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창극 ‘귀토’, 고선웅이 주성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창극 ‘귀토’, 고선웅이 주성치!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1.06.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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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고선웅이 주성치다. 진작에 왜 몰랐을까? 주성치에 큰 관심이 없어서 몰랐나? 주성치를 안 좋아하는데, 고선웅은 왜 좋아했을까? 확실히 답한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창극이 없어서 좋았다. 이런 방식이라 함은, 스탠드업 코미디 (Stand-up comedy)와 슬랩스틱(slapstick)은 의 유기적 결합이다. 고선웅의 다른 작품은 일단 논외로 치자. 그가 만든 창극은 딱 그렇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2014), 홍보씨 (2017), 귀토(2021)는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엔 늘 주성치가 있었다. 주성치 또는 주성치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했다. ‘귀토’를 보니, 확연해진다. (2021. 6. 2 ~ 6. 국립극장 해오름) 

고선웅은 사이다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대사 중에는 톡 쏘는 맛이 있었다. 왜 이게 좋았을까? 재미가 있으니 당연히 좋았다. 어떤 재미인가? 흔히 판소리와 마당극 특유의 골계(滑稽)와 해학(諧謔)을, 고선웅 방식으로 풀어내는 재미였다. 능청스러움과 뻔뻔스러움을 용인하면서, 캐릭터의 엉뚱함과 황당함이 무척 재밌었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게 홍콩영화에서 두드러지고, 이게 주성치 영화의 핵심이 아닌가! 

귀토가 관객을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엉뚱하고, 황당함은 일단 개연성과는 무관하다. 거기에는 많은 말장난이 있다. ‘귀토’는 자라가 자는 장면으로 앞에 설정하고, 토끼(토자)는 수궁 음식은 ‘간이 안 맞다’고 얘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 대본작가와 광고 카피라이터와 같은 입장에서 대사를 채워간다. 아직은 ‘참을 수 있는’ 창극의 가벼움이지만, 끝까지 창극을 이렇게 다룬다면 정말 곤란하다. 

고선웅은 왜 창극을 선택했을까? 고선웅의 ‘비틀기’ 심리와 재주를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기에 그렇다. 장르가 일단 받쳐주고, 배우가 더욱 받쳐준다. 고선웅 안에 내재한 주성치를, 창극과 창극배우 이상으로 잘 구현해주긴 쉽지 않아 보인다. 

고선웅의 홍도(2014)에서 그의 저의는 여실히 드러났었다. 자신의 극단 마방진과 합류한 배우를 통해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에 오니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한방’에 다 채워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고선웅의 스타일은 이제 창극 또는 국립창극단에 의해서 확실하게 구축될 수 있다. 이제 고선웅은 스토리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자신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이 있지 않은가! 창극의 5대가를 비롯해서 공연되지 않는 ‘12마당’까지 존재하니, 이것이야말로 고선웅에게는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시스템, 스타일, 스토리의 삼박자가 조화롭게 이루면서, 지금까지의 세 작품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변강쇠가, 흥보가, 수궁가를 고선웅의 방식으로 만든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재밌으면 다 되는 건가? 역사적 의미, 시대적 사유, 당대적 소통. 이런 ‘먹물’과 같은 개념으로 그의 텍스트를 보려 하는 나는, 웃고 즐긴 관객들에게 지탄받아야 하나? 이렇게 접근하는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일까? 그에게 있어서 창극은 수단이지만 ‘본질’로 보이지 않는다. 설정이 ‘방식’이 되기엔 한계가 너무 보인다.

창극이라는 ‘장르적 본질’과 창극 특유의 ‘양식적 방식’이 있다. 시대에 따라서, 연출에 따라서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창극을 오래도록 지켜온 사람에겐 그것의 존재가치에 대한 엄위(嚴威)함을 그저 고개 숙이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고선웅은 아니다. 더 웃겨도 좋고, 더 울려도 좋다. 다만 그의 접근방식의 한계성이다. ‘수궁가’와 ‘귀토’의 관계가, 도신(賭神, 1989)이 있어서 도성(賭聖, 1990)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무대 위의 배우를 설정하는 방법 또한 그렇다. 김준수는 주윤발이 될 수 있는데, 고선웅은 김준수를 주성치로 보이게 하려고 힘을 기울인다. 

차라리 고선웅이 철저하게 타란티노이길 바란다. 킬 빌(Kill Bill, 2003)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처럼 오마주와 패러디가 더욱 철저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타 장르에 대한 재미와 연구에 반만이라도, 창극이라는 장르의 본질과 양식을 이해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구축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여주길 바란다. 

고선웅의 창극에선 ‘틀’이 보인다. 바람직한 게 등장시킨 용어와 개념은 아니다. 세 편을 보니 내용적 틀이 보인다. 실제 무대적 틀도 마찬가지다. ‘홍도’에서 확실하게 인기를 얻은 배우의 무대 바닥 걸어 다니기는, 극으로 온 스탠딩업 코메디의 깊지 않은 포장술로 보인다. 대개 무대 바닥을 통해서 설정한 ‘도형적 틀’은 앞으로 계속 사용한다면, 어린 시절의 사방치기나 팔방놀이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운명에 처할 수 있다. 

고선웅을 아직도 좋아한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능청스러운 순수함, 부산스러운 우울함. 이게 내가 고선웅을 좋아하고 바라는 것일 수 있다. 이걸 창극에서 계속 보고 싶지만, 지금과 같은 대본과 연출은 아니다. 

귀토의 부제는 ‘토끼의 팔란 (八難)’이다. ‘현명한 선웅씨’는 부제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면서 창극의 ‘시트콤(시추에이션 코메디)화’에 기여했고 덕을 봤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식은 이쯤해서 작별을 고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 또한 고선웅식으로 맺어볼까 한다. 흥보가의 ‘텅텅텅’에 한 사람의 평자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귀토의 ‘탕탕탕’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재미에 동승(同乘)했다. 만약 앞으로 ‘탈탈탈’이 나온다면, 그 땐 바닥까지 본 기분을 될지 모르겠다. 나의 평자(評者)적 우려가 한낱 기우가 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