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안중근의 옥중서간은 어디에?
[단독]안중근의 옥중서간은 어디에?
  • 도쿄가쿠게이대학 이수경 교수
  • 승인 2009.12.2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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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교수...일제강점 100년에 기억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생각하며…

 해외 교포의 삶이란 다양한 문화와 좌충우돌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힘들고 벅찬 생활이 된다는 것은 굳

▲필자 이수경 교수
이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나마 편하게 보이는 직업이 대학 교수나 연구자들이라 하겠는데, 알고보면 해외의 대학에서 교수를 한다는 것은 어느새 외교관 역할까지 해야 하니 참으로 중책이라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교원 양성대학의 한국인 교수기에 다문화 시대를 이끄는 교사 양성에 대한 책임감과 그에 걸맞는 연구를 하면서, 다양한 문화 사회를 직시한 국제인권론이나 한일 근대사, 다문화 교육, 한국어 교육 등, 상당히 민감한 부분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들의 논문 지도를 해야 하기에 밤 잠을 설치며 철야에 가까운 생활을 벌써 몇 년째나 하고 있다.

국내의 지인 교수들은 용케 연명한다며, 왜 그렇게 힘든 팔자를 고르냐고 묻는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참 편하게 뱉는 말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왜냐면, 한일 근대사론을 맡고 있으니 당연히 독도 문제도 연구해야 하고, 종군 위안부 문제나 일제 강점기때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도, 수업 내용상 동아시아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몇 개국 관련을 해야만 하기에, 그야말로 매일 매일 자극받는 전사같은 생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일교포 문제와 최근의 뉴커머 문제 등, 그야말로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정부 현안까지 고심해야 한다. 일본은 합리적 이론을 뒷받침하는 자료증빙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사회이다. 학생들도 설득력 없는 수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교사에게는 가장 비참한 대답이기에, 교육의 자료인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현장 답사, 증언 듣기 등을 통해서 얻은 1급 자료만이 설득력이 있다.

또한 감정적 용어를 배제하고, 담담하게 제시된 자료제시와 냉철한 연구분석이어야만 가치를 평가받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과 항상 마주하면서도 감정 표출을 쉬이 하지 못한다. 억울하지만 제대로 표현할 길을 못 찾아 억장이 무너져도 운명 탓으로만 돌려 온 강점기때의 희생자들이나 그 가족들을 보다보면 연구자, 교수라는 자리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일 수 밖에 없는 힘든 직업임을 느낄 때가 많다.

더구나 제대로 된 제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24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필자는 시간만 나면 답사를 다니며 자료찾는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우리 땅은 물론이고, 일본 땅도 몇 군데 빼고는 지독히도 돌아다닌 편이다. 그래서 각 지역을 잘 아는 편이고, 탄광이나 공동묘지 등도 제자들과 지겹게 쫓아 다녀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어느정도 머리 속에 들어있다. 그런 필자지만 최근, 소풍때 보물찾기 보다 더 힘든, 그래서 집착이 더해가는 수수께끼의 자료가 어느 땅에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클라르테 운동 기관지 클라르테 창간호.파리의 개인 박물관 소장

필자는 지난 15년간 국제 지식인 문화운동인 클라르테 운동과 관련해서 연구를 해 오고 있다.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던 41세의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는 최전방으로 자진해서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본 것은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지옥이었고, [두 개의 군대가 살상하는 것은 하나의 큰 군대가 자폭하는 것]임을 깨닫고 전쟁의 실태를 고발하여, 인류의 모든 이들에게 전쟁의 무의미함을 자각시키는게 진정한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클라르테(빛, 광명, 깨달음, 자각)』]란 책과 더불어 피카소나 아인슈타인, 러셀, 마티스 등이 참가한 클라르테 문화운동을 결성하였고, 지식인의 실천적 행동은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준다. 클라르테 운동의 취지와 한일사회, 러시아, 중국등의 관련성을 추구한게 필자의 연구내용이다.

