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비평]윤진섭론: 분열과 확장의 분신술사
[전시비평]윤진섭론: 분열과 확장의 분신술사
  • 안소현 비평가
  • 승인 2021.06.09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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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80여 개의 이름으로 다중 자아 표현한 '크리큐라티스트'
ST그룹 멤버로 시작해 행위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예술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계보를 세운 전위적 비평가⋅기획자
단색화 (Dansaekhwa) 최초 명명, 국제화에 공헌
6월 16일까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개인전 '아트 오브 도플갱어' 개최

1. 놀이의 시작

분신술의 묘미는 잡힐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분신들 사이에서 정체를 지우는 순간 본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나의 본체는 그렇게 여러 명의 분신으로 분열되고, 여러 명의 분신은 다시 하나의 본체로 수렴한다. 이 원환 속에서 본체와 분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윤진섭은 분신술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교육자, 비평가, 큐레이터이자 80여 개의 이름을 가진 예술가로 활동하며 지난 40여 년간 분열과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모든 정체성은 윤진섭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가리키며 그를 끝없는 차이생성의 과정에 놓아둔다.

윤진섭은 1955년 충남 천안에서 팔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유롭게 성장했다. 어린 시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작품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고는 했다. 가마터가 많던 동네에서 찰흙을 주워 이런저런 형태로 빚어보거나 빨간 약으로 만화를 그리기도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일찍부터 대상을 달리 보고 그 용도를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이후 청소년기에 접한 아방가르드 문학은 장차 그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는 형수가 시집올 때 들고 온 이상의 작품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한다. 이러한 경험들로 새로움을 향한 취향이 형성돼 평생 전위 미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성인기의 윤진섭이 어떻게 현대 미술과 ‘아방한’ 분신술 놀이를 즐겨왔는지 추적해보자.

제6회 S.T.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윤진섭 퍼포먼스 현장, 견지화랑에서, 1977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6회 S.T.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윤진섭 퍼포먼스 현장, 견지화랑에서, 1977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 시대의 무게에 맞서는 퍼포머

윤진섭은 1975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60년대 화단을 이끌었던 앵포르멜 운동 세대가 잠시 힘을 잃었던 시기다. 이들이 70년대 중반에 단색화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신체제, AG, ST, 에스프리 등의 그룹을 중심으로 전위적인 조형 실험이 활발히 이뤄졌다. 윤진섭은 대학교 3학년 때 이건용을 만나 ST에 가입한다. 이를 계기로 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ST 그룹전 《대지를 만들고 세계를 여는 사람들》 오프닝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직접 만든 작은 손수레에 나뭇가지, 돌, 자갈 등을 싣고 와 관객과 더불어 작은 귀틀집을 짓고 울타리를 친 작업이었다. 집 짓기 놀이를 통해 주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유목적 성격의 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당시에는 관념적 색채가 강한 논리적 이벤트가 주를 이뤘는데 윤진섭은 놀이적 이벤트로 신세대의 감각을 보여줬다.

퍼포먼스 '태동', 대학로, 1986, '86여기는 한국'에서 발표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퍼포먼스 '태동', 대학로, 1986, '86여기는 한국'에서 발표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졸업 후에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영등포 공고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는 동시에 다양한 활동을 한다. 82년에서 84년 사이에는 목판화 작업을 했다. 한국에서 판화는 70년대부터 흐름을 타기 시작해 80년대에 무르익었는데 이러한 시류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86년에는 홍대에서 미학을 공부하던 와중에 퍼포먼스 활동을 재개한다. 서울 남영동에 위치했던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이건용이 기획한 《서울 86 행위설치미술제》에 참여해 <숨 쉬는 조각>을 발표한 게 시작이었다. 윤진섭은 이 작업에서 파란 물감을 뒤집어쓴 남자 행위자 13명의 신체 위에 드로잉을 한 후, 이들로 하여금 한쪽에서 조각상처럼 포즈를 취하게 했다. 신체는 캔버스가 되기도 하고 조각이 되기도 하며 매체 개념을 확장한다. 같은 해 대학로에서 열린《86 여기는 한국》에서도 <태ㆍ동>이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여기서는 대걸레와 싸리비를 이용해 거대한 캔버스에 검은 물감으로 추상 드로잉을 하고 (무속에서 망자를 저승길로 천도해주는) 베 가름으로 마무리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윤진섭퍼포먼스그룹을 창단하고 또 다른 퍼포먼스 <거대한 눈>을 연출했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영삼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발언이 영감이 됐다. 권력자 역할을 맡은 윤진섭은 이때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양복 차림으로 앉아 톱으로 닭의 목을 써는 시늉을 했다. 그 주변을 경호원 복장을 한 인물들이 서성일 때, 다른 한쪽에서는 온몸에 흰 칠을 한 인물들이 앞으로 더듬더듬 나아갔다. 독재 정권하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민주화 열망을 그려낸 작품이다. 198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89 청년작가전》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앙홀 2~3층 로비를 돌아다니며 ‘Stop Terrorism’ 선언문을 뿌리고, 중앙전시실 대형 유리창에 180개의 계란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에는 시위가 많아 정부와 시위대 사이의 충돌이 빈번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최루탄 대신 계란을 던지자며 폭력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그는 퍼포먼스에 천착하며 사회와 호흡하는 동시에 초기 한국 행위예술의 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다.

