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국악인 백현호 인터뷰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음악을 꿈꾸며”
[서울문화투데이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국악인 백현호 인터뷰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음악을 꿈꾸며”
  • 이은영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5.1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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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희ㆍ안숙선 등 명창에게 판소리 5바탕 사사
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이수
2008년 국악 아카펠라 그룹 ‘토리스’ 결성
“판소리 발전 위해선 교육 병행 필수”
판소리 300년 사(史) 집필…올해 출간 예정

[이은영ㆍ진보연 기자]국악계에는 3대 수능 금지곡이 있다. 영화 <전우치>의 ‘궁중 악사’와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그리고 토리스의 ‘어유와 방아요’가 바로 그것이다. ‘어유와 방아요’는 <심청가> 중 방아타령에 나오는 대목으로, 심봉사가 맹인 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장면을 묘사한 곡을 토리스가 국악 아카펠라로 표현해 새로움을 더했다.

▲토리스 ‘어유와방아요’ 뮤직비디오
▲토리스 ‘어유와방아요’ 뮤직비디오

한국 최초의 국악 아카펠라 그룹 토리스는 지난 2008년 판소리, 민요, 정가 등 국악성악 전공자들로 창단되어 그동안 전통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공연을 시도하고 선보였다. 특히 2009년 제3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경상북도 예천의 통명농요 ‘아부레이수나’로 대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토속과 통속을 망라한 우리 민요와 판소리의 눈대목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국악에 익숙한 장년층에겐 아카펠라 음악을, 아카펠라가 익숙한 청소년과 외국인에겐 우리 국악의 신선함과 흥겨움을 선보이며 모두가 한자리에서 신명 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룹 토리스의 창단 멤버인 소리꾼 백현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다. 어린 나이부터 안숙선·전정민 명창 등으로부터 판소리 5바탕을, 명고 이낙훈 선생에게 판소리 고법을 사사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예술사·전문사를 졸업한 그는 더 깊이 있는 소리를 하기 위해 판소리 사설과 문헌의 공부는 필수적이라 생각하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고전문학을 공부했고 이후 단국대학교 국악학과에서도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일반부 장원, 2014년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명창부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최초의 국악 아카펠라 그룹인 토리스를 창단하고 10년째 꾸준하게 활동하면서 제3회 21C 한국음악 프로젝트 대상, 제4회 러시아 국제민속음악콩쿨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간 ‘판소리 다섯 마당 눈대목’과 창작국악앨범 ‘아버지’ 등의 음반을 발매했고, 방송 진행자이자 인간극장 등 TV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현재는 고려대학교와 한경대학교에서 국악 이론과 실기 과목을 맡아 강의하고 있고, 백현호 아트컴퍼니, 한국 국악 문화진흥회, SGA 국악 아카데미를 만들어 판소리의 대중화는 물론 일반인들과 전공자, 다문화가정, 외국인을 대상으로 국악의 보급과 전승에도 힘쓰고 있다. 

▲소리꾼 백현호ⓒ김재성 작가
▲소리꾼 백현호ⓒ김재성 작가

백현호는 스타로서 이름을 알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나는 그보다 더 오래 남길 바란다. 한 사람의 활동은 내가 생을 마감하면 그대로 마침표가 찍히지만, 그가 쓴 책, 그가 한 연구, 그가 가르친 학생들은 더 오래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울러 백현호는 우리의 전통 정신을 올곧게 가져가면서도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소통할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며, 10년 전부터 판소리 300년 사(史)를 한데 모은 책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시대적 소명을 안고 판소리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 1월에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12회 문화대상 국악부문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국악에 익숙한 장년층에겐 아카펠라 음악을, 아카펠라가 익숙한 청소년과 외국인에겐 우리 국악의 신선함과 흥겨움을 선보이며 모두가 한자리에서 신명 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백현호를 만나, 그가 전하고 싶은 음악과 남기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물었다.

