배한다. 인물은 저마다의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뤄가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 ‘고기가 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주인공은 이야기 끝에서 변화한다.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끝까지 발버둥 치다가 씁쓸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 결말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변화한다. 그래서 영화가 좋다.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결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현실도 영화 속 가상처럼 능동적으로 바뀌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영화는 내게 더 매력적인 가치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가축으로서의 소가 아닌, 자유를 얻기 위해 세렝게티 초원에서 하이에나와 늘 생존의 밀당을 할 수밖에 없는 들소가 된다.

삶은 반듯한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각자의 선은 그 생김새가 다를 것이다. 누군가의 선은 구부정하다가 구불거리기도 할 것이고, 또 다른 이의 삶은 두껍고 짧은 직선일 수도 있다. 언제 끝나는지, 어떤 결말이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의 일생. 영화는 인간의 타고난 불안감 앞에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주기도 하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도 한다. 긴 필름이 각막 앞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적어도 우리의 비극은 같은 생김새의 포물선을 그린다. 모두가 하나의 비극이 되어 스크린 속의 타인이 되어보는 경험은 영화가 아니고서는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그래서 영화란 참 어렵고도 매력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도 영화 앞에 앉는다.

글을 쓰면서 잠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방금도 소고기 장조림을 먹고 온 내게 아직 그럴 용기는 없다. 다음 주면 새로운 고기가 집에 온다. 그것이 죽기 전에 돼지였는지 소였는지는 뒤에 적힌 상품명 따위를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 인간이든 가축이든 그 삶이 참 고되다는 생각이 든다. 고되고 부질없는 생을 사는 돼지, , 나 그리고 당신은 비극 속에 피어난 존재들이다. 주어진 운명을 함께 받아들이자. 그리고 영화를 보자. 대단히 복잡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을 보라. 그의 비극을 느껴보는 것이다. 고기를 먹게 되면 잠시 멈춰 생각해 보자 삶의 의미를……. 고기의 의미를……. 그렇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그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이 비참함을 견디고 씹어보면서 내일을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