퍼포먼스 '거대한 눈' 현장, 1987년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퍼포먼스 '거대한 눈' 현장, 1987년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3. 평론가이자 큐레이터로: 신세대 미술과 단색화, 한국 현대 미술의 조형 언어를 발굴하다 

1990년 윤진섭은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라는 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된다. 서양미술사를 통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 과정을 살펴본 글이었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꽃을 피우며 탈장르, 혼성모방, 키치 등 새로운 조형 언어가 안착했다. 경제적으로도 호황을 누려 전국 각지에 미술관이 건립되었고 국제전도 여럿 개최됐다. IMF 사태로 인해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이때 대거 귀국한 유학생들과 함께 대안공간이 우후죽순 등장하며 되려 의식 변화를 가속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윤진섭의 당선작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응답하는 한편 앞으로 그의 활동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 글을 기점으로 예술가보다는 평론가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체성이 생겨난 기점인 셈이다.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 원고, 1990 동아일보 신춘문예-미술평론 수상, 원본은 동아일보 제출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 원고, 1990 동아일보 신춘문예-미술평론 수상, 원본은 동아일보 제출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992년에는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던 현대미술관에 들어가 정식으로 큐레이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사실 첫 전시 기획은 87년에 이미 이루어졌었다.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장벽을 넘어서》전으로 컴퓨터 아트,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등 온갖 장르를 망라한, 말 그대로 ‘장벽을 넘어선’ 전시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큐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한 때는 현대미술관에 채용된 이후다. 입사 직후 압구정 본점에서는 《구상회화의 재조명》시리즈를 진행했다. 2년에 걸쳐 진행된 장기 프로젝트로 구상 회화를 풍경화, 초현실주의, 풍자화, 인물화, 정물화의 다섯 카테고리로 나눠 다뤘다. 같은 시기 무역센터점에서는 포스트모던 미술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를 기획했다. 하지만 경영진이 전시가 너무 어렵다고 판단해 차용 미술을 다뤘던 《창작과 인용》전을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는 중단된다.

1994년 윤진섭은 「월간미술」의 청탁을 받아 ‘신세대미술 그 반항의 상상력’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그는 이 원고에서 신세대 미술 운동의 계보를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 작업이 있었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을 신세대 미술 1세대의 시작으로, 뮤지엄 그룹의 등장을 2세대의 시작으로 봤다. 이 글을 토대로 이듬해 《한국 현대 미술 신세대 흐름》과 《공간의 반란: 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67-95》도 기획하게 된다. 두 전시가 개최됐던 1995년에는 문화부의 주도로 ‘미술의 해’ 사업이 시행됐다. 91년부터 시작된 미술 시장의 개방으로 이즈음에는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한국을 많이 방문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95년에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설립되고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되면서 — 윤진섭은 이때 서성록과 조직위원 겸 큐레이터로 일했다 — 한국 미술은 빠르게 세계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위의 글과 전시는 세계화 추세 속에서 한국 현대 미술의 역사를 구축했던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했던 90년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전시는 《난장, 밀레니엄퍼포먼스 1999-2000》였다. 홍대 근처에 있던 씨어터 제로에서 99년 12월 31일 밤 10시에 시작해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진행됐다. 예산이 없는 프로젝트였음에도 이승택, 성능경 등 행위예술가 30여 명은 윤진섭의 초청에 기꺼이 응해줬다. 게릴라식으로 다양한 퍼포먼스가 이뤄지는 가운데 참여자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새천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윤진섭은 또 다른 기념비적 전시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을 담당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모노하가 인기를 끌자 한국에서도 단색화가 크게 유행했었다. 전시는 이 둘을 비교하며 단색화를 독자적 예술 운동으로 위치시키고 세계적 반열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그전까지 단색화의 공식 영어 명칭은 ‘Korean monochrome’이었으나 그는 이때 파격적으로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디지털 호모 루덴스》라는 제목으로 제3회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열었다. 게임과 놀이가 주제였던 이 전시에서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디지털 문화 속 예술의 치유 기능을 탐구했다. 2005년에는 동북아비평포럼을 개최해 ‘비평과 전시기획 사이’라는 제목의 국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큐레이터에게 점차 밀려나는 비평가의 입지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미술 비평의 위기에 대해 논한 자리였다. 이렇게 윤진섭은 신춘문예 당선 후 20여 년 간은 비평가 및 기획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미술 담론 형성에 앞장섰다.

