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시대의 춤꾼’ 이애주, 하늘가는 길
[성기숙의 문화읽기]‘시대의 춤꾼’ 이애주, 하늘가는 길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05.18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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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며칠 전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명무 이애주(李愛珠, 1947~2021) 선생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그리고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지내며 작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기에 그의 별세 소식은 문화계 안팎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춤꾼 이애주의 장례식은 소박하면서도 이채로웠다.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인사들과 문화운동 제1세대 지식인들 그리고 유족과 전통예술계의 동료와 지인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일생의 도반(道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슬픔을 머금은 채 이애주의 영정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애주는 작고하기 직전 유홍준을 비롯 몇몇 문화계 지인을 불러 사후(死後) 뒷일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결과 병석에서 기적적으로 재단법인 이애주문화재단이 창립됐다고 한다. 재단 설립을 위해 자신의 집과 땅을 내놓았다고 하니, 그는 생(生)의 마지막까지 숭고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향후 이애주문화재단을 통해 그가 남긴 춤유산과 정신을 이어간다고 하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유홍준, “자연춤·민족미학 펼칠 ‘문화재단’ 인가증만 남겨두고···”, 한겨레, 2021.5.11).   

장례의례, 그리고 하늘가는 길

2021년 5월 13일, 춤꾼 이애주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했다. 오전 7시 서울대병원에서 발인식을 마치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과 과천 승무전수관에서 노제를 치렀다. 이후 장지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알다시피 모란공원은 민주열사 묘역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장소다. 공원묘지 정문에서 “기죽지 마라, 백기완”이라는 나무푯말을 따라 산 중턱에 오르자 이애주 묘지터와 마주한다. 

아늑한 산세를 배경삼은 오월의 푸르름은 더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변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열사를 비롯 생전 이애주와 막역한 사이였던 민주투사 백기완 그리고 민족미학의 선구자 김윤수 등이 잠들어 있다. 춤꾼 이애주의 묘까지 더해져 마치 민주열사 집성촌을 이룬 형국이다.  

▲2021년 5월 13일 오후 3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거행된 하관식
▲2021년 5월 13일 오후 3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거행된 하관식

옛 문헌에는 장례의식에 가무가 곁들여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구려 고분벽화 그림에도 장례의례와 관련된 가무의 연행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장례 때 수 백명의 군악대가 북치고 피리불고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노래와 춤으로 죽은 이를 즐겁게 하는 축제형식의 일종인 오시(吳屍)의 전통이 있었다. 고구려, 신라의 장례풍속과 조선시대 오시의 전통은 오늘날 진도다시래기(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 등 여러 장례놀이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춤꾼 이애주의 장례의식은 종교적 의례성과 축제적 놀이성을 함축하고 있다. 가무악이 곁들여지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그의 장례의식은 문화사적으로 더없이 값지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 발인식에서부터 마석 모란공원 장지에 이르기까지 흰색 만장을 따라 장례행렬이 뒤를 이었다. 망인의 제자들로 구성된 전통춤회 소속의 춤꾼들은 침잠된 몸놀림으로 엄숙한 분위기에 무게를 더한다. 반면 북과 장고를 둘러맨 풍물패는 풍악을 울리며 시종 흥을 돋운다. 진행을 맡은 이성호는 익살스런 재담으로 상주의 슬픔과 비통함을 위로한다.  

모란공원에서 진행된 장례의식은 일종의 축제이자 놀이를 연상케 했다. 하관식은 ‘취토제’, ‘평토제’ 그리고 마지막 ‘달궁소리’로 이어졌다. 망인의 제자와 문상객들은 달궁소리에 맞춰 회무(回舞)하면서 땅 다지기를 반복한다. 제의적 주술성이 내재된 휘겡이춤이 추어지고 풍물패의 연주는 웃음과 신명의 난장으로 주변을 이끈다. 이처럼 망자를 보내는 마지막 저승길은 눈물과 웃음이 교차한다. 이애주의 장례식은 슬픔과 비통함을 흥과 신명으로 승화시킨 전통 장례의례의 현대적 변용으로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2021년 5월 13일 오후 3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거행된 하관식 :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의 ‘진혼무’
▲2021년 5월 13일 오후 3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거행된 하관식: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의 ‘진혼무’

