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여행기} 내 고장 문화유산을 빛내는 사람들(1)
{독자여행기} 내 고장 문화유산을 빛내는 사람들(1)
  • 사)서울문화사학회 교육원장 고완기
  • 승인 2009.12.2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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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울문화사학회 교육원장 고완기

지난 주말 교원연합회원들과 함께 서울근교인 양주지방을 답사하였다.

양주는 고려시대에 그 관할지역이 오늘날 서울특별시와 의정부시 그리고 남양주시일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領域)이었으나 이제는 서울의 조그마한 변두리 농촌도시로 그 이름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날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장흥계곡에 도착하자 양주시의 여성안내자가 차에 올라서 나누어주는 홍보가이드북을 자세히 살펴보니 드라마 ‘대장금’을 표제로 하여 서울근교도시의 특성을 살려 정성껏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도 한동안 오지 않아서 그런지 장흥계곡은 옛날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시에는 권율 장군 묘역도 초라하게 보였고, 계곡에는 무질서한 점포와 가건물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말끔히 정리되어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건물도 지어져 있었다.

생활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가나 미술관, 대장금 촬영장을 연계한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주말에 서울시민이 많이 찾아오도록 ‘테마가 있는 전원도시’로 가꾸어져 환경이 몰라보게 변했다.

우리 일행은 이 고장 별미라는 ‘부추면’으로 점심을 한 후,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逸話)가 전래되는 ‘회암사(檜巖寺)’로 갔다. 이제는 발굴 작업이 끝나 지표에 들어난 옛 회암사는 발굴현장으로 보아서 사찰의 규모가 엄청 컸었음이 실감케 했다.

안내자에 의하면 원래의 사찰건물에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한동안 국정을 보았기 때문에 전각(殿閣)이 늘어나면서 계단구조도 왕이 다니는 중간부분을 돌출시킨 전형적인 삼도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회암사에 남아있는 무학대사의 비문을 보면 나옹(懶翁)은 병진(丙辰: 1376)년 여름에 회암사에서 낙성회를 베풀며 무학에게 회암사를 맡아달라고 권유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자신의 첫 생일날 무학을 왕사로 모셨고, 태조2년(1393) 무학을 회암사주지로 임명했다. 태조는 그 후 무학이 있는 회암사를 수시로 찾았으며 뒷날 왕자의 난 이후로는 회암사는 단순한 사찰로서가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인 운둔지가 되였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개국에 도움을 주웠던 무학대사로 인하여 웅장하게 치장했던 회암사가 언제 어떻게 역사의 그늘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정확한 기록도 없이 의문으로 남아 수년 동안 복원도 못한 채 저처럼 역사의 흔적만을 남겨놓고 있을까…?

 만약 일시적인 화재로 인한 훼손이었다면 다른 사찰처럼 복원해서 관광문화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련만 이제는 일부 사극에서만이 그 위용을 알릴 뿐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행한 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의문을 제기하자  안내자는 우리에게 그 내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조선의 개국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신흥 유학에 밀려 불교를 탄압하는 제반 정책이 계속되자 이 절과 관련이 많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도 회암사를 떠났다.  그런데 세종(충령)의 형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깊던 효령대군이 불교를 좋아해서 자주 회암사를 찾아와서 승도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다.

더욱 효령대군은 세조가 매우 아껴서 궁중에 들어갔다가 밤에 나올 때는 세조자신이 친히 촛불을 들고 전송하였을 정도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왕위즉위의 정당성을 불교에서 찾으려했다. 

이즈음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에서 세조 10년 5월에 숙부였던 효령대군이 원각법회를 베풀던 중 부처가 나타나고 감로(甘露: 하늘에서 내리는 상서로운 이슬)가 내린 것이다. 

 세조는 이와 같은 기이한 일을 기리기 위해 승정원에 명령, 숙부 효령대군에게 공사 감독을 맡겨 대규모 사찰을 짓는데, 그게 바로 원각사(지금의 서울 탑골공원에 위치)이다. 

그 당시 장안 사람들은 이 절을 ‘큰 사찰’이라 불렀는데 절을 세우기 위해 동원된 인원이 2,100명이 넘었으며 철거한 민가가 2백 채였다고 한다. 그 때 세운 원각사 10층석탑(국보제 2호) 감실에 원각경圓覺經)을 넣었으며, 그 내력을 설명한 비문이 같은 경내에 있는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라고 전한다. 

이처럼 세조에 의해 큰 사찰을 짓고, 불교를 숭상하는 세조와 왕실의 행위로 조선의 숭유(崇儒)이념이 흔들리자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그룹이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왕실의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로 인해 한성부 중심지에 대가람(후일 大寺洞의 유래)을 짓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유생들이 불만을 품고 회암사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불살라지고 훼철(毁撤)되였는데 회암사만은 소멸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한다는 그의 해설은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