제12회 문화대상 젊은 예술가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상을 받은 소회와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 예술가상은 몇 해 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받고 싶은 상이었다. 대단한 선배님들이 많이 받으셨기에 나에겐 하나의 목표가 됐다. 내가 받고 싶다고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젠간 나도 저 상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나의 예술과 국악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그간의 노력을 알아주신 것 같아, 그 어떤 상보다도 영광스럽고 벅찼다. 단순히 국악 분야에 한정된 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크게 다가온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나름대로는 개인 활동과 토리스(국악 아카펠라 그룹)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작년에 국가에 기금 신청했던 것이 잘 되어서 올해 전국을 돌며 30~40개 투어 공연을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완창 발표회를 준비 중이다. 

아울러 소감 발표 당시 언급했던 ‘판소리 300년 사(史)’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올해 안에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이 나이에 이런 책을 쓰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해 굉장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 해보자’라는 결심이 더 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다시 의견을 받아들여 수정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하고 있다. 

어린 나이부터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소리를 해왔을 줄 안다.

시골에서 장남으로서 많은 어른과 선생님들의 기대를 안고 서울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일반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진 않았던 것 같다. 힘들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책임감을 늘 느끼고 있었다. 

▲소리꾼 백현호의 ‘전주세계소리축제-젊은판소리다섯바탕’ 공연 모습
▲소리꾼 백현호의 ‘전주세계소리축제-젊은판소리다섯바탕’ 공연 모습

박송희 명창을 비롯한 전정민ㆍ조상현ㆍ안숙선ㆍ고(故) 성창순 명창에게 판소리 5바탕을 사사했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다. 또한 판소리와 함께 11살 때부터는 명고 이낙훈 선생에게 호남좌도 농악과 판소리 고법을 사사 받았다. 이처럼 많은 스승님으로부터 소리를 배워온 과정과 국가무형문화재 이수를 흥보가로 받은 이유가 있다면?

제일 처음 배운 소리가 단가 사철가와 흥보가였다. 저의 첫 스승님이신 이낙훈 선생님께서 박송희 선생님께 직접 흥보가를 배우는 것을 추천해주셔서 찾아뵀다. 내가 고등학생 때 처음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현재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이다. 타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일과가 끝나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어른들의 기대감이 더해져 내가 지게 된 부담감의 무게가 상당했다. 친구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일어나서 아침 연습하고, 학교 수업 마치고 레슨을 받으러 갔다가 연습실에서 살았다. 그 생활이 3년간 이어졌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완성된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께선 내가 힘든 내색을 하면 오히려 혼을 내셨다.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데 벌써 나약하게 굴면 안 된다며, 스스로 이겨내라고 채찍질하셨다. 야속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때의 시간이 더욱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론 결코 그 외롭고 긴 시간을 이겨낼 수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정말 감사하게도 어린 나의 곁엔 감사한 스승님들께서 함께해주셨다. 지금도 스승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굉장히 은혜를 많이 입고 컸다. 어려웠던 시절에 레슨비도 받지 않고 나를 가르쳐주시는 등 너무나 따뜻하고 무한한 사랑을 주셨다. 소리를 제대로 배워서 선생님의 이름을 빛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감사함과 함께 자라났던 것 같다. 문화재 이수를 흥보가로 받은 것은, 스승님의 사랑과 가르침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한예종에 진학한 후, 안숙선 명창과 원일 교수의 가르침이 음악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전통의 가장 큰 뿌리라 할 수 있는 안숙선 명창과 전통과 현대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원일 교수가 각각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안숙선 명창과 원일 교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분 모두 한국 전통 음악을 통달하셨다는 것이다. 안숙선 명창은 모두가 인정하는 판소리의 대가시고, 원일 선생님도 피리와 타악에 있어서 굉장한 실력자이시다. 전통을 제대로 학습하지 않으면 새로운 창작에 있어서 한계가 분명히 도래한다. 

더불어 두 분 모두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시다. 안숙선 선생님은 전통을 오랜 시간 보존하고 고수해오셨지만, 제자들의 새로운 시도를 항상 독려하고 응원해주신다. 원일 선생님과는 국립청소년 국악관현악단에서 처음 뵀는데, 그동안 제가 봤던 분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칭찬을 많이 받았던 사람인데 선생님을 만나서 혼도 나고 그러면서 많이 배웠다. 가장 큰 변화는 내 안의 고정관념이 많이 깨졌다는 것이다. 

