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대구미술관, 과거 ㆍ현재 그리고 미래 (1)
[특별기획]대구미술관, 과거 ㆍ현재 그리고 미래 (1)
  • 이은영 기자ㆍ 안소현 비평가
  • 승인 2021.04.1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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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개관10주년 기념전, ‘대구근대미술전-때와 땅', ‘다티스트1-정은주, 차규선’, ‘첫번째 10년’
지역 미술관 역할, 숙고 반영한 근대에서 현재까지 세대 이은 작가 조명
독립운동가이자 뛰어난 예술가 이여성 산수, 이상정 전각까지
서병오의 '근대미술 아카데미, 교남시서화회', 김진만, 서동균 등 배출
대구가 나은 걸출한 화가 이쾌대, 이인성 작품세계 재조명
대구의 근대미술을 조명하는 '때와 땅' 전시장 입구.(사진=대구미술관)

지역 미술관은 지역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한편 외부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는 상반된 두 가지 과제를 갖는다. 대구는 다루기 쉬운 곳은 아니다. 지리적으로는 고립돼 있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보여 지역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폐쇄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대구미술관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지역 미술관이 나아갈 길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대구의 어제와 오늘을 가로지르는 세 전시 ‘대구근대미술전-때와 땅'(2월 9일-5월 30일), ‘다티스트1-정은주, 차규선’(2월 2일-5월 23일), ‘첫번째 10년’(2월 23일-6월 27일)은 대구만의 정체성을 구축하면서도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가려는 포부를 보여준다. 기자는 지난 7일 대구미술관을 찾았다. 도시 외곽에 있는 미술관은 입소문이 난 듯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적정 예약 정원은 매회 가득 찬다고 한다. 취재를 위해 찾은 날에도 적지 않은 관객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대구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와 땅'전시장 전경,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인 김진만, 이상정, 이여성의 작품 등을 찾아볼 수 있다.(사진=대구미술관) 

근대미술의 첨병 대구, 그 곳에서 꿈꾼 그들의 이상과 시대정신 담아

대구는 서울, 평양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 대구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술관 1층 어미홀에서 진행되고 있는 ‘때와 땅’전은 1920-1950년대 사이 대구 미술사를 탐구함으로써 흐려진 기억을 복원하고자 한다. “질곡의 역사와 함께 시대를 일구었던 대구 미술인의 행적과 지난한 극복, 그리고 그들이 꿈꾼 예술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담고자”하는 전시는 다섯 파트로 구성됐다: 1) 예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2) 대구 근대의 색 3) 이인성과 이쾌대 4) 미술 전문(專門)에 들다 5) 피난지 대구의 예술. 작품 총 14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이 전시된 대규모 프로젝트다.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들 함께 전통화단 이어, 초기 근대화단 이끌어

서동균, 이인성 합작, 1933, 대구미술관 제공
서동균 이인성 협업으로 그려진 수묵과 수채화의 합작, 1933.(사진= 대구미술관)

첫번째 파트에서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초기 대구 화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 교남시서화회에서 나온 작품들로 대구 전통 서화의 변모 과정을 짚어볼 수 있다.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서병오는 1922년 교남시서화회를 설립해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서화가들을 불러모아 모임을 조직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조선전람회가 만들어진 1922년을 기점으로 국내 미술 환경이 바뀐 것이 변화의 계기일 수 있다.

교남시서화회에서는 김진만, 서동균 등이 배출됐다. 서병오의 조카사위 김진만은 서병오와 중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공부하고 한국화에 적용하는 조형적 실험을 같이했다. 서병오의 공식 후계자인 서동균은 영남서화원을 열어 새로운 작가들을 배출해 지금까지 건재한 대구 전통 화단에 기여했다. 전시는 당시 대구 전통화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관객은 그 시절 유행했던 채색 기명절지화가 서병오의 자유분방한 화풍을 거쳐 김진만의 보다 정제된 화풍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허섭 등이 그린 이 지역 묵산수화도 눈길을 끈다. 전시를 기획한 박민영 수집연구팀장은 “전남 광주 지역 산수화는 묘사적이고 아기자기하며 부드러운 느낌이 있다면 대구는 같은 산수화라도 무뚝뚝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수묵과 수채의 얽힘, 서동균ㆍ이인성의 시대를 앞선 동서양 콜라보 

