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팀 버튼의 초콜릿 공장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팀 버튼의 초콜릿 공장
  • 윤이현
  • 승인 2021.06.08 1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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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이름을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바꾸었다.

열세 살에 한 살 터울의 친한 언니와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교회 건물 6층에 있는 화실이었다. 사과, 벽돌, 석고상 등 아주 기본적인 정물의 소재 몇 가지만이 놓여있는 단촐한 곳이었다. 선생님은 그것들을 10분 이상 바라보게 하셨다. 눈으로 사물을 꿰뚫어 마음에 정물을 새겨야 한다고 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면 그때야 목탄을 집고 종이 위에 그것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조용한 화방의 찬 기운, 어색한 목탄의 느낌, 서늘한 겨울 풍경. 그렇게 미술은 어렵고 공허하며 춥고 거친 느낌으로 각인되었다.

봄이 왔을 때 즈음 선생님은 우리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데려가셨다. ‘팀 버튼(Tim Burton, Timothy Walter Burton)’ 전시가 한창이었다. 표를 끊고 들어갔을 때, 놀이동산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입구에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마스 악몽’, ‘유령 신부구상 초기 스케치들과 캐릭터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의 전시장 벽엔 거미와 거미줄이 잔뜩 걸려있었다. ‘가위 손의 가위 그리고 그의 뮤즈라고 불리는 조니 뎁의 사진들. ‘찰리의 초콜릿 공장캐릭터들과 소품들. 답답하고 지겨운 화실에서 벗어나 생동감 넘치는 전시장에서 내리 두 시간은 있었다. 팀 버튼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죽은 나무가 만든 뻣뻣한 도화지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만지고 체험할 수 있었다. 응시하고 그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상상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처음 배웠다. 그리고 그게 내게 맞는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화실을 관뒀고, 함께 그림을 배웠던 그 언니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선생님과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을 수 없을 만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겼다. 이제는 미술도 하지 않고, 을 버느라 예술에 대한 감흥도 저만치 멀어졌다. 입시를 계속하고는 있지만, 하면 할수록 가능성의 기대가 오므라드는 것도 사실이다. 꿈은 어릴 적에 꾸었던 크기보다 크게 줄었고, 무언가를 시작할 때면 겁부터 나게 된다. ‘할 수 있을까?’,‘너무 늦은 건 아닐까?’ 두 생각이 머리를 돌고 돌아 시작하는 힘을 부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걸 문제 삼지 않고 넘긴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돈을 벌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니까.

오래간만에 쉴 수 있는 하루가 생겼다. 주어진 것에 항상 즐겁게 임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인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었다. 전날 갑자기 밀려온 우울함에 몸부림을 쳤다. 괴로운 시간이 지나갔고 문뜩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또 출근해야 했기에 멀리 갈 수는 없어서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퇴근 후에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싸 들고 혼자 호텔로 향했다. 가장 높은 층의 디럭스룸에 짐을 풀고 한 시간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오후 세 시의 햇볕을 온몸으로 쬐면서. 정신이 들 때 즈음 배가 고파왔다. 사 온 떡볶이와 핫도그를 베어 물고 텔레비전을 켜보기로 했다. 마땅히 볼 게 없어서 금세 무료해졌다. 그때 넷플릭스를 틀었다. 뭘 볼까 한참을 뒤적이다가 팀 버튼의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선택했다. 살면서 족히 열 번은 본 듯한 영환데, 또 보니 재밌고 좋았다. 연말이면 마트에서 잔뜩 과자를 사 들고 작은언니와 함께 보던 그 영화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비록 홀로 서울의 외딴 호텔에서 다 식어가는 떡볶이 앞에 앉아 있었지만.

소문만 무성한 비밀의 초콜릿 공장주인 윌리 웡카는 초콜릿 속 황금 티켓을 찾은 아이들에게 공장 견학을 시켜주겠다고 선포한다. 단 다섯 장인 티켓을 찾기 위한 세계 각지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웡카의 공장 바로 옆,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사는 찰리네 가족들은 찰리의 생일 선물로 초콜릿을 주게 된다. 그러나 티켓은 찾을 수 없었고, 찰리는 실망한다. 과거에 윌리 웡카와 함께 공장에서 일했던 할아버지의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위안 삼을 뿐이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버려진 지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찰리는 곧장 가게로 달려가 초콜릿을 사게 되고 그 안에서 황금 티켓을 찾아낸다. 비싼 값을 쳐주겠다는 어른들을 제치고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웡카의 공장으로 향한다.

팀 버튼 감독 '찰리와 초콜릿 공장' 중 한 장면 (출처: https://blog.naver.com/)
팀 버튼 감독 '찰리와 초콜릿 공장' 중 한 장면 (출처: https://blog.naver.com/)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창문 밖을 봤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한산했던 도로는 퇴근길의 자동차들로 가득하고 하늘엔 하얀 달이 떴다. 내 앞에 떡볶이는 열기를 잃고 퉁퉁 불어있었다. 그리고 내 뺨 위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던 아주 오랜 기억들이 떠올라 나를 울렸다. 같이 그림을 배우러 다녔던 해인이 언니와 허 선생님과 함께했던 그 날의 기억, 60대가 되어버린 팀 버튼, 어느덧 직장인이 된 작은언니, 그리고 바래버린 내 안의 꿈과 예술에 대한 열정, 희망 따위가……. 그대로 침대에 누워 꼼짝없이 숨만 쉬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 아침에 눈을 떴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날 분명 나는 예술의 체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오랜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며 지나간 옛 인연에 마음속으로 안부를 물었고, 동시에 그때의 나와 언니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열심히 세상을 꿈꾸고 희망하고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전했다. 이런 체험이 가능했던 건 팀 버튼의 환상적인 작품 덕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상상했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어린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줬으며, 처음으로 예술을 해야겠다는 꿈을 준 사람도 그였다. 먼 훗날 추억과 소통할 수 있게 하고, 한동안 울어보지 못한 메마른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 것도 팀의 영화 때문이다. 아주 머나먼 미래에서도 그는 내게 예술을 체험하게 해주리라 믿는다. 무수한 시간을 지나 도착한 미래의 나도 그곳에서 오늘의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희망을 주는 예술가가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