▲소리꾼 백현호ⓒ김재성 작가

한번은 밀양으로 다 같이 수련회를 갔다. 그곳에서 원일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숲이라는 큰 주제로 음악을 만들어 오라’ 하시더라. 무슨 소린가 하면서도 일단 들판에 누웠다. 그랬더니 새소리, 바람소리 등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리와 더불어 휘파람과 박수로 음악을 만드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음악이 발생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다시금 정의 내리게 됐다. 그간 열심히 배웠던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움을 만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지난 2008년에 결성된 국악아카펠라그룹 토리스는 ‘2009년 제3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대상, 2010년 북촌창우극장 천차만별 콘서트 최우수상, 2012년 러시아 국제민속음악콩쿨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내며 활동하고 있다. 토리스가 어떻게 꾸려진 팀이며 개인 활동과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토리스 활동과 개인 활동을 특별히 구분 짓지는 않고 있다. 나에게 무대는 전통을 공부해서 새로운 창작물을 고민해서 대중에게 국악을 알리고, 관객과 만나는 과정들의 연속이다. 단, 토리스는 소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모인 팀으로써 활동한다는 점에서 표현되는 음악의 차이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국악아카펠라그룹 ‘토리스’
▲국악아카펠라그룹 ‘토리스’

토리스는 아카펠라라는 음악의 특성상 서로 간의 양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소리꾼들은 솔로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팀으로 모여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벌써 팀이 만들어진 지 11년이 됐는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각자 다른 지역색이 담긴 소리를 뽐내려다 보니 처음엔 음악이 만들어지질 않았다. 서로 양보하고 볼륨을 줄이는 일은 지금까지도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도 지금은 나름대로 하나의 음악, 하모니를 만드는 연습이 된 것 같다. 

반면 개인 무대에서는 내 음악이 부각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관객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저 내 안에 머무르는 것에 그칠 것이다. 이는 예술가로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그 순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토리스의 뒤를 잇는 후배 그룹을 양성해 볼 계획은 없는지.

국악을 전공한 사람들로 구성된 아카펠라 그룹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한다. 후배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소개하며 해보지 않겠냐고 권한 적도 많은데 결과적으로 잘 되진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인 것 같다. 소리의 블랜딩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대부분 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목소리 사이에 악기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현재 국악 아카펠라 그룹은 토리스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무한한 가능성의 시대이기 때문에 언제든 우리를 위협하고 함께 경쟁할 팀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예종 전통예술원에서 예술사와 전문사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고전문학을 익혔다. 소리의 수련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학문적 깊이를 위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제 첫 스승님인 이낙훈 선생님께선 항상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앞으로는 공부를 해야 하고, 이론을 바탕으로 했을 때 소리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더불어 판소리 이론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한 권의 책이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판소리책을 읽게 됐는데, 그

▲소리꾼 백현호ⓒ김재성 작가

안에는 역대 명창들 수십 명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 책을 10번 정도 읽고 나니 판소리의 계보며 역사가 머릿속에 쫙 펼쳐지더라. 신세계였다. 이때부터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이나 역사 등에도 관심이 커졌다.

과거에 학자들이 써놓은 책들을 허투루 읽지 않은 것은, 내 음악과 방향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나는 그냥 만들어진 내가 아니다. 긴 역사 속

많은 분의 노력의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습을 넘어 ‘판소리 300년 사(史)’ 책을 집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러한 깨달음 덕분이다. 

계획을 실행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300년 사(史)를 집필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

나는 욕심도 많지만, 단순한 욕심에 그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목표가 생기면 부족하더라도 이뤄내는 편이다. 나름대로 추진력이 있다고 자부한다. 300년 사(史) 역시 10년 가까이 준비해온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긴 역사를 한 번에 완벽히 담아내기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많은 분의 의견을 수렴해서 책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나갈 것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판소리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300년 사(史)를 집필하면서, 판소리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라 생각되던가?