일본에서는 프랑스 유학중에 클라르테 운동에 관련되었다가 일본에 귀국후, 국제주의 문학운동으로 『씨뿌리는 사람』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고마키 오우미였다. 당연히 이 사람도 연구과제의 대상이었기에 주변 유족들과 친해지다보니 그분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 분의 자제분들이 필자에게 [예전에 우리 집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아버지 한테 적어서 보낸 편지가 있었고, 아버지도 그를 존경하여 그가 사형된 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있어요. 그 편지는 어느 신문사에서 빌려달라고 해서 가져갔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답니다.]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하셨다.

▲고마키 오우미의 자서전에 적힌 안중근 서간 설명부분
필자는 당연히 어느 신문사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바람에 더이상 연세드신 노인에게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사실 후회를 하고 있다. 왜냐면, 안중근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동양평화론을 일본의 젊은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부탁을 했으며, 누가 안중근에게 고마키 오우미의 아버지를 소개했을까? 어느 신문사(일본 신문사 였을 가능성)의 누가 그것을 알고 가져가서, 그 뒤, 공개조차 하지 않을까??? 의문이 커갈수록 그 때 억지로라도 물어볼걸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물론 이런 사실은 필자가 연구과정에서 알게된 사실이고, 필자가 발표한 책이나 학회발표 외에는 한국사회는 물론 일본사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정보 제공도 얻을 수 있는 확률은 적다. 안중근의 편지가 나온다면 당시의 감옥에서의 그의 심경은 물론이고, 그가 생전에 일본인 국회의원에게 토로했던 사상도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길림성 방천에 있는 안중근 장군 유적지

안중근이 감옥에서 편지를 보낸 고마키 오우미의 아버지인 오우미야 에이지는 1874년에 7남5녀의 아홉번 째 아이로 일본의 아키타현(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부잣집이던 오우미야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고, 그 뒤, 현의원, 대의사(현,국회의원) 등을 하면서 전기, 석유, 광산 사업 개발과 현지 신용조합, 아키타 은행 등을 창립하는 등, 정치 경제적 면에서 지방의 명사였다.

1904년에 만 30세로 최연소 대의사로 당선된 그는 1908년의 제10회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전도양양한 정치가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그를 누군가에게서 듣고 일본의 미래라고 생각하여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부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아들로 파리 유학 후, 일본에서 『씨 뿌리는 사람』 발행과 더불어 국제주의 문학운동을 전개하고, 호세이 대학교 교수를 했던 고마키 오우미의 자서전에는 안중근 관련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조선인 안중근의 옥중에서 보낸 글이 어떤 경로로 우리 집에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그(안중근)는 조선의 국사(영웅)라고 안중근을 지사(志士, 우국지사) 로서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버지는 자유주의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쿠류카이(黑龍會); 초우익 보수단체]의 우치다 료헤이등과 친교가 있었던 면이 있는 모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안중근은 사형이 되기 전, 사람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 왔고, 우리 식구들은 그가 처형된 날, 불단(집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불교식 제단) 앞에 향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小牧近江『ある現代史(어느 현대사)』1965년,16쪽)

그리고, 고인이 된 고마키씨 장녀 기리야마씨도 그 편지를 보았고, 안중근의 제삿날이 오면 할아버지는 안중근을 기리며 향을 피웠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렇기에 안중근이 보낸 글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일본의 어느 신문사의 고위간부가 갖고 갔을(혹은 유족들이 어떤 연유로 양보 했을) 가능성도 높다. 왜냐면 이 가족들도 모두 대학교수나 일본의 고위급 공무원직을 했던 집이기에 일반 취재 기자가 달라고 해서 쉽게 내 줄 수 있을 정도로 물건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분명 납득할만한 설득 혹은 거래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쉽사리 귀중한 편지를 건네주지 않았을 것이다.

