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예술 행정인을 위한 변명
[장석류의 예술로(路)] 예술 행정인을 위한 변명
  • 장석류 문화정책연구자(행정학 Ph.D)/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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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문화정책연구자(행정학 Ph.D)/ 칼럼니스트

그동안 본 코너를 통해 행정이 문화예술을 만났을 때, 좋은 행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행정에 대해 다소 비판적 논조로 기고를 해왔다. 그런데 반대로 행정인 혹은 기획인은 예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예술인들은 권리를 주장하고, 행정인과 기획인은 권리 주장을 들어야 하는 대상으로 나눠진 것 같아요. 그것을 듣고 또 들어주면서 상처받고 의욕이 상실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러한 진술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국·공립극장, 지역문화재단 담당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업무에서 번 아웃을 경험하면서, 예술인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는 업무로 옮겨달라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행정인도 예술인처럼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 기획인과 행정인이 예술인과의 접점에서 직무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는 맥락은 무엇일까,

예술인이 직업 활동의 보람을 기획인 혹은 행정인의 성장을 통해 느낀다고 대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술인은 기획인과 행정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직업적 속성을 갖고 있다. 또한 계층제 조직에서 받는 구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예술인이 인식하는 행정인은 지원 업무가 일인 사람이고, 그것 때문에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마운 기획인 혹은 행정인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예술도 잘 모르는 ‘사무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기획인과 행정인은 자신의 직무에 대한 보람을 함께한 예술인의 성취 혹은 성장을 통해 느끼는 경우가 많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는 예술인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직접적인 인정을 관객 혹은 고객들로부터 받는다. 기획인과 행정인은 직접 박수를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함께 협업했던 예술인이 박수받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을 무대 뒤에 있는 뒷광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들도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인을 짝사랑하지만, 예술인들로부터 그 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예술인의 권리 주장을 듣기만 해야 하는 휴전선 너머에 있는 ‘사무실 사람’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공극장에서 외부 예술가 중심의 공동제작을 내부 기획PD가 함께 할 경우, 내부 기획인은 해당 작품을 내 것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외부 예술가는 내부 기획인을 함께 할 파트너로 대하기보다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무실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행정적으로 지원금 혹은 제작비만 잘 보조해주었으면 한다. 선을 긋고 들어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원인을 얘기하면, 다시 행정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가지고 얘기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인이 한정된 경험사례로 ‘사무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너무 단순하게 포괄적으로 규정 지어버리면, 제대로 일하려는 기획인과 행정인의 직업동기와 소중한 역량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행정인에게도 좋지 않지만, 예술인에게도 좋지 않다.

“우리는 상위조직의 지침을 받아서 운영되잖아요. 저는 그런 것들을 따라야 하는 조직의 일원인데, 예술인들은 대개 유연한 방식을 원해요. 내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침을 따라야 하는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저도 상위조직과 싸우기도 해요. 이 사업이 이렇게 잘못되었다고 설득하러 가지만, 그게 안 되면 저도 안 된다고 얘기를 해야 해요. 사표라도 내야 할까요” 위의 상황은 블랙리스트가 작동된 윤리적 문제 상황이 아니다. 지원예산의 정산 지침과 운영 방향성에 대한 언급이었다. 사실 나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지만, 유체이탈 화법으로 내 입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을 때, 현장의 행정인도 힘이 든다. 그런 날은 스스로가 무기력해서 술 한잔 털어 넣지만, 예술인에게 마음을 털어놓기는 힘들다. 그 과정에서 욕을 많이 먹어 안주를 따로 먹을 필요도 없다. 이러한 상황은 실무 행정인과 예술인의 생각의 차이로 인한 충돌이라기 보다는 예술인이 행정시스템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에 있다.

e-나라도움의 경우도 기재부에서 도입하여 진행되었다. 기재부의 입장에서는 왜 예술인만 유독 관대하게 해주냐, 과학자, 교육자, 기업인들도 다 e-나라도움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데, 예술인만 불평이냐는 논리다. 행정인 중에서도 문화를 선택하고, 예술 분야를 택한 사람들은 문화예술 분야를 위해 정책의 최전방에서 싸운다. 예술인을 위해 부처 간 회의에서 설득하고, 국회 입법 활동에서도 그들을 대변하려 한다. 다른 분야 행정인은 문화예술에 관심도 적고, 자기 분야가 중요하다. 예술 행정은 다른 분야 행정보다 가진 힘이 작은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뒤에 있는 예술인을 생각하면서 하나라도 더 해보려는 행정인도 많다. 개성 있는 예술인은 잘 보이지만, 조직에 녹아있는 괜찮은 행정인은 조직의 리더가 아닌 이상 개별 인터뷰를 하기도 어렵고,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술인이 생각하는 자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공공의 재정이 투입되는 영역에서는 난 예술인이니 자유롭게 하겠다고 주장만 할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를 가진 미학적 결정권과 창작의 과정에서 예술가로서 갖는 권한은 필요하고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예술가가 언제나 예술가는 아니잖아요. 예술을 할 때, 예술가지. 그렇지 않을 때는 사회인인거죠. 같은 사람인거지, 부모 자식 간에 난 예술가요라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예술가의 맥락에 있는지, 친구의 맥락에 있는지, 맥락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게 기본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삶에 있어 기본적인 책무, 함께 할 때 지켜줘야 할 것은 지켜줘야 하는 것 같아요.” 모 예술단체 대표께서 인터뷰 진술로 언급했던 내용이다. 행정인이 공공의 공복이지 특별한 벼슬이 아닌 것처럼, 예술인이라는 직업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공동의 공유지를 함께 사용할 때도 사회적 책무가 없는 유아독존(唯我獨尊)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블랙리스트 이후 상호 간의 신뢰가 많이 낮아졌다. 예술이 행정에게 비판적인 것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지만, 예술을 선택한 행정인을 싸잡아 예술도 모르는 신뢰하기 어려운 ‘사무실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분야가 아닌, 예술의 뒷면에 있는 달이다. 그들도 예술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