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하남과 김유정이야기Ⅳ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하남과 김유정이야기Ⅳ
  •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1.05.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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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지난 호에 이어)

산골마당과 사랑채

청풍김씨 김춘식과 청송 심 씨 사이에 태어난 자손은 2남6녀였다. 아들로는 소설가 김유정이 막내였고 위로 누나가 다섯이었다. 그중 막내 누이 김복달은 아명이 흥선이었다. 유정의 큰형 유근의 의형제였던 유원준 당숙이 사촌동생 유세준을 소개하여 결혼을 했는데 혼인날 앞마당에는 석류가 주렁주렁 보기 좋게 열렸다고 한다. 이후 유세준은 석류를 유독 많이 심어서 가을에는 빨간 석류가 탐스럽게 열렸으며 과실이 풍성했던 산곡집 마당으로 자손들이 기억을 하고 있다. 마당에는 두 그루의 큰 대추나무가 아름드리 열려 3가마니 정도를 수확했는데 김유정이 연주하는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소리를 듣고자 모인 날에는 산골집 마당에 멍석을 깔았고 그 덕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유정은 단성사에서도 연주회를 할 만큼 음악을 좋아하고 연주를 즐겼다. 그런 그가 산골에 와서 동리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재미있는 일을 벌일 수 있도록 매형 유세준도 일조를 하였고 산골은 대추를 나누고 밤을 서너 말씩 삶아서 놋대접으로 나누는 등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유족들은 기억하고 있다. 힘든 시기였던 산골이었지만 이웃과 함께 한 가을밤은 멋진 산골의 풍경이었다. 유정이 춘천을, 어려웠던 농촌으로 의식하여 그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글로 표현했다면 하남 산골은 서울아씨였던 누이와 재동보통학교 동문이었던 매형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삶이 후손들에게 정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유정이 잠깐 기거한 산골(산곡)이었지만 누이와 매형과 감성이 통하는 정만큼 하남 산골은 유정의 감성을 꽤나 자극하는 곳이었다. 천재소설가 김유정이 작고하기전 집필하고 매형이 서울 출판사로 보냈다던 그 작품들이 쓰인 곳은 지금의 하남, 모란꽃과 석류꽃이 가득했다던 사랑채였다.

서울아씨 흥선

유정의 바로 밑 누이 흥선과는 우애가 유독 좋았다. 명문가였던 친정이 몰락했지만 시집 온 경기도 광주 산골에서는 ‘서울아씨’로 불렸다. 흥선은 문맹퇴치를 위해 시골 아낙네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시골생활이 위생적으로 낙후된 것을 한탄하며 의료와 위생에도 큰 힘을 쏟고자 교육을 하였다고 전한다. 유정이 춘천에서 금병의숙을 열어 농촌 계몽운동을 했듯이 흥선도 문맹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장을 손수 담가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돕고자 하였다. 당시 중부면(하남시)동수막에 흥선이 해준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심이 후하였다고 한다. 이후 가세가 어려워지자 손이 커서 남 퍼주다가 망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사랑이 많은 흥선이었다. 예술적인 감각이 남다른 서울아씨 흥선은 그림과 글에 능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남겨 발표한 적은 없었다.

다만 글을 쓰는 동생 유정에게 글감을 제공하고 동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 관심을 더하니 유정이 다섯째 누이 흥선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주 산골(산곡)에 내려와 흥선과 매형을 보고 갔던 유정이 어느 날 땡볕, 밭에 참을 이고 가는 누이를 보고 마음이 아파 울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만큼 유정에게 흥선은 예술적 모티브를 충분히 전하는 핏줄이었으며 산골에서만 있을 여인이 아니었다. 흥선의 예술적 감각은 남달라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에도 그림을 그려주는 등 훗날 후손들에게도 예술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5년 8월15일 광복 해방이 되자 동네사람들을 마당에 불러 “조선 독립 만세”를 마음껏 외쳤다. 첫 번째로 한 일이 태극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일장기를 가지고와서 4괘를 그리고 태극기로 고쳤다. 흥선은 화선지와 이불호청을 꺼내들었고 벼루와 먹을 들고 온 아이들과 신이 나서 태극기를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태극기 그리는 일은 며칠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의료와 위생교육을 강조하던 흥선은 아이러니하게도 40세에 과부가 된다. 1946년 남편이 디프테리아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자 졸지에 대가족 가장이 된 것이다. 탁월한 예술 감각과 계몽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대폭 줄었지만 서울아씨 흥선은 여전히 산골에서 베풀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유족의 말을 빌어 천재 소설가 김유정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다섯째누이 흥선을 잠시 묘사해보았다.

● 소설가 김유정이 작고하기전 기거한 하남에 관한 문헌 기록은 거의 없으며 최근 ‘하남시 인물 찾기’에 김유정이 회자되고 있다. 필자는 김유정을 하남으로 데려온 누이 김복달(아명 흥선) 의 친손녀로 현존하는 유족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김유정 발자취를 본 지면에 최초로 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