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5월15일 스승의 날, 우리 문화와 음악의 사표(師表), 세종대왕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5월15일 스승의 날, 우리 문화와 음악의 사표(師表), 세종대왕
  • 주재근 한양대 겸임교수
  • 승인 2021.05.1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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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 한양대 겸임교수

우리 민족의 음악 문화와 예술을 진작시킨 세종대왕의 탄신일이 5월15일이라고 한다. 5월 15일은 정부 공식 기념일 중 스승의 날에 해당한다. 스승의 날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3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5월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65년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15일로 날짜를 변경하였으며 1982년 정부 주최로 스승의 날 기념식이 열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이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사표(師表)라고 한다. 사표의 대표적 인물을 세종대왕으로 선정한 것은 단순한 왕의 치적만을 논한 것이 아니라 비전과 리더십, 덕행 등 여러 면에서 충분하게 고려 되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건국 26년 후인 1418년에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왕조의 안정적 기반을 지속 확장하기 위해서는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 보다는 셋째인 충녕대군이 가장 적합하다고 믿었으며 그 신념은 매우 적중하였다.

중국 명(明, 1368~1644)에게 조공과 책봉 관계에 놓은 조선은 정치와 제도, 문화는 거의 중국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교 국가임을 표방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예법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제사음악 모두 중국식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또한 관원(官員)들이 아침 일찍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께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는 조회(朝會) 때의 회례(會禮) 음악 또한 중국식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600년 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정부의 공식 행사 음악은 서양 클래식 음악이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신년음악회 또한 클래식 음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화적 속국의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에 쓴웃음이 난다.

세종은 즉위 후 12년 째 되는 해인 1430년에 조선 음악의 자주적 선언을 하게 된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 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세종은 중국 사람들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기들의 음악인 아악(雅樂)을 듣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조선 사람들이 살아서는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鄕樂)을 듣다가 죽어서는 중국음악인 아악을 듣는 다는 것이 보편적 이치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에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여서~” 라고 하는 한글창제의 목적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조선의 말과 더불어 음악에도 자부심이 상당하였음을 다음의 세종실록 12년(1430년) 12월 7일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 임금이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르기를,

‘박연(朴堧)이 조회(朝會)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율려신서(律呂新書)》도 형식만 갖추어 놓은 것뿐이다. 우리 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세종은 조선식 음악 창제에 대한 단순하고 맹목적 의지가 아니라 악기와 악보, 기보법, 이론서 등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접근을 면밀하게 준비하였다.

즉, 세종 7년(1425년)에는 향악(鄕樂, 우리 고유의 음악), 당악(唐樂, 중국의 속악), 아악(雅樂, 중국의 제사와 조회음악)의 악기와 기보법 등에 관한 책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으며, 세종 12년(1430년)에는 정인지(鄭麟趾)등에게 명하여 집현전(集賢殿)에서 악서(樂書)를 편찬토록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해인 1430년 조선 최초로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였다.

세종은 한글 창제와 견줄 수 있는 대업을 재위 당시에 이루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악(新樂)의 창제였다. 신악이란 조선초의 행진음악이라 할 수 있는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을 참고하여 새롭게 만든 음악으로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발상(發祥), 봉래의(蓬萊儀)를 말한다. 이 음악에는 조선 건국의 간난(艱難)과 위대한 공적을 중국고사에 비유하여 찬양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가 세종 31년(1449년)에 악보로 기보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신악의 절주는 모두 세종 임금이 직접 제정하였는데 막대기를 짚고 땅을 치는 것으로 음절을 삼아 하루저녁에 제정하였다”라고 한다. 세종은 자신이 만든 느리고, 빠르고, 길고, 짧은 장단이 있는 조선의 음악을 기보하는데 가장 적절한 것으로 정간보(井間譜)를 고안하였다. 정간보가 더욱 대단한 것은 중국에도 없는 총보(總譜, score보)형태로 만들었는데 한 줄마다 현악기보, 관악기보, 장구보, 박보, 가사를 적어 놓아 한눈에 관현악과 성악을 모두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음악의 리듬과 음의 시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총보 형태로 만들어진 정간보는 세계 기보법 역사상 매우 창의적이며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기보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세종의 신악과 정간보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권138~146에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고자 만든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하는 음악과 세계 최고의 음악유산이라 할 수 있는 종묘제례악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을 통해 세종의 음악 정신과 유음(遺音)을 느껴 볼 수 있다.

우리 문화와 음악이 자주적이면서 창의적으로 지속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이 있었기 때문임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5월15일. 스승의 날.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며 세종대왕의 문화적,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