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에 살고, 신명에 죽고’
‘신명에 살고, 신명에 죽고’
  •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09.12.2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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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김덕수… “전통예술은 보존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존재한다”

▲ 김덕수 [金德洙, 1952~]. 한국 전통 음악 연주가이자, 현 난장컬쳐스 대표.

11월 27일, 이어령 선생 ‘만남 50년’ 자리에서 요샛말로 레전드 아니, 전설을 만났다. 1978년 사물놀이의 등장만큼 문화적 충격이자 센세이션한 일은 없었다. 그것은 우리 핏줄에 흐르는 전통음악의 유구한 리듬감각을 일깨워 놓음과 동시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우리 음악의 세계진출과 세계음악과의 수평적 교류를 획기적으로 열어놓았다. 그 중심에 바로 ‘대단한 인물’ 김덕수가 있었다.

사물놀이의 거장이자, 한 해에 국내외를 통틀어 무려 150회 이상의 공연을 하는 저력, 그리고 국악에 대한 절대적인 열정. 무엇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는 김덕수는 진정 ‘대단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김덕수를 찾은 날, 그는 젊음들에게 이 시대의 정신을 읽으라 말하고 있었다. 전통예술이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전통예술이 아니듯이, 시대정신을 만든 선구자이기에 보낼 수 있는 세월의 충고, 그 시작을 ‘신명’ 김덕수와 함께했다.

호랑이 선생님이다.
내가 '예인'의 길에 발을 딛었을 때만 해도 전통예술계는 각별한 사제지간의 규율과 배움에 대한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전통예술계가 많이 위축됐다. 전통예술의 본질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는 역할이 내게 남겨진 소임이다. 전통예술은 바로 ‘정신’을 배우는 거다. 내가 배운 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선 호랑이 선생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예술계가 열악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예인의 기준이 없어졌고 문화 차별이 심하다. 같은 공연을 해도 서양 지휘자와 10배 이상의 개런티 차이가 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흙냄새 나는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이 대우를 못 받는다. 더불어 우리 사회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물론 전통예술계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전통예술은 절대 그렇지 않다. 차등 있는 대우가 빚어낸 경제적 어려움, 전통예술의 고질적인 특성이 복합적으로 전통예술계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문화차별이란 말을 했는데, 그 시작은 어디라고 보는가.
한때 피아노가 집집마다 있던 시절이 있었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극치를 맛본 한국 사회가 경제적 구호를 우선시하면서 전통문화, 생활문화의 존재 근본을 뒤집어 놨다. 그 속에서 ‘예인’은 상놈 중의 상놈이라는 꼬리표를 달게됐고, 그 의식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설 자리는 언제나 위협받았고 차별받아왔다.
다시 말해, 전통예술 공연장이 있는가? 없다. 남산골의 국악당만 보아도 명칭만 국악당이지 우리의 마당놀이, 전통 연희를 할 수 있는 전통예술 공연장은 아니다. 서울예술마당? 보면 알지 않은가. 전통예술 공연장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켜켜이 쌓인 문화의 차별,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기악이 크게 발전했는데 대학 교육이 기악 중심이기 때문이다. 원래 국악은 가무악 일체다. 헌데 교육 현실은 서양의 음계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식이다. 이렇게 서양음악개론에 맞춰지다 보니 우리 것의 진정한 색깔을 버리고 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즉, 영양실조적인 국악교육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또 국악을 접하는 루트가 사실상 편협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그러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얼마 전 안숙선 선생님도 같은 말을 하셨다. "채널이 돌아가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헌데 국악은 왠지 노력해야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이질감을 느끼는 거다. 국악이란 핏속에 있는 유전자와 같은 것인데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너무 먼 존재인 거다. 과거에는 배우지 않아도 장구 한 자락, 민요 한 자락, 어깨춤 추는 거, 못하는 이가 없었다. 왜? 뱃속에서부터 듣기 싫어도 들었으니까. 그런데 근대화의 물결 속에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것들이 사라졌다.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이 아니면 공연도 아니라 하고, 전통예술은 자연스레 나라에서 보존하는 것으로 의식이 바뀌었다.

▲ 1978년 사물놀이 초연 모습, (왼쪽부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故김용배

말씀하신 대로 '전통예술은 보존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전통문화는 보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형식적인 방법론일 뿐, 어찌 사람이 하는 것이 보존이 되는가. 인도, 터키만 보아도 오래 전부터 전통음악을 자기 삶 속에 이어나갔기에 세계인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정점을 찍었다. 우리 가락은 바로 우리 존재다. 가장 우리적인 기운과 본질을 지키면서 시대와 함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전통 아니겠는가. 헌데 보존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째로 없앤다는 얘기다. 전통예술은 우리네와 함께 살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 때문인지, 이력을 보면 도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세계인들이 국악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이단적인 것을 추구해왔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파격적인 것이 생각만 해서 나오는가? 아니다. 자기 안에 베이스를 축적해놓고 세계 속에서 당당해질 내공을 키워야 한다. 국가도 대한민국의 진정한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강점을 찾아내 연구해야 한다. 그게 우리 세대의 과제이다.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게 되면 문화예술인들이 대우받고, 사회적 직업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 거라 생각한다.