가장 먼저 동리 신재효 선생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로 넘어와서는 정응민 명창을 이야기하고 싶다. 정응민 명창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소리를 적절하게 잘 가미해서 신제 판소리 유파인 보성소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그 당시는 법제 법통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시대였는데,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자신의 소신대로 동편 소리와 서편 소리의 매력을 굉장히 적절하게 잘 융합을 해서 새로운 신제 판소리를 탄생시켰다. 

정재근을 통하여 박유전의 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를 이어받았고, 김찬업을 통하여 김세종의 춘향가를 이어받아 전통적인 특성이 강한 정응민제 판소리 양식을 개발하여 많은 제자에게 전했다. 그의 문하에는 아들인 정권진을 비롯해 김연수ㆍ박춘성ㆍ정권진ㆍ김준섭ㆍ장영찬ㆍ성우향ㆍ성창순ㆍ조상현ㆍ안향련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정응민 명창은 소리가 너무 슬프게만, 극적으로만 가는 것을 경계했다. 절제를 통해 소리를 기품있게 표현하려 노력했다. 고제 소리의 강점, 법통을 나름대로 지키면서도 본인의 철학을 녹여낸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전통 정신을 올곧게 가져가면서도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소통할 방법에 대해 많이 고민하며,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작과 전통의 계승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본인이 생각하는 미래 판소리의 방향성은?

전통과 창작을 병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 자체를 계승하고 지켜내는 일만으로도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년 사를 집필하면서 깨달은 바이지만, 역사 속의 명창들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과 학자들은 판소리를 ‘답습’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의 소리를 배워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정신과 배움의 기둥을 지키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담으려 모색하셨다. 

송만갑 선생님은 선대인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으로 이어진 동편제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소리 법통을 토대로 서편제 명창이었던 정창업의 소릿제를 접목해 동편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셨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창극이라는 장르가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한 하나의 모색으로서 방향성을 갖게 되고, 창극단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 판소리를 극적으로 섬세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부분이 있다. 

이처럼 판소리는 그 역사가 처음 기록된 17~18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시대를 반영하고, 뛰어난 예술가들만의 방식이 더해지며,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은 판소리의 부흥기라고 생각한다. 이 부흥기는 지속될 수도, 쇠퇴할 수도 있다. 현재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그룹 ‘이날치’의 음악은 판소리다. 전통이라는 기본은 그대로 남기되 각색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을 시도했고, 성공을 거뒀다. 이러한 시도들이 더 많아져, ‘이날치’에 대한 관심이 판소리 더 나아가 국악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길 바란다.  

교단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는데, 가르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내가 스승님께 그렇게 배웠다. 바르지 않은 거, 열심히 하지 않고 꾀부리는 걸 너무 싫어하셨고 자만하지 않도록 항상 붙잡아주셨다.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나 역시 첫 번째로 제자들이 바른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소리꾼 백현호ⓒ김재성 작가

아울러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초심’이다. 이 말 안에 스승님의 가르침, 나의 신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초심 안에 근본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나를 도와주셨던 많은 분의 노고와 응원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겸손해지려 노력한다. 내가 오랜 시간 직접 겪으며 깨달은 귀중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도 온전히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러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꾸준히 지속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스타로서 이름을 알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나는 그보다 더 오래 남길 바란다. 백현호라는 한 사람의 활동은 내가 생을 마감하면 그대로 마침표가 찍히지만 내가 쓴 책, 내가 한 연구,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더 오래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중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이고, 이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Arte) 소속 강사로 10년을 활동했다. 바쁜 활동 중에도 계속했던 이유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접한 경험이 삶에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판소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교육은 놓치지 않고 계속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국악인이 되고 싶은가.

백현호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미소 짓게 만들고 싶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고 음악으로 선사하는 긍정적 에너지로 마음의 위안이 되고 싶다. 

더불어 개인적인 계획은 내가 사는 송도에 국악 축제를 유치하고자 한다. 재즈, 클래식 등 여러 장르의 음악 공연이 많지만, 국악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제도시 송도에 국악이 주인공이 되는 행사가 없다는 것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에 국악을 바탕으로 하는 월드 뮤직 페스티벌을 만들어 우리 소리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