몇 일 전, 한국의 국제 심포지움에서 알게 된 모 교수가 필자의 연구서를 보고서 연락이 왔지만, 필자 역시 그 이상을 모르기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반 언론이 갖고 갔다면 벌써 공표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 아직도 공표되고 있지 않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고, 혹시 한일병합 100년이란 하나의 역사 청산의 주요시기에 발표가 되어주지 않나 하는 기대도 없지 않다. 사라진 안중근 살해 순간의 동영상 필름과 더불어 이 편지는 중요한 근대사 자료이기에 세상의 빛을 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필자가 또 하나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몇 년 전부터 계속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연구중이기에, 살해 지시를 한 중요인물들의 고향이나 관련 주요 서고, 자료관, 도서관 문서실 등을 주시하는 중이지만, 명성황후의 특징이 찍혀진 사진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되려 명성황후 시기의 주요 일본인 왕족이나 정치가들 혹은 당시의 일반 서민들의 사진은 야마구치 현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데라우치 문고 등에서 많이 볼 기회는 있었다. 미우라 고로의 아내가 직접 알현을 했고, 당시 왕궁습격을 감행하며 주된 암살자들에게 내 보인 명성황후의 사진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의아스럽고,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중국 길림성 방천에 있는 안중근 장군 기거지

2009년 12월 4일에 교토 조선 초급학교에 [재특회]-(본지 12월20일자 ' 이수경 교수의 일본속보 참조)라는 우익들 단체가 습격을 하여 초등학교 아이들이 공포속에 두려워하며 학교 가기를 꺼려한다는 가슴아픈 일이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회자되는 독도 문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군국주의의 희생자가 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당시 댓가가 99엔이란 판결로 또다시 지친 삶을 우롱하는 비인권적 태도를 자행하고 있는 일본의 전후 역사인식을 볼 때, 아직도 불행한 역사를 넘어서기에는 참으로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제대로 찾아서 퍼즐처럼 꿰맞춰 놓아야 균형잡힌 역사청산이 가능하기에 그런 것들을 없는 시간 쪼개서 찾아야 하니, 우리들의 사명이 참으로 많기도 하고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정부의 대대적 협력이 있다면 훨씬 편할 것 같기도 하다.

2010년 8월이 오면 100년 전의 아픔이 더더욱 가슴을 저밀겠지만, 차분하게 1차 자료 수집에 노력하면서, 개인적 연구 수준을 넘어서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은 내일이라는 사회의 기능을 건전하게 만드는 윤활류 역할을 명확히 하며, 자료의 공동 분석, 공동 연구 등을 통하여 과거의 우행이 뿌려놓은 아픔의 흔적들을 하나씩 치유하는 다가서기에 앞장서는 의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이기에 냉철해 질 수 있고, 과거의 역사이기에 향후 그런 불행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지혜의 의식을 공유하며, 미래지향적 손잡기를 해야 한다.

잘못된 민족주의, 지나친 자국애에서 파생되는 배타주의 이기성으로는 결코 역사청산은 불가능해진다. 한국인 조선인 다 쫓아내겠다고 외치는 우익과 동질이 된다면 너무 초라한 사회가 되는게 아닐까? 이렇게 지구 전체 규모로 인류가 대이동을 하고 있는 시대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되려 고립하여 자멸하는 길이 되기에, 우리는 앞을 나아가기 위한 과거 청산도, 현실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귀중한 자료들을 사회에 기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식이 자신과 사회를 잇는 보람있는 선행임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하루속히 안중근 옥중서간을 보고싶고, 근대사에서 은폐된 많은 극비 서류들도 이제는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아직도 서로 확인해야 할 과제가 많은 한일 관계이다. 신중하면서도 배려하는 정치 외교적 대응은 물론, 기업가들의 사회적 역할의 인식, 풀뿌리 시민단체의 절도있는 연대의식, 그리고, 청소년 교류를 통한 다문화 이해교육과 자기 문화 알기, 연구자들의 성실하고 정직한 연구 자세를 통해 얻어진 내용들을 미래를 위한 연구 자료로 삼고, 내일을 향하는 이정표를 만드는데 다양한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성숙된 모습으로 동북아시아의 규범을 만들어야만 아시아 공동체라는 말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각국의 수장은 물론 시민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