무엇보다 탈춤과 마당극의 대부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의 진혼무는 압권이었다. 엄혹했던 시절 동지적 연대감으로 문화운동을 함께한 채희완은 무용계 내 몇 안되는 그의 충직한 우군으로 통한다. 묵직한 호흡으로 빚어낸 선 굵은 몸짓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섬뜩한 전율을 안겨줬다. 방상시의 광기(狂氣)가 투영된 그의 축귀춤은 한(恨) 서린 통곡의 몸짓으로 더욱 처연하게 다가왔다. 그의 몸짓에서 ‘민중예술의 전설’로 통하는 한국 현대판화의 선구자 오윤의 판화 속 형상이 꿈틀대며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문화예술인장으로 치러진 3일간의 장례는 추모공연 중심의 문화제로 진행되었다. 원일이 이끄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추모공연과 박은하의 ‘진혼무’, 이광수 명인의 ‘비나리’, 제자들로 구성된 전통춤회의 ‘예의춤’, ‘승무’, ‘꽃살풀이춤’, ‘터울림’, ‘진혼무’ 등이 조문객을 맞았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망인의 삶의 여정이 춤사진과 영상으로 반추되었다. 춤꾼 이애주의 장례의식은 이렇듯 가무악이 조화된 보기 드문 문화제로 융숭깊게 치러졌다.  

‘바람맞이’, 시국춤의 표상

이애주는 일찍이 ‘민주화의 춤꾼’, ‘시대의 춤꾼’, ‘시국춤의 상징’ 등으로 불리었다. 이로써 춤꾼 이애주는 일평생 소위 ‘좌파예술가’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1987년 이애주는 자신의 춤인생에서 큰 변곡점을 맞는다. 그해 6월 연우소극장에서 선보인 이애주의 ‘바람맞이’ 공연은 춤의 순수와 참여 논쟁에 불을 지폈다. ‘민주화를 향한 의지의 표명’이자 ‘주체문화를 향한 소망’으로 평가되었다. 이른바 이애주의 ‘시국춤’은 예술지상주의에 경도된 신무용(新舞踊)의 탐미성에 경종을 울렸다. 반면, 시류에 편승한 ‘阿Q적(的) 춤꾼’으로 매도되는 등 비판도 없지 않았다. 

▲2021년 5월 13일 오전 11시, 경기도 과천 승무전수관에서 거행된 노제: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진혼무 터울림’

그러나 이애주의 행보는 더욱 가열차게 한 시대를 달궜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질곡의 역사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1987년 7월 반정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한풀이춤을 추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피로 얼룩진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의 절규하는 몸짓은 민중들의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민주화를 향한 결기서린 몸짓은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된 1987년은 우리 무용사에서도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된다. 춤의 대사회적 역할을 환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람맞이’ 이후 이애주는 민중문화운동의 상징 혹은 반정부 저항예술가를 표상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무용계에서는 ‘운동권 춤꾼’ 혹은 ‘시국춤꾼’으로 통했다.

한편, 시국춤을 추는 이애주는 제도권 무용계와는 다소 소원한 편이었다. 순수예술 지향의 보수성 짙은 무용계에서 이애주는 경외의 대상이거나 낯선 존재로 여겨졌다. 예술미학적 관점에서 아마추어적 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일부의 편견이 보편적 인식으로 객관화되기 십상인 무용계 특유의 왜곡된 풍토에서 비롯된 의도적 폄훼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文史哲 섭렵, 우리 춤의 원형탐색

1947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이애주는 5세 무렵 궁중정재의 대가 김보남 문하에 입문하여 춤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의 첫 스승 김보남은 궁중정재의 독보적 존재로 알려진다. 김보남은 이왕직아악부 1기생으로 궁중악무를 체득하고,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 문하에서 민속춤을 배웠다. 궁중정재와 민속춤을 모두 섭렵한, 보기 드문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애주는 훗날 한성준의 손녀딸 한영숙에게 중고제 전통춤 전반을 사사받아 춤의 명인으로 일가를 이뤘다.

