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훈민정음 금속활자ㆍ자동 물시계" 공평동 땅 속서 쏟아져나와
"세종시대 훈민정음 금속활자ㆍ자동 물시계" 공평동 땅 속서 쏟아져나와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1.06.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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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전해진 세조대 금속활자보다 20년 앞서
기록만으로 존재했던 주ㆍ야간 천문시계 실체 나와
세종대 과학기술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발굴
발굴 지역 조선 전기 한양의 경제문화중심지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공평동 땅속에서 ‘훈민정음’ 금속활자를 비롯한 세종시대 중요 과학유물들이 대량 발굴됐다. 발굴 유적은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의 금속 유물이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재)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이 발굴조사하고 있는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에서 발견한 항아리 속에 있는 유물들이다.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수도문물연구원은 16세기 건물터 땅 속에서 도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이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을 확인하고 세척하면서 연구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약돌 모양의 유물 몇 개가 금속 활자로 드러난 것이다. 이번 발굴 유물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 금속 활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다. 이번 발굴은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15세기에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 소자 (사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세종시대 금속활자, 다양한 활자 종류와 15세기 한정 표기법 확인할 수 있어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돼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韻書),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 ㅭ, ㆆ, ㅸ 등 기록)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점,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모두 출토된 점 등은 최초의 사례인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 외에도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문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출토됐다. 한문 사이에 자주 쓰는 한글토씨(‘이며’,‘이고’ 등)를 인쇄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활자로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해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는 세조 ‘을해자(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였는데,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는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로 을해자보다 20년 이른 활자다.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들의 종류가 다양해 조선전기 인쇄본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여러 활자들의 실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의 인쇄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한글 연주활자 (사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자동 물시계의 주전,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종대 과학기술 실체 확인해

금속활자와 함께 발굴된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은 잘게 잘려진 상태로 출토됐다. 발굴된 동제품의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 유물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 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

많은 유물을 담고 있었던 항아리 옆에서는 주․야간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주요부품들이 출토됐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되고. 해가 없는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용도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됐다. 현존하는 자료 없이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그 실체를 확인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물시계 중요 부품인 주전, 기록만 전해지다 실체는 처음 확인됐다(사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명량대첩 해역서 확인됐던 제작자 ‘장인 희손’ 이름 다시 한 번 나와

발굴 지역 최상부에서 확인된 소형화기 총통(총구에 화약과 철환(총알)을 장전하고 손으로 불씨를 점화해 발사하는 무기)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으로 총 8점이다. 조사 결과, 완형의 총통을 고의적으로 절단한 후 묻은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 크기이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계미(癸未)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됐다.

제작자로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이 기록돼 잇는데, 이 가운데 장인 희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이다. 만력 무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함께 발굴된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됐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도 있다.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했다. 종신의 상단에‘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는 예서체 명문으로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실발원 동종에는 주로 해서체가 사용돼 기존 발굴된 왕실발원 동종과는 차이점이 있다.

▲발굴된 승자총통(사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 총 6개의 문화층 발굴

이번 발굴이 진행된 지역은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조선 전기까지는 한성부 중부(中部) 견평방(한양 도성내 경제문화중심지)에 속한다. 주변에 관청인 의금부(義禁府)와 전의감(典醫監/의료행정과 의학교육 관장 관청)을 비롯해 왕실의 궁가인 순화궁(順和宮), 죽동궁(竹洞宮) 등이 위치, 남쪽으로는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있었던 운종가(雲從街)가 위치했던 곳이다.

조사 결과 해당 발굴 지역은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총 6개의 문화층(2~7층)이 확인됐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층위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6층(16세기 중심)에 해당되며, 각종 건물지 유구를 비롯해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도 같이 확인됐다.

▲발굴 현장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와 동종 모습 (사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공개된 유물들 중 금속활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 항아리 옆에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사용, 폐기 시점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으로 추정해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해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앞으로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으로 분야별 연구가 진행된다면, 조선 시대 전기, 더 나아가 세종 연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