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프란츠 리스트와 최초의 리사이틀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프란츠 리스트와 최초의 리사이틀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04.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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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오늘날 ‘리사이틀’이라 부르는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연 사람이다. 그때까지 음악회는 여러 음악가가 함께 출연하여, 청중의 요구를 두루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곡들로 꾸미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1840년 6월 9일,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리스트는 혼자 무대에 올랐다. 그는 후원자의 도움 없이 연주 생활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역사상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리사이틀’(Recital)이란 말도 충격이었다. ‘리사이틀’이란 말은 성서 구절을 낭송한다는 뜻인데, 피아노 연주회가 ‘리사이틀’이라니 신성모독 아닌가?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의 자기 고백이라도 된단 말인가? 리스트는 대중들을 향해 말했다. “연주회,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회장을 연주한다.” 피아노를 옆으로 놓아 청중들이 피아니스트의 옆모습을 보도록 한 것도, 피아노 뚜껑에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해 가도록 한 것도, 피아니스트가 무대 측면에서 등장하도록 연출한 것도 리스트가 처음이었다. 그의 ‘리사이틀’에는 3,0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고, 이런 ‘리사이틀’은 1,000번 넘게 열렸다. 리스트에 대한 팬들의 열광을 시인 하이네는 ‘리스트 열병’(Lisztomania)이라 불렀다.

그의 화려한 연주는 청중들을 압도했다. 여성들이 그의 연주에 까무러치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가 녹색 장갑을 낀 채 무대에 서면 여성들이 몰려와서 옷과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고, 그가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나 끊어진 피아노줄을 집어가려고 다퉜고, 그가 마시다 남은 홍차를 향수병에 담아 가려고 줄을 섰다. 그는 매니저를 데리고 다닌 최초의 연주자였다. 여섯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스페인에서 러시아까지 전 유럽을 누빈 그는 오늘날의 락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던 훔멜에게 배우려 했지만 수업료가 너무 비쌌다.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무보수로 지도해 준 사람은 살리에리와 체르니였다. 1819년, 8살 난 리스트를 처음 본 체르니의 회상. “병약해 보이는 그 아이는 피아노 앞에서 술 취한 듯 흐느적거렸기 때문에 바닥에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의 연주는 불규칙하고, 단정치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건반 여기저기를 손가락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자연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내가 준 악보가 무엇이든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는 이미 자연이 내려준 피아니스트였다.” 

1823년, 12살의 리스트는 빈의 레두텐잘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베토벤도 와 있었다. 베토벤은 ‘신동’을 찬양하는 세상 사람들의 수다를 싫어했지만, 며칠 전 비서 안톤 신틀러의 소개로 만난 이 소년에게 매료된 듯 하다. 이날 연주회가 끝난 뒤 베토벤은 무대에 올라가서 리스트를 안아 올린 뒤 볼에 뽀뽀를 해 주었고, 리스트는 이 사실을 평생 자랑스럽게 회상하며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리스트의 삶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 준 사람은 파가니니였다. 20살 무렵 리스트는 연주자 생활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 때 그에게 용기를 준 게 바로 파가니니였다. 리스트는 1832년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뒤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됐다. 

그의 연주 인생은 1838년 헝가리 페스트의 대홍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자선연주회를 열면서 본 궤도에 올랐다. 그는 빈에서 자신이 피아노로 편곡한 베토벤 <전원> 교향곡을 연주했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와 <디아벨리> 변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원래 여섯 차례 계획했던 연주회는 청중들의 요청으로 네 번이나 더 연장해야 했다. 그는 피아노에 머물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24,000 플로린은 개인이 낸 수재민 구호성금 중 가장 큰 액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리스트는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이 됐다.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에 있던 1843년의 리스트. 그를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에 있던 1843년의 리스트. 그를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다. 

그의 작품 중 12곡의 <초절기교 연습곡>, 6곡의 <파가니니 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B단조, 피아노 협주곡 Eb장조와 A장조 등은 섬뜩할 정도의 난곡이지만 <헝가리 광시곡> 2번은 친숙한 명곡이다. 그는 헝가리 민속음악과 집시음악, 특히 ‘차르다쉬’라는 춤곡을 바탕으로 19곡의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을 썼다. 랩소디는 전통적인 형식보다 자유분방한 흐름에 감정을 맡기는 악곡으로, 장중하고 화려한 2번 C#단조는 가장 널리 사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