이애주는 20대 초반부터 검증된 춤실력의 소유자로서 세인의 관심이 컸다. 한영숙 문하생 시절 1968년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쥐면서 무용계의 신예로 등장한다. ‘똑똑한 서울대생’이라는, 세속적 프리미엄도 한 몫 거들었다.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단숨에 한영숙의 후계자로 낙점된다. 1975년 이수자를 거쳐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당대 내노라는 명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의 춤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홍준 이애주문화재단 이사(전 문화재청장)가 11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뜻하지 않게 스승과의 불화도 겪었다. 1987년에 즈음하여 스승 한영숙은 춤 잘 추는 제자가 단지 ‘시국춤꾼’으로 귀결되는 것을 우려했다. 스승은 1970년대 진보지식인 청년들과 어울려 대학탈춤운동을 주도할 때도 무언의 응원을 보내며 지켜봤다. 형사들이 들이닥쳐 ‘도대체 무슨 춤을 가르쳤냐’고 따져 물어도 제자를 비호하던 스승이었다. 

그러나 병석의 스승은 우리 춤의 고유미가 왜곡 변형되는 풍토가 심히 걱정되었다. 1989년 스승 한영숙은 우리 춤을 ‘본디 그 모습 그대로’ 올곧게 보존 계승할 것을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스승의 타계 이후 이애주는 새로운 정신과 각오로 우리 춤에 심취했다. 근원으로의 회귀는 여러 파장을 몰고 왔다. 운동권 일부에서 ‘변절자’라는 오해와 지탄도 있었다.

춤꾼 이애주는 적지 않은 세월 우리 춤의 원형찾기에 몰두했다. 국경을 넘나든 것도 수십 차례다. 고대문화 탐사를 위해 중국 요하·요동 홍산문화권에 산재한 제단터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고구려 고분벽화 춤그림 연구를 목적으로 중국 집안지역을 현지 답사한 이력도 예사롭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와 중앙시아 문명권을 비롯 몽골,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등을 누비며 우리 춤의 원류를 추적했다. 이애주의 우리 춤 원형탐색은 이처럼 집요하고 끈질겼다. 말년에 집적한 영가무도(詠歌舞蹈) 역시 이러한 집념의 소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1년 5월 13일 오전 8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거행된 노제: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진혼무 꽃살풀이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관통한 이애주의 아카데믹한 탐구정신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무용전공자로서 국문과에 학사편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석·박사과정을 통해 신라 처용무와 고구려 고분벽화 춤그림에 대한 가치 재발견 등 유의미한 학문적 성취를 얻었다. 그는 우리 춤의 본질과 실체를 알기위해 대산 김석진 문하에서 주역을 공부하는 등 일평생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선취(先取)된 춤지식과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국 춤의 학적(學的) 토대의 결핍을 채우는데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이애주의 타계, ‘한 시대의 종식’ 의미

한국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춤꾼 이애주의 타계는 우리시대 모든 이에게 비통함을 안겨줬다. 아울러 그의 소천(召天)은 한국무용사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애주는 고(故) 정재만과 더불어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져온 중고제 전통춤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된다. 그는 중고제 전통춤 고유의 문법과 본질을 고수하면서도 당찬 기운과 속 깊은 멋으로 한 시대를 평정했다. 

▲국립국악원 소속 박은하씨가 11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진혼무’을 추고 있다.

이애주의 큰 스승 명무 한성준은, 뼈 삼천마디를 놀려서 북태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추어야 우리 고유의 전통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신명과 고요가 서로 교통하고, 지상과 우주가 화합하여야 하며 장삼자락을 걷어 올릴 때에는 태산을 들어 올리는 기풍(氣風)으로 움직여야 진정 춤의 참맛이 우러나는 법이라고 설파했다. 과연 누가 이러한 기운으로 춤 출 수 있을까? 오직 이애주만이 이러한 경지에서 춤을 춘 거의 유일한 춤꾼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천명(天命),’ 하늘의 명을 받든 춤꾼 이애주!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춤꾼이었다. 그는 역사의 광풍(狂風)과 세속의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였다. 무용사적 관점에서 이애주의 타계는 한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떠난 ‘오늘·여기’, 우리는 ‘텅 빈 그늘’과 마주한다. 

사진기록 및 제공 : 성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