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수궁가’가 끝나면 시작되는 이야기, 국립창극단 ‘귀토’
[공연 리뷰]‘수궁가’가 끝나면 시작되는 이야기, 국립창극단 ‘귀토’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6.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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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관 앞둔 해오름극장 첫 번째 시범공연
장단의 변형으로 재탄생한 고전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수궁가가 국립창극단을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귀토-토끼의 팔란’(이하 ‘귀토’)은 우화 판소리 ‘수궁가’의 시퀄(Sequel)이다. 수궁가의 삼재팔란(三災八難) 대목을 중심으로 하지만 고선웅 연출이 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새롭게 각색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약자와 강자 사이의 대립 구도 등 수궁가를 둘러싼 전형적 관념에서 탈피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 점이 이 작품의 차별성이다.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귀토’는 수궁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토끼인 토부(兎父)는 육지에 간을 두고 나왔다며 용왕을 속이고 살던 곳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극적인 상봉을 하지만, 기쁨을 누리려는 찰나 독수리에게 잡히고 토모(兎母) 역시 포수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토자(兎子)는 육지에서의 환난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그곳이 바로 수궁이다. 그는 토부를 태우고 세상으로 나왔다가, 미처 수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라를 만나 스스로 수궁으로 향하게 된다.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자라의 꼬임에 속아서가 아닌 스스로 용궁 행을 택하는 토자의 새로운 결단처럼, 작품 속 소리도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았다. ‘범피중류’ 대목은 그 중 단연 압권이다. 원작에서 느린 진양조의 장중한 소리로 표현되던 것을 ‘귀토’에서는 빠른 자진모리로 치환한다. 새로운 세상인 용궁으로 향하는 토자의 흥분과 설렘이 그대로 전해지는 대목이다. 

또한 7장 ‘망해가’ 장면은 소리와 무대 연출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생각에 잔뜩 부푼 토자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바다를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 파도는 철썩이며 발목에 스르륵 감긴다. 굿거리장단에 맞춰 단원들은 직접 파도 소리를 노래하며, 음악이 되고 무대 연출이 된다.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동물과 수중 생물만 등장하는 ‘귀토’는 과하지 않은 분장과 무채색의 의상을 화려하게 채우는 배우들의 소리와 움직임이 있어 더욱 빛났다. 자칫 아동극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 여백은 관객의 상상으로 채웠다. 아울러 극을 이끈 김준수(토자), 유태평양(자라)뿐 아니라 원작에 없던 새로운 캐릭터 토녀(민은경)와 용왕(윤석안), 주꾸미(최용석), 전기뱀장어(조유아)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극의 생기를 더했다. 

‘고고천변’, ‘상좌다툼’, ‘범 내려온다’ 등 익숙한 눈대목들도 참신하게 짰다. 그리스 신화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가 끼어드는가 하면 별안간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도 튀어나오는데, 이러한 장르의 뒤섞임이 혼란하지만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연출과 더불어 ‘귀토’의 무대 사용 역시 돋보인다.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해오름극장의 무대 시설을 여기저기서 뽐낼 법도 하지만 이태섭 무대연출가는 ‘현대로 초대된 전통’을 콘셉트로 삼아, 고담하고 청초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살렸다. 산중이나 수중을 설명하는 대단한 무대 장치는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최소한의 장치로 관객들에게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고자 했다. 1,500여 개의 각목을 촘촘히 이어 붙여 극장 전체를 언덕으로 만든 한편, 무대 바닥에 가로ㆍ세로 8m의 대형 LED 스크린을 설치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뤄냈다. 

‘귀토’는 어려움 끝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토끼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힘든 현실 속에서 꿈을 좇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고선웅 연출은 ‘수궁가’를 현대화하는 데 있어 동시대에 주효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았다. 언뜻 보면 이 작품은 그저 웃고 즐기도록 각색된 듯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틈새에는 미약한 존재를 대하는 연출의 연민과 부러지지 않고 제 모양을 찾아가는 신념이 숨겨져 있다.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공연 장면

공연의 마지막, 수십 명의 출연진이 다 함께 넘어서는 언덕에 달항아리가 보름달처럼 둥그렇게 떠오른다. 어려운 시기가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지만, 희망이 없다고 여겨 떠났던 곳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한 토자처럼 우리도 저 언덕을 다시 한번 넘을 수 있다고 ‘귀토’는 우리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