‘김덕수 = 사물놀이의 역사’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후배들에게 남겨진 몫은 무엇일까?
남들은 소설을 보고 남사당이 무엇인가 배우지만 나는 소위 말하는 깬 놈들, 대한민국 최고의 예인들 속에서 자랐다. 그렇게 대학로에 사다리극단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 누가 남사당 출신, 장구 치는 꼬맹이가 음반을 제작할 거라 예상했겠는가. 그것이 바로 시대정신이다. '예인'이라면 이 시대의 좌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예인'으로서의 삶은 끝이다. 항상 학생들에게 ‘예인’이 되고 싶으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시대정신을 읽으라고 말한다. 지구상 유일하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인이다. 우리들만이 가지고 있는 철학, 우주관, 한국의 아름다운 맛과 멋을 지녀,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길 바란다.

사실 김덕수는 동안이다. 신명 나는 흥과 함께 살아서 그런지 피부도 탱탱하다. 인터뷰 내내 튀어나오는 위트도 상당해, 김덕수에게만큼은 세월이 빗겨간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1957년, 그의 나이 다섯 살에 남사당에 입문했단다. 그 말은 무려 반세기를, 인생의 90퍼센트를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는 거다.

하지만 김덕수가 빛나는 이유는 단지 '세월' 덕분이 아니다. '김덕수'라는 이름 석 자가 바로 '사물놀이'가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던 시기를 상징하며, 존재 자체가 바로 한국이자, 한류이기 때문이다.

'신명'이라는 수식어조차 가볍게 만드는 중량감을 지닌 김덕수, 그의 꿈은 무엇일까.

김덕수는 5살에 남사당에 입문, 반세기를 '예인'으로 살아왔다.

5살에 남사당에 입문해 ‘사물놀이’의 반경 안에서 사셨다. '김덕수'는 누구인가.
항상 직업란에 '사물놀이'라고 적는다. 내 존재가 ‘사물놀이’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직업란에 '사물놀이'라고 적는다. 내 존재가 ‘사물놀이’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1957년 첫 공연이 기억나는지.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난장'은 당시 최고이자, 유일한 이벤트였다. 이때 남사당패 꼬맹이가 무동 서는 것을 '새미'라고 하는데, 다섯 살 때부터 이 새미놀이를 하며 길 위에서 살았다. 어머니 말로는 3, 4살 때부터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다고 하는데, 사내로 태어나면 '예인'으로 키우리라 마음먹으셨던 것 같다. 다행히 싹수가 보였던 모양이다. (웃음) 사미승복을 입고 어른들의 어깨를 올라타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다른 꿈을 갖기도 전에 이미 광대라는 삶이 주어졌다.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나.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웃음) 게다가 축제의 장소에, 항상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니, 어린 나이에도 최고의 삶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서울대 국악과에 지망한 적도 있다. 그런데 국악과에서 서양음악 시창 청음을 피아노로 시험 본다고 해, 도자기학과로 진학했다. 외국 공연이 많아 2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졸업했다면 아마 도자기를 만들고 있지 않았을까. (웃음)

전통예술계에 김덕수의 동반자는 누가 있나?
최근 어르신들과의 교류가 많아졌다. 이어령 선생님, 김벌레 선생님 등 다른 분야지만 최소한 30년 이상 함께해왔던 분들과 만나고 있다. 1959년 대통령상을 타던 해,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만난 안숙선과는 일생을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박귀순 선생님과는 초6 때 알게 돼 지금까지 모시고 있고 조용필과는 30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위대한 탄생' 시절 세션한 것을 인연으로 오랜 시간 함께해오고 있다. 서로 우스갯소리로, "목소리가 나이를 못 속이는구나"하고 얘기하기도 한다.

관객은 무대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에 가슴이 저리다. 무대에서 무엇을 느끼나.
난 그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산다. 그리고 그 순간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 꿈이다. 연주자는 그 맛을 알기 위해서 도전하는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로 그 순간 신이 된다. 나는 그 자신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만약 후일 자신의 묘비명에 뭐라 써지길 바라나.
‘신명’. 어떤 어른이 지어주신 아호다. 결국 울림에 대한 이야기로, 평생 두드리며 살았기 때문에 감사한 말이다. 이왕 '조선인의 신명'이 되면 좋겠지만, 묘비에 새겨만 진다면 얼마나 태어난 보람이 있을까 싶다.

아직도 꿈꾸는 것이 있나.
지난 30년간 해외 유수대학을 다니며 우리 악기로 신명나게 노는 법을 가르쳐왔다. 그 속에서 필요에 의해 모든 것이 개발되고 창조되더라. 쉽게 말해, 높은 항공료와 수송료 때문에 장구는 3등분해서 보내게 됐고 재래식 가죽을 못 다루는 서양인을 위해 피혁 소재 개발이 이뤄졌다.
최종 목표는 세계의 음악교실에서 우리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거다. 어느 날 우리 음악교실에 외국의 타악기가 들어왔듯이 꽹과리, 징, 장구 등 우리 악기가 세계 음악교실에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 어떤 음악이건 '리듬'이 최우선이고, '리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국악의 근본 본질이 바로 '리듬'이다. 덩덕쿵, 휘몰이 장단이 세계화되어 재즈, 락앤롤이 덧입혀지면 그 얼마나 풍요로운 곡들이 나오겠는가. 그것이 한류고,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드럼 교축본 작업을 시작했는데 코리안 재즈, 코리안 락앤롤이 탄생하는 그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다.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young@sctoday.co.kr
정리/사진 정혜림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