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리뷰]80명의 아티스트를 만나다…《아트 오브 도플갱어 윤진섭》展
[전시 리뷰]80명의 아티스트를 만나다…《아트 오브 도플갱어 윤진섭》展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1.06.04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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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오는 16일까지
드로잉 판매금은 박물관 후원금으로 기부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인공지능 ‘넥스트 렘브란트’를 개발한다.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렘브란트 유명 작품 약 346점을 분석한 인공지능은 렘브란트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새롭게 창작된 이 그림은 전문가들을 속일 정도로 실제 렘브란트의 작품을 닮아있었다.

인간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예술 창작까지 기술이 확장되니, 많은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술가들이 설 자리도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과 기술의 개발은 더욱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의 예술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때에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80여 개의 자아와 예명을 가지고 있고, 비평가‧큐레이터‧현대 미술가이자 교육자인 윤진섭의 전시다.

▲Untitled, 2021, 39x27cm, crayon on paper(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Untitled, 2021, 39x27cm, crayon on paper(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지난달 13일부터 오는 16일까지 열리는 윤진섭 개인전 《아트 오브 도플갱어 윤진섭》은 미술계 안에서 다층적인 활동을 펼친 작가의 50년간의 흐름을 ‘도플갱어’와 ‘부캐’라는 이미지를 통해 살피며, 한 개인 안에 있는 수많은 창의적 자아를 조명한다. 유희적이면서도 사회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윤진섭의 작품은 관람객 안에 숨어있던 순수함과 창의성을 자극한다.

전시는 한국미술계에서 비평가‧큐레이터‧현대 미술가‧교육자로 활동한 윤진섭의 아카이브 자료 60여 점과 Wangzie, HanQ, SoSo, Very Funny G.P.S, Dono, Donsu 등의 예명으로 그려낸 50점의 드로잉으로 구성됐다. 전시기간 중에는 윤진섭의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퍼포먼스 ‘예술자유공생군 창단행사’와 ‘Good Bye COVID-19'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유튜브채널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에 출품된 드로잉 50점은 구매 가능하며 판매금은 박물관 사업운영비로 전액 운용된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후원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윤진섭은 잊혀져가는 한국미술인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취지로 기부 결정을 내렸다.

▲Good Bye COVID-19 퍼포먼스 영상 캡처
▲Good Bye COVID-19 퍼포먼스 영상 캡처

윤진섭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학과 석사를, 호주 웨스턴 시드니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미술사/미술비평) 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으로 한국사회와 그에 공명한 한국현대미술인들의 여러 양태를 예리한 시각에서 비평해왔다. 지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 전시에서 초빙 큐레이터로 참여해 ‘단색화’ 용어 정착과 확산에 공헌한 바 있는 윤진섭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 미술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이자 평론가, 기획자다.

자갈과 나뭇가지로 놀이 예술의 장을 만든 행위예술가, 윤진섭

1960년대 말 한국 미술은 새로운 움직임과 시도를 시작했다.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이 ‘S.T(Space Time 조형예술학회)’그룹과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그룹이다. 윤진섭은 대학교 3학년 시절 이건용의 추천으로 S.T 그룹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1977년 제 6회 S.T그룹 정기전 “대지를 만들고 세계를 여는 사람들”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We Stroke>를 선보이며 기성 예술인 그룹으로 진입한다. 윤진섭의 퍼포먼스는 자갈, 색지, 나뭇가지들로 작은 마차를 만들고 관객을 작품 속으로 참여시키는 놀이적 행위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희적 성격을 잘 담아내는 작품이면서 주거와 유목 문제를 건드리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다.

▲제6회 S.T.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윤진섭 퍼포먼스 현장, 견지화랑에서, 1977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전시장에서 자신의 아카이빙 자료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가던 윤진섭은 “77년에 S.T 정기전으로 기성예술인 그룹으로 속했지만 82년에서 84년까지 3년간은 목판화를 하는 시기를 거쳤고 이후에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로도 재직했다”며 “군대를 다녀오고 서울현대미술제 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어쩔 수 없는 무명시절을 겪기도 했다”고 얘기했다.

그의 무명 시기가 끝나간 시점은 1986년도 이건용의 제안으로 참여하게 된 “86설치행위예술제”에서 <숨 쉬는 조각>을 선보인 때다. 이어서 윤진섭은 작품 <태동>을 선보이고, 87년에 본격적으로 행위예술에 빠져들게 된다. 이후 ‘윤진섭퍼포먼스’ 그룹을 창단한 그는 대학로에서 <거대한 눈>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윤 작가는 “당시 나는 요셉 보이스에 빠져있는 때였는데, 그의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를 오마쥬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며 “생닭을 안고 실톱으로 닭을 슥슥 써는 것 같은 동작과 함께 말을 하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퍼포먼스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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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포먼스 <거대한 눈>, 대학로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그가 <거대한 눈>을 선보인 시기는 표면적으로는 민주화 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침묵이 강요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김영삼 민주당 대표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이 주목받았던 때였다. 윤진섭의 생닭을 써는 퍼포먼스와 함께 온몸에 흰 가루를 뒤집어 쓴 남자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더듬더듬 길을 걷는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 <거대한 눈>은 당시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담아내면서,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단색화(Dansaekhwa)’ 용어의 시작…비평가, 윤진섭

예술가로 삶을 이어오던 윤진섭은 1990년도 평론가로 등단하며 그의 또 다른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가 평론을 시작한 한국 미술계는 다원주의 시대가 열리는 때였다. 1995년은 미술의 해로 지정돼 해외로 국내 미술시장이 개방되기도 했다. 이 때에 비평가 윤진섭은 신세대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짚어내며 한국 미술계에 다양한 시각을 만들어나갔다.