대구에서 서화와 수채화는 함께 성장했다. 기획자는 “물을 사용하는 기법상의 유사성으로 수채화와 수묵화가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지 않았나 추정해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려고 전시장 벽 하나를 할애해 수채화와 수묵화의 얽힘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서동균이 후대 서양화가인 이인성과 협업해 그린 ‘죽농 서동균, 이인성 합작’(1933)의 경우 서동균은 묵으로 윗부분의 석류를, 이인성은 수채화로 아랫부분의 국화를 그려 동서양의 콜라보를 선보여 흥미롭다.

서병오가 전통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면 이상정과 이여성은 서양화를 받아들여 초기 대구 화단의 기반을 닦았다. 교남시서화회가 1923년에 개최한 대구미술전람회에 이상정, 이여성, 박명조 등의 양화가 전시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전시에 이들의 서양화 작품이 포함되지는 못했다. 대신 이들의 다양한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작은 아카이브가 마련돼 있다.

근대 화단 기반 닦은 이상화의 형,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이쾌대의 형, 월북작가 이여성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1923년 미술연구소 벽동사를 설립해 폭 넓은 미술품을 취급하며 전시 및 교육을 했다. 전시장에서는 이때 작성한 ‘벽동사 취지문’의 빼어난 문장과 함께 1925년 이후 중국 망명기에 저술한 기행문 ‘표박기’의 편집본 ‘중국유기’, 그리고 이번에 발굴된 인보집 ‘청람인보(청금산방금석고)’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청람인보’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한자를 변형 시켜 조형미를 보여줬다. 1920년대부터 전각 작업을 시작했고 중국에 체류하며 금석문 등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이상정의 청람인보. 책 속에는 이상정이 자신의 이름을 다양한 서법으로 새긴 전각 작품이 있다. 독특한 형태의 조형이 돋보인다. (사진=대구미술관)

이여성은 이쾌대의 형으로 기자이자 학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투쟁을 하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 시기에 통계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는 ‘숫자조선연구’를 발간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는 한편 ‘조선복식고’를 발표해 복식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이여성은 전통 문인화를 기반으로 서양 화법을 실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격구도’(1930)는 전통 역사화이지만 원근법과 입체적 묘사 등 서양 기법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또한 당대 복식을 상세하게 묘사해 작가의 전통 복식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여성, 화첩, 연도미상, 대구미술관 제공
이여성, 화첩, 연도미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대구미술관)

대구 서양화단과 향토색 논쟁

두번째 파트에서는 대구에서 서양화가 수용되었던 양상을 그린다. 이상정의 제자였던 서동진은 수채화가로 활동하면서 1927년 대구미술사를 설립하고 이인성과 김용조 등의 후학을 양성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박명조, 이인성 등과 함께 대구 서양화 수용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향토회를 조직한다. 기획자는 향토회 설립 동기에 대해 “향토색 논쟁과 관련해 향토의 정조와 미감을 반영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전시를 통해 서동진의 수채화와 향토회원들의 작품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대구 수채화의 발아 과정과 양화 발전과정을 톺아볼 수 있다.

