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비평학술) 수상자 이근수 교수 “예술가를 위로하는 것이 평론가의 일”
[Special Interview]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비평학술) 수상자 이근수 교수 “예술가를 위로하는 것이 평론가의 일”
  • 이은영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7.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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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정확하게 보고 비판과 칭찬하는 것
평론가는 예술 자체 목적하는 평론 해야. 이익 도모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돼
무용의 객관적ㆍ종합적 평가 위해 ‘10점 평가시스템’ 고안
나만의 스타일 연구 필요…‘진짜 평론가’ 위한 강의 하고파
현대무용ㆍ한국무용, 장르적 구분에서 벗어나 무용가의 움직임에 맡겨야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진보연 기자]"오랜 시간 동안, 당신의 칭찬만큼 나에게 기쁨을 준 건 없었습니다. 칭찬이 나오지 않으면, 난 당신이 인색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느꼈고, 당신 그늘에서 벗어나겠다고, 볼로디아를 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당신 논리를 이해하고 내 논리로 만들어 갔지요."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비평가(el critico)>는 성공을 거둔 작가가 비평가를 찾아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평가는 냉정한 자신의 평가를 유지하려 하고, 작가는 비평가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면서 둘은 날카롭게 충돌한다. 

▲연극 ‘비평가’ 공연 모습(제공=극단 신작로)
▲연극 ‘비평가’ 공연 모습(제공=극단 신작로)

비평가와 작가는 밀도 높은 논쟁 속에서 자에 대한 입장 차이를 견지하고, 여기에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감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둘 사이의 대화는 긴장도 높은 심리적, 논쟁적 드라마를 형성한다. 젊은 작가 스카르파의 연극은 모든 사람에게 찬사를 받으며 끝났지만, 비평가 볼로디아는 스카르파를 향해 가혹한 비평을 쏟아낸다. 스카르파는 그의 비평을 증오하면서도 그 비평을 1천 번도 더 읽고 볼로디아의 평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무대에서 나름의 작품을 만들며 진실을 위해 애쓴다. 그리고 비평가 같은 권위가 있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비평가의 처지에 선 이들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언어의 무게를 매일 저울에 달아가며 산다. 20여 년간 무용 평론을 이어오고 있는 이근수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예술가를 위로하는’ 평론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정직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근수 교수는 무용 작품을 1년에 100회 이상 접한다. 거기에 그가 섭렵한 무용 관련 독서량도 방대하다. 외국에 교환 교수 등으로 나갈 때도 꼭 무용이 있는 곳을 택했다. 그 모든 것은 오로지 ‘무용’ 공부를 위해서다. 현지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토론을 거치며, 이론의 토대를 차곡차곡 쌓았다. 서양에서 배운 서양 춤 이론에, 태생적으로 한국인이기에 한국의 전통춤과 서양 무용에 대한 산 지식과 평가의 잣대, 그리고 좋은 작품에 빠져드는 감성을 갖췄다. 무용 관련 저서도 두 권이나 낸 그는, 명실공히 ‘전문성’을 지닌 무용 평론가로서 지난 2013년부터 현재까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서 무용평론을 위한 글쓰기 기법, 무용계 화두, 다양한 공연에 대한 감상 및 평가 등을 전하고 있다.

그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에서 상학사(B.S),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에서 회계학석사(M.A.S), 성균관대학교에서 경영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경희대학교 회계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1대 경영대학원장(1998.2~2002.1), 경희사이버대학교 부총장, 한국회계학회장을 역임했다. 한국과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갖고 있으며 공인회계사회 국제연구위원장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iversity of North Carolina) 및 페어리 디킨슨대학(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객원교수를 지냈다. 특히 경희대에서 30년을 근속하는 동안 한국회계학회 회장을 지냈고 경영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설립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용평론가 이근수 경희대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이근수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교수는 “모든 예술 분야 가운데 평론이 가장 필요한 분야는 바로 무용”이라며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을 그들의 노력이 현장에서 소멸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한다. 일시적이고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무용 예술을 기록하고 가치를 보존하고자 사명감을 가지고 무용평론에 꾸준히 임하고 있다. 더불어, 보다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평가를 위한 ‘무용공연요소별 10점 평가시스템’을 고안하여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전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평론가는 예술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평론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지식이나 권위를 자랑하거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론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용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그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으로 오랜 시간 ‘정직한’ 무용 평론을 이어가는 이근수 교수를 만나 무용과 평론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건네봤다. 

