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스물두 살의 유서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스물두 살의 유서
  • 윤이현
  • 승인 2021.07.08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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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매년 유서를 쓰므로 놀라지 않길 바라며.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세상에 나온 지 오늘로 정확히 250개월이 되었습니다. 아기 때 저는 입에 들어온 것을 씹고 삼키다가 때가 되면 배출하는 기본적인 본능만 탑재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바보였습니다. 그러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사탕 굴리듯 웅얼거려보다가 점차 할 수 있는 말이 늘어났습니다. 하늘에 뜬 거대하게 빛나는 구슬을 해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것을 태양 또는 해라고 부를 수 있을 즈음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던져진 낯선 환경에서 저는 생존하기 위해 악을 써야 했습니다. 낯가림 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아이는 그렇게 조용하게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첫날, 몸집보다 큰 분홍색 미키마우스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육교에 올랐습니다. 하루 휴가를 낸 엄마는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제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학교는 추웠고, 교실은 컸으며 선생님은 꽤 다정한 인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의외로 저는 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불량식품을 나눠 먹으며 굴렁쇠를 돌리고, 콩주머니를 던지다 보면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기 싫었던 것, 우울해 보이는 엄마와 아빠의 표정을 살피며 두 분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 외에 큰 고민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두 자릿수의 나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큰 언니는 대학을 갔고, 작은 언니는 수험생이었으므로 집안 분위기가 늘 긴장 상태였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 사정과는 다르게 저는 나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방과 후에는 좋은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고 논설문을 쓰는 과외를 받았고, 음악학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가야금 따위를 배울 수 있었으니, 그 시절의 저는 꽤 행운아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멀리서 그 친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작은 언니가 대학을 가던 해에 저는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언니가 간호학을 전공하는 동안, 저는 그림을 배우러 작가 선생님의 화실과 홍대의 대입학원에 다녔습니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석고상 소묘를 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고독해짐을 느꼈습니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서글퍼졌고, 제 재능에 끊임없는 의심이 이어졌습니다. 이른 나이에 무언가를 제대로 배워나간다는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 있었기 때문에 티는 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다만, 매일 어깨와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습니다. 이 시기에 저의 짝사랑도 끝났습니다. 2년간의 열렬한 구애 그리고 마침내 종지부. 물감통에 물을 채우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요. 입시에 집중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상처는 서서히 아물고 살만해졌습니다. 그때쯤 사춘기가 왔고,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목 주변에 틱장애가 생겼고, 미술학원에서 실기평가를 받을 때면 긴장감에 목과 머리가 제 의지와는 다르게 좌우로 떨려왔습니다.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저는 밥을 숨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나 항상 불안에 쫓겼습니다. 1등과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즐기며 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달리 저는 괴롭게 한 장 한 장을 그려나갔습니다. 연필로 배경을 까맣게 칠할 때면 그것이 왠지 제 미래처럼 느껴져 구역질이 나기도 했습니다. 학원 화장실에 달려가 한참 신 침을 뱉어내고서야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 까만 홍대의 밤하늘과 음악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부모님의 뜻과 모든 것을 등진 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입시가 눈앞에 닥쳐오자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는데, 성적도 좋지 못한 주제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자기 학대가 이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사회 선생님이 건강상의 문제로 학교에 출근하지 못하자, 빈 시간표를 채우러 윤리 선생님이 대신 들어오셨습니다. 선생님은 50분 동안 희망적인 영상들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적과 관계없는 수업인지라 아이들은 모두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수업 시간에 유일하게 저만 깨어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독서실을 끊어 그날부터 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차고 즐거운 일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것도요.

글과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 빠진 지 어느덧 5.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고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은 아직 가지 못했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가요? 스무 살 때부터 쉬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기술도 많고, 제 안에 잠재된 능력도 알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심리를 포착하고 그것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꽤 탁월한 재능이 있는 모양입니다. 돈 관리도 잘하는 편이고, 제빵과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가끔 그림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쉬지 않습니다. 몇 번의 연애를 통해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도 알 수 있었고, 헤어진 누군가의 앞날을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아픈 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쟁이로 태어나 지금의 것들을 알고 익히기까지 참 많이 넘어졌고 일어서려고 했던 것이 두려웠습니다만, 저는 결국 멋지게 성장했습니다.

스물두 살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삶은 결국 자신을 알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여정의 지평선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굽어진 선, 점선, 한없이 밑으로 추락하는 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힘든 여정이 되겠지요. 언젠가 선이 끊길 때가 되면 저는 땅에 묻어지게 될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를 예측할 수 없어서 이렇게나마 의식이 있을 때 매년 글을 적어봅니다.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요약한 이 글을요. 돌이켜보니 후회도 미련도 없는 22년이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겪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걸 테니까요. 혹시 제가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았던 편지와 이 글이 꼭 저의 육신과 함께 포개져 땅에 묻어지면 좋겠습니다.

 

21년을 영채로 살다가 1년을 이현으로 산 사람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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