향토색 논쟁은 조선인을 타자화하려는 일제와 이를 거부하려는 조선인의 열망이 충돌하며 발전했다. 조선총독부가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는 참여자들에게 작품에서 조선만의 지방색을 드러내라고 지속해서 요구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방색 육성 정책과 맞물린 이러한 요구는 결국 일본인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소재주의로 흐르며 식민지적 타자화를 부추겼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윤희순, 김용준, 김복진 등을 중심으로 향토색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병적 향토성’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이견을 보이지만 향토색은 소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며, 영원불변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향토색 논쟁은 이렇게 조선적 주체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했다

이인성과 이쾌대, 조선적 주체 구축하기

세번째 파트에서는 조선적 주체화 열망이 구현되는 대조적인 방식을 이인성과 이쾌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획자는 이 둘에 특별히 주목한 이유가 “대조적이면서도 공통점이 많은 인생을 산 두 대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 대구미술관 제공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사진= 대구미술관)

‘한국의 고갱’이라 평가되는 이인성은 후기인상주의 화풍으로 향토색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간다. ‘경주의 산곡에서’(1935)는 섬세한 명암 처리 없이 푸른색과 붉은색을 각각 화면 상단부와 하단부에 넓고 평평하게 발라 고갱의 화풍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붉은 땅을 통해 고향 땅에 대한 사랑과 생명력을 표현하려 했다. 눈이 선명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하는 인물들은 불안과 우울의 정서를 전달하기도 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비애감은 식민지 시기의 아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 속 풍경은 소위 서구 ‘원시주의’의 맥락에서 통용되는 원주민 이미지를 상기시키기에 조선을 타자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기획자는 “그 시절 유입된 모든 양식이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 자신도 갈등하는 상황에 있지 않았을까”라며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내비쳤다.

이쾌대, 군상 I (해방고지), 1948, 대구미술관 제공
이쾌대, 군상 I (해방고지), 1948.(사진= 대구미술관)

반면 이쾌대는 ‘군상I (해방고지)’(1948)을 통해 낭만주의 화풍으로 사회주의적 미래를 향한 희망을 그렸다. 근육질 신체 묘사와 역동적인 구도는 들라크루아와 제리코의 영향을 짐작게 한다. 또 이쾌대의 인물들은 눈빛이 강력하며 다른 작업에서는 정면을 응시하는 경우도 많다. 작가는 이를 통해 조선에 능동적이고도 활기찬 이미지를 부여하는 한편 희망찬 미래를 화폭에 담아냈다. 이쾌대는 전형적인 향토색 작가로 분류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양화가임에도 일부 작품에서 인물을 동양화처럼 평면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형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통 복식을 섬세하게 또 자주 그림으로써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그림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영향받은 화풍 비교 배치, 재치 돋보여

네번째 파트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영향 관계를 다룬다. 기획자는 “한국에서 서양미술은 주로 일본을 통해 유입되었으나 그간 두 국가 간의 교류를 밝히는 일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이 섹션을 구성한 동기를 드러냈다. 사제 관계를 이루는 작가군을 한데 모아 전시하여 관객이 영향 관계를 유추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유메하라 류자부로와 서병기를 배치한 방식이 재치 있다. 서병기는 일본 유학 당시 재야 화가였다가 1930년대부터 주류가 된 우메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시에서는 우메하라의 ‘무당춤을 추는 최승희’(1941)와 서병기의 ‘기모노를 입은 여인’(1935)을 나란히 배치해 한국 문화를 그린 스승과 일본 문화를 그린 제자를 비교했다.

우메하라의 ‘무당춤을 추는 최승희’(1941)와 서병기의 ‘기모노를 입은 여인’(1935)을 나란히 배치해 한국 문화를 그린 스승과 일본 문화를 그린 제자를 비교해 눈길을 끈다.

해방 이후 대구 미술, 정점식과 장석수의 대조되는 화풍, 보는 재미 더해

마지막 파트에서는 해방 이후의 세대교체 시기를 다룬다. 자연주의 화풍이 대세였던 대구 화단은 한국전쟁 중 피난 온 다른 지역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자극을 받게 된다. 이 방에서는 대구 추상 1세대인 주경, 1955년 대구미술가협회를 발족하여 전후 세대교체의 주역이 된 정점식,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석수 등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 변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전시는 특별히 대구 추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정점식과 장석수를 연달아 배치해 둘의 화풍을 대조시키기도 했다. 정점식은 서예 필획에 기반해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나아가지만 장석수의 작업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그리는 행위와 과정을 그림에 반영한다.

(2)편에 계속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