제12회 문화대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수상 당시 무용 평론을 꽤 오래 해온 가운데 첫 수상임을 밝히며, 무용 평단의 폐쇄성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수상 이후 변화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특별히 변화된 것은 없다. 그리고 내가 무용 평단에 가진 생각 또한 여전히 같다. 평론가가 무용가에 기생을 하면 안 된다. 평론은 권력이 아니다. 무용가의 예술 세계를 관찰하고 통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우위에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많은 평론가가 이 지점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지는 모르겠지만, 평론가는 예술가를 위로해 줘야 하고 예술가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끝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예술가를 ‘위로하는’ 글이라는 게 마냥 듣기 좋은 칭찬만 늘어놓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위로는 정확하게 보고 비판할 건 비판하고 칭찬할 건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예술가들이 평론가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까 싶다. 

회계학을 전공했음에도 무용 평론을 한다는 건 국내에선 매우 이례적이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지만, 무용 평론을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된 건 경희대학교 대학원 교학부장을 맡게 된 19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학부는 석ㆍ박사 입학부터 졸업, 장학생 등 대학의 모든 학과 커리큘럼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경희대는 음악ㆍ미술ㆍ무용 등 모든 예술 분야를 아우르는 대학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관심과 지식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 

모든 학과를 공평하게 챙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예술 분야ㆍ장르 따질 것 없이 참 많은 공연을 관람했는데 그 중 공연 횟수가 제일 적은 건 단연 무용이었다. 그리고 관객 수도 다른 공연에 비해 적었다.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텐데 정작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이들의 예술이 1시간 남짓한 공연으로 소멸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특히 과거에는 지금처럼 영상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용 기록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때부터 대학 신문이나 일반 잡지에 무용 관련 글을 싣기 시작했다. 처음엔 평론이라기보단 에세이 형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1994년에 미국으로 일 년 간 교환 교수를 나가게 됐다. 그런데 마침 간 대학에 무용강의가 있었고, 대학 도서관에 서적, 비디오 등 무용에 대한 자료가 방대했다. 회계학 교수로서 나가 있었지만, 업무 외 시간은 무용에만 매진했다. 혹자들은 무용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의 글에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995년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이라 불릴 만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경희대 김말애 교수의 <애장터>를 평론한 글을 ‘춤지’에 실은 것을 시작으로, ‘몸지’, ‘춤과 사람들’과 같은 잡지사에서 칼럼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무용평론가 이근수 교수의 저서(왼쪽부터)무용가에게 보내는 편지(1999), 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2010)
▲무용평론가 이근수 교수의 저서(왼쪽부터)무용가에게 보내는 편지(1999), 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2010)

그동안 써온 글의 양이 상당할 것 같다.

그동안 전문지에 발표했던 무용 관련 글을 한데 모아 지난 1999년 ‘무용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0년에 두 번째 책 ‘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를 발간했다. 내 나름의 기준으로 선정한 우리 시대 무용 예술가 30인을 소개하고, 나아가 무용계 현상을 진단하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10년 단위로 책을 내는 것이 원래 나의 계획이었다. 길다면 긴 10년이란 시간 동안, 무용계 안에서 다양한 흐름의 변화가 있을 것이고 성쇠가 이뤄지지 않겠나.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10년 동안 최소한 리뷰를 200편은 쓸 것이다. 1년에 매달 1편씩만 써도 120편이니 말이다. 그렇게 쓴 글들을 모으면 책 1권이 되니, 2020년 정도에 새로운 책을 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무대에 오르는 공연 자체가 현저히 줄어서, 출간 작업도 보류 중인 상태다. 