비평가 윤진섭은 예술가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했고, 또 무명의 시기도 겪었던 인물로 누구보다 한국 미술계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비평가가 되어 평론을 이어오던 그에게는 항상 큰 고민이 있었다. 70년대 화단에 머물면서 느꼈던 한국 ‘단색화’에 대한 가치를 언제 어떤 시기에 알려야 하는 것인가였다. 윤진섭이 쓰기 시작한 ‘단색화’라는 용어는 이전에는 없던 용어였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윤진섭 작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윤진섭 작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2000년 제 3회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개최된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시를 기획하면서 윤진섭은 처음으로 ‘단색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침묵의 목소리, 자연을 향해서’ 이 글을 보면 단색화의 영문을 처음 찾아볼 수 있다”며 “‘ Encounter of Korea Monochrome(Dansaekhwa) and Japanese Monoha' 이 문장에서 처음 ’단색화‘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하 모두 단색화를 사용해 글을 썼다”고 당시의 떨림을 전했다.

‘단색화’라는 새로운 용어 정착을 위해 그는 12년 간 수많은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Dansaekhwa’라는 기록을 남겼다. 윤 작가는 “‘단색화’라는 용어를 기회가 왔을 때 써야한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며 “사실 써야 하는 가 말아야 하는가, 용어의 정착으로 시작될 많은 논란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매순간 있었고 결단을 내리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얘기했다. 그의 결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단색화’는 없었을 것이다.

▲단색화가 처음 사용됐던 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단색화가 처음 사용됐던 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이후 2012년 윤진섭에게는 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국립현대미술관 배순훈 前 관장 앞에서 ‘단색화’ 전시를 제안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윤 작가는 “당시 전시가 채택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파워를 느낄 수 있었는데, 단색화 전시 작품의 80퍼센트를 소장품으로 채우는 순간과 구글에서 단색화가 검색이 되는 순간이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윤 작가의 ‘단색화’ 용어의 시작은 2012년에 개최한 “한국의 단색화”전시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단색화’라는 용어 뿐 아니라 한국의 정제된 미를 담아내며 울림을 전하는 ‘단색화’ 그 자체의 시작이기도 했다.

놀이적 삶을 살아가는 예술가 윤진섭…예술자유공생군 창단

90년대 이후 비평가의 삶에 무게를 실었던 윤진섭은 2000년대부터 퍼포먼스와 회화작업에도 지속적인 시도를 이어왔다. 2009년 이후의 윤 작가가 한 퍼포먼스는 70회에 달한다. 그의 작업은 즉흥적인 시도와 유희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윤 작가가 2011년 11월 문래예술공장에 다녀오던 길에 만나서 이야기를 얻어 작품이 된 ‘브로큰솝’은 이후 10년간 전시에 7,8번 참가했다. 그는 “겨울 화단에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가는 중에 그냥 툭 꽂혀있는 부러진 삽자루를 보는 순간 무엇인가 생각났다”며 “삽자루를 들고 걸어가는 10분 동안 대화를 하면서 이름을 지어줬고, 브로큰솝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작품 창작 시작을 전했다. 주위에 스쳐가는 사물에 관심을 갖고 상상을 넓히는 그의 시각이 돋보이는 지점이었다.

▲퍼포먼스 〈쿤스트독의 추억〉, 
쿤스트독갤러리에서, 2009.12.31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그의 또 다른 퍼포먼스 중 하나는 2009년 쿤스트독에서 펼친 즉흥 작품이다. 행사가 끝난 다과회 자리에서 음식을 담아뒀던 꽃무늬 접시를 가면으로 사용하고 검정 쓰레기 봉투를 망토처럼 두르고, 도록을 들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윤진섭은 이번 전시 기간 중 ‘예술자유공생군’을 창단했다. 이미 80명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그는 혼자로도 80명의 군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SNS에 연결된 이들과 핸드폰 속 이들까지 합하면 금방 1000명이 넘는 부대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진행한 ‘예술자유공생군’ 창단식엔 그가 드로잉 시 사용했던 사인펜으로 만든 총과 예술 폭탄이 사용됐다.

▲예술자유공생군창단행사 퍼포먼스 영상 캡처
▲예술자유공생군창단행사 퍼포먼스 영상 캡처

전시장에서는 그의 회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끌어내 표현한 추상화와 북어포로 그려낸 인물화 등 그의 드로잉 이곳저곳에도 그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과 유희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윤 작가는 우리나라는 한 개의 자아와 역할만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며, 사실 재능이 있고 놀이에 대한 감각이 있다면 주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아가도 된다고 말한다. 그가 살아온 다양한 자아의 46년 화단 생활이 그의 말에 더 큰 무게감을 실었다.

‘예술자유공생군 창단식’ 속 윤 작가가 가장 중요시 생각한 것은 ‘놀이와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그의 즐겁고 자유로운 예술군대는 물리적으로 점점 삶이 좁아지고, 지쳐가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파동을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