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대지를 향해 열린 창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대지를 향해 열린 창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05.1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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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 호에 이어서)

도예는 흙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장 원초적인 예술장르이다. 도예가는 물레 앞에 앉아 그릇의 모양을 만들며 시종일관 흙을 만진다. 이때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른바 ‘촉각성’이다.

김근태는 도자기 재료인 석분을 다룬다. 그의 작업실 바닥은 흘러서 굳은 석분 죽의 흔적들로 인해 온통 어지럽다. 단 한 번의 들어부음으로 이루어지는 김근태의 석분 죽 작업은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고행에 가까운 캔버스 밑바탕 조성작업이 필수이다. 그것은 40여 년에 달하는 그의 화업(畫業)이 이루어 낸 개가이다. 그 작업을 둘러싼 미묘한 노하우는 오직 그 만이 안다. 색과 질감, 석분 반죽의 알맞은 상태(점도), 날씨, 습도 등등 자연에 기반을 둔 최상의 작업을 위한 제조건을 둘러싼 노하우의 비밀은 선수행(禪修行)을 연상시키는 긴 고행과 수련에서 온 것이다. 그의 작업을 ‘단색화(Dansaekhwa)’란 언어적 울타리 안에 가두기에는 주저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근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김근태의 작업은 과연 어디를 지향하는 것일까? 달항아리로 대변되는 조선백자의 색과 피부의 질감을 지향한다는, 단색화에 흔히 덧씌워지는 일반적 수사(修辭)는 말 그대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수식어들은 단색화를 민족주의의 프레임에 가둘 위험이 있다. 김근태의 작업에서 보듯이 단색화는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미적 보편성을 위해 더 치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기하학주의와 표현주의를 넘어서는 것. 서구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른바 후기 인상주의의 폴 세잔(Paul Cezanne)과 폴 고갱(Paul Gauguin)에서 분파된 기하학적 추상과 추상표현주의의 맥락(Alfred H. Jr. Barr)에서 벗어난 ‘제3의 길’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관건은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촉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 시각은 곧 포획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근대성(modernity)’이 취한 전략이다. 르네상스 시기 원근법의 발명 이후, 서구는 계몽주의의 급물살을 타고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서구 제국주의는 원근법의 시각적 포획의 원대한 계획(project)에 따라 타자를 정복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강자적 의지의 적극적 표명이자 행동이었다.

김근태는 시각이 아닌 ‘촉각’에 주목한다. 물론 작품을 보는 행위는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의 작업에서 보다 중요한 요소는 이른바 ‘촉각성’이다. 그의 작업에서 상호주관성과 생태적 관점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김근태는 자연에 주목한다. 그가 자연에 주목하는 이유는 자연의 변하지 않는 속성에 있다. 구름, 하늘, 바위, 산, 파도 등등 자연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접근을 통해,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자연의 진리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자연의 이법(理法)에 대한 인간의 거역으로 빚어진 최근의 코로나 사태에 비쳐 볼 때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궁극적으로 김근태의 <담론> 연작은 세계가 김근태의 신체를 빌려 행하는 인간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다. 그것은 자연적 요소를 통한 의미의 환기로 다가온다. 김근태가 행하는, 흙을 비롯한 자연적 요소에 대한 환대는 그 반대급부로 자연의 황폐화 현상과 그로 인한 자연의 보복과 같은 재앙을 머금고 있다.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의 예지가 빛을 발하는 부분은 바로 이와같은 지점에서이다. 김근태의 작업은 ‘침묵의 언어’에 속한다. 도무지 말이 없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침묵은 금’이라는 잠언을 상기할 때, 그의 침묵은 달변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특히 요즘처럼 요설과 궤변, 허사(虛辭)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같은 인터뷰 기사에서 김근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중략) 우리가 정말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보고 판단하는 건 또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눈에 비치는 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중략) 우리가 작품을 마주했을 때 보는 화면에서 직관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겠지만, 결국 이를 보게 만드는 힘, 볼 수 있는 창구는 무엇인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NOBLESS 2021년 1,2월호 인터뷰 기사 중에서)

‘볼 수 있는 창구’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김근태의 ‘신체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화가란 자신의 꿈과 비전을 관철하기 위해서 세계에 신체를 빌려주는 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로 하여금 원근법적으로 세계를 보게 하기 위해 자신의 눈(신체)을 세계에 ‘빌려준’ 인물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가 ‘창(窓)에 비유된 사실을 감안하면, 이제 인류는 무엇을 통해 세계를 봐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손’과, 바로 그 손의 감각인 ‘촉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촉각이 연상시키는 ‘대지’, 그 풍요로운 어머니의 땅을 돌아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렇다면 김근태의 작업이 바로 세계의 지반이요, 모태인 흙으로부터 온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