잘 쓴 평론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현재 대학에서 평론을 가르치고, 배우는 수업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평론이 어때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지금 나오는 글들을 보면 그렇다. 다른 이들은 나의 글을 두고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3회에 걸쳐 교환교수로 나가 있는 동안 여러 평론가들을 만났고 공연들을 보았다. 그들은 ‘평론가가 쓰는 글의 90%는 작품에 대한 설명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나도 이 부분에 동의한다. 작품에 대한 평론, 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나머지 10%다. 아울러 작품을 만든 창작자에 대한 배경이라든지 그의 과거 작품들의 성향, 과거의 작품과 지금 이 작품과의 연관성 등이 짧은 글 안에 다 들어와야 한다. 작품의 스토리와 주제를 바탕으로 이에 대한 지적 혹은 칭찬이 평론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함에도, 요즘 글에는 대부분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다. 

평론가들은 자신의 글에 대해 고민하고, 내 스타일을 연구해야 한다. 독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글은 절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읽는 이들이 글을 통해 작품을 알고, 작품을 만든 창작자를 이해하고, 부족한 부분과 뛰어난 부분을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평론가의 일이다. 이렇게 쓰인 글만이 기록으로서 가치를 가질 것이다.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진짜 평론가’를 위한 강의를 해보고 싶다. 

과거 본지 칼럼을 통해 호텔 등급평가, 영화 및 뮤지컬공연 평가, 미슐랭 평가처럼 종합예술인 무용공연 역시 종합적 평가를 위한 평가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예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공적인 지원제도가 확대될수록 공정한 심사의 필요성은 증대된다.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주관적 심사 관행과 객관성이 떨어지는 평론들로 인해 평론기능 자체가 퇴화하고 실력 있는 무용가들이 외면되고 있는 현상은 우리 공연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욱 엄정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평가 방법 도입이 절실할 때가 됐다. 무용공연의 종합적 평가를 위해선 먼저 무용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 설정되어야 한다. 작품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포괄성을 갖춘 요소들이어야 한다. 요소별로 명확한 평가가 가능하고 구성 요소 간의 균형성과 차별성 또한 확보되어야 한다. 이렇게 분류된 요소별로 개별적 판단이 이루어진 후 합산하여 종합점수가 산출된다.

평가시스템은 무대ㆍ무용가ㆍ관객ㆍ감동의 카테고리 안에서 10개 요소로 구성된다. 무대 요소는 청각(음악, 음향), 시각(무대미술, 무대장치, 의상, 소도구), 기술(조명, 영상, 미디어 테크놀로지 등)로 분류된다. 무용가는 춤(기량, 안무, 동작의 실험성), 몸(체위, 균형, 표정, 배역), 자연성(시간ㆍ공간구성, 연출, 조화, 드라마트루기), 텍스트(창의성, 충실성)로 평가한다. 관객 부문은 예술경영(홍보, 마케팅, 팸플릿 등)과 전달성(관객호응도, 재미, 관객수)으로 나뉘며, 마지막 감동에는 완성도와 자연성, 보존성가치, 총평, 기여도 등이 포함된다. 

평가 기준을 처음 세운 것이 2013년인데 지금까지 이 기준에 근거해 글을 쓰고 있다. 10개 요소 중 5개 항목을 충족하지 못하면 아예 글을 쓰지 않고, 6개 이상일 경우에만 작품에 대해 평론을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내가 평론한 작품은 이미 한 번의 평가를 통과한 작품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한 평가와 평론은 아마 내가 회계학 교수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웃음)

