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이브 버거, 그림으로 나누는 부자(父子)의 대화…『어떤 그림』 출간
존 버거·이브 버거, 그림으로 나누는 부자(父子)의 대화…『어떤 그림』 출간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6.04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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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들의 통역자’ 존 버거의 마지막 시간들
▲존 버거·이브 버거 지음, 신해경 엮음|열화당|정가 13,000원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로 알려진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가 말년에 시골집에 있는 아들 이브 버거(Yves Berger)와 나눈 편지가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은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근원적 질문과 불완전한 응답들이다. 때론 느긋하게 때론 날카롭게 오가는 이들의 대화는 영원과 무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예술이 보여주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존 버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15-2016년경에 쓴 글이기에 그의 마지막 생각들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둘은 그림엽서에 인쇄되거나 화집에 실린 그림, 또는 직접 그린 드로잉을 병치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마치 한 장의 그림이 우리에게 남겨진 한 통의 편지인 것처럼, 그림끼리 서로 말을 건네는 것처럼 무대 위로 작품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그림을 갖고 하는 놀이처럼 짧고 가볍게 주고받던 편지는 뒤로 갈수록 점점 길어지고, 예술의 본질, 화가의 소명과 같은 진지한 주제로 대화가 무르익는다. 

존 버거는 우리가 속한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이 예술이고, 그림은 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를 전해 주는 전령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몸짓은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일깨워 주는데, 연대와 나눔의 행위를 통해 거대한 전체를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림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그림은 존재를 감싸는 원형질이며, 결국 그림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이라는 데까지 도달한다. 이브는 존의 예리한 통찰에 동의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이 그림에게 부여된 무거운 짐이긴 하지만 동시에 화가들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고 답한다. 

이십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존 버거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에 관한 글을 남겼다. 존 버거는 많은 글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옛 작가들이나 사상가들을 바로 옆에 있는 동지처럼 불러내곤 했다. 그에게 물리적인 부재는 문제되지 않는다. 

이브 역시 사라지는 것은 이어지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다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몸은 사라졌어도 그가 남긴 작품, 그가 보여준 지향점과 강한 추진력은 남아 있고, 그의 생이 다른 생으로 이어져 갈라지고 뻗어나가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브 버거가 아버지의 사망 직후 이 편지와 그림들을 모아 책을 엮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평생 동안 ‘이름 없는 것들의 통역자’가 되고자 했던 존 버거의 마지막 시간들, 그리고 그의 생각들이 죽음 뒤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금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그림』의 저자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주요 저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 『제7의 인간』 『행운아』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벤투의 스케치북』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G』,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 『결혼식 가는 길』 『킹』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A가 X에게』 등이 있다.

이브 버거(Yves Berger)는 1976년 프랑스 오트사부아(Haute-Savoie)의 생주아르(Saint-Jeoire) 태생의 화가로, 제네바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알프스 산록의 시골 마을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 「과수원에서 정원까지(From the Orchard to the Garden)」(마드리드, 2017), 「마운틴 그라스(Mountain Grass)」(런던, 2013) 등이 있으며, 공저로 『아내의 빈 방』(2014)이 있다.

정가 13,000원,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