2000 광주비엔날레 '人+間 :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2000-3.26-6.7), 도록 사진, 단색화(Dansaekhwa) 용어가 공식적으로 표기된 최초의 글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00 광주비엔날레 '人+間 :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2000-3.26-6.7), 도록 사진, 단색화(Dansaekhwa) 용어가 공식적으로 표기된 최초의 글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4. 크리큐라티스트, 80 아이덴티티와 공생하기

그는 2009년을 기점으로 다시 작가로 돌아온다. ‘크리큐라티스트’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크리큐라티스트’는 윤진섭이 직접 만든 단어로 ‘비평가(Critic), 기획자(Curator), 예술가(Artist)’를 조합한 말이다.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의 특별 프로젝트 ‘국제도자퍼포먼스: 세라믹 패션(Ceramic Passion)’의 예술감독이자 작가로 참여한 게 시발점이었다. 여기서 ‘왕치’라는 예명으로 방독면을 착용하고 <우주의 소리> 등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다중 자아의 탄생을 예고했다. 또한 그는 같은 해에 페이스북 계정을 열고 이곳에서도 여러 가지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왕치, Pajama Jun, Han Q, SoSo등 현재 80여 개에 달하는 이름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추사 김정희가 334개의 명호를 사용했듯이 다양한 이름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페이스북에서는 2011년에 요셉 보이스가 설립한 ‘자유국제대학’의 온라인 버전 ‘국제상상대학’ 그룹을 열어 세계 각국에 거주하는 이들을 연결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대중의 새 발견-누가 대중을 상상하는가》에 참가해 똥 드로잉을 발표하고 ‘똥 선언문’을 배포했다. 생태적 관점에서 똥의 역할에 주목하여 똥을 천대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2014년에는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기획한《예술과 성 (Art & Sex)》시리즈의 첫 전시 《Sex + Guilty Pleasure》오프닝 퍼포먼스를 맡았다. 이 작업에서는 가지와 조개로 요리를 해 남녀의 합일을 표현했다. 초기 작업보다 전위적 성격은 옅어졌지만, 두 작업 모두 사회통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윤진섭은 퍼포머로 활동하면서도 비평가로서 다양한 매체에 지속해서 글을 기고했다. 또《한국의 단색화》,《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등의 굵직한 전시도 여럿 개최했다. 그가 그간 생산해온 정체성들이 종합되며 이른바 ‘크리큐라티스트’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5. 놀이는 계속된다

‘크리큐라티스트’ 윤진섭의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 19 사태가 발발한 2020년부터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남산 산책을 다니면서 마주한 풍경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냈다. 색연필, 면봉, 북어포 등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 이 그림들은 현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기증돼 《아트 오브 도플갱어》 전이 개최되는 동기가 됐다. 윤진섭은 이 전시에서 죽어가는 예술을 수호하기 위해 ‘예술자유공생군’도 창단했다. 자신이 여태까지 만들어낸 80 여개의 분신과 관객들을 규합해 군대를 조직한 퍼포먼스다. 6월 2일부터는 갤러리 인덱스에서 개최한 사진전 《1+1, 타인들》에도 참여 중이다. 윤진섭은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하며 끊임없이 분신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 분신술 놀이의  종착지는 어디쯤일지 궁금하다.

 

<참고문헌>

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9> 윤진섭-새로운 시작,행위예술의 세계”, 「파이낸셜뉴스」, 2008년 6월 26일, https://www.fnnews.com/news/200806261546222698, 2021년 6월 6일 접속.

윤진섭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과 놀이”,「서울문화투데이」, 2019년 10월 17일,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10, 2021년 6월 6일 접속.

윤진섭,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4”,「서울문화투데이」, 2020년 9월 18일,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647, 2021년 6월 6일 접속.

윤진섭, “한국의 설치ㆍ실험미술-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아트프라이스」, 2004년 2월, http://www.daljin.com/column/2742,  2021년 6월 6일 접속.

윤진섭, “비평의 풍향”,「미술평단」, 2013년 여름호, http://www.daljin.com/column/10722, 2021년 6월 6일 접속.

“김노암의 윤진섭 인터뷰”, Cultural Conversations, http://www.cultconv.com/Korean/Conversations/Yoon_Jin_Sup/HTML5/testimonybrowser.html, 2021년 6월 6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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