▲무용평론가 이근수 경희대 명예교수

무대에 오르는 수많은 작품 가운데 관람할 공연을 고르는 눈은 평론가에게 글을 쓰는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과거에 봤던 작품들이 나의 빅데이터가 된다. ‘과거에 어떤 작가의 작품을 봤는데 어땠다’와 같은 정보가 내가 썼던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좋은 평을 남겼던 작품만 찾는 건 물론 아니다. 아쉬웠던 작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은 제공되는 광고라든지 리플렛을 통해 알려주는 작품 소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가 너무 주관적, 허상적, 관념적인 작품은 우선 거르게 된다. 만드는 사람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작품은 대개 무대에서도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념만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자신이 체험한 것, 느낀 것 혹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영향 등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에 둬야만 콘텐츠가 제대로 갖춰질 수 있다. 주제만 멋지게 던진다고 저절로 멋진 작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창작자들이 꼭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또 하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진실성이다. 이건 사실 금방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차(茶)에는 순향(純香)이라는 것이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과 보이지 않는 진면목이 일치할 때 진솔한 순향이 풍긴다고 한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순향이 가장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진실성은 그 작품에 담기기 마련이다. 

무용평론은 기록되지 않는 예술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이에 평론가는 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도록 경계하고 중심을 지켜야 할 것 같다. 

1995년 평론을 시작한 이후로 많은 잡지사와 신문사 등에 글을 기고해왔다. 짧게는 1회에 그치기도 했고 보통 1년에서 길면 3~4년 쓰다가 중단되길 반복했다. 이유는 대부분 매체가 바라는 논조와 내 평론의 톤이 맞지 않아서였다. 보통 작품을 감상하고 리뷰 및 평론을 작성하는 일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매체는 작품에 대한 호평을 기대하지만, 나는 내 판단대로 글을 쓸 뿐이다. 이런 부분에서 매번 마찰이 생기고 관계가 꾸준히 지속하지 못 하는 것 같다.

반면 서울문화투데이는 어떤 작품에 대한 글을 써달라든지 혹은 어떻게 써달라는 요청을 따로 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부터 평론 전체를 오롯이 나에게 맡기며, 원고에 대한 터치가 전혀 없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칼럼이 지면에 실리는 위치까지 그대로다. 이는 우리나라 언론이 지켜야 할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고, 방향이 아닌가 싶다. 

평론가들이 자기 소신껏 글을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독립성이 없어서다. 올바른 평론 문화 정립을 위해서는 국가에서 잡지를 지원해주는 것처럼 평론가에게 직접 지원을 해주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수록 현대무용과 전통무용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무용단 작품의 색깔도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960년대 무용과가 처음 생겼을 당시 현대무용, 한국무용, 발레 이렇게 셋으로 나눠진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본다. 

전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무용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 밖에 한국무용 전공에서는 전통과 창작을 모두 가르치고 현대무용 전공에서도 전통 한국무용을 소재로 하는 창작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사이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장르의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더 창의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전통 무용과 클래식 발레, 창작 무용으로 구분하는 것이 지금의 흐름에는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예술을 각각의 칸에 가두지 않고 무용가들의 움직임에 맡겨야만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진일보하기 위해 예술의 구분을 허무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단순한 소재로 어설프게 활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최근 무대에 오른 <산조>를 비롯해 국립무용단이 정구호 연출과 함께 만든 작품들이 전통을 컨셉을 위해 단편적으로 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정구호 씨는 2013년 ‘단’이라는 국립무용단 작품을 통해 무용 연출가로 데뷔했다. 이전에도 안무가와의 협업 작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으나 연출로 정식 데뷔해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이 시기이다. 그가 연출로서 호평을 받는 부분은 대개 색감과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세련된 연출이다. 하지만 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안무’이다. 무용 예술 표현의 본질인 무용수의 움직임이나 작품의 메시지 전달 등이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질 수 없다. 국립무용단이 작품의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모험적인 협업을 계속하는 것은 예술감독의 비전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국립무용단뿐만 아니라 각 단체의 예술감독은 임기 동안 자기 작품을 한두 개라도 선보여야 한다. 예술감독의 작품은 곧 단체의 방향성이 된다. 외부 인사를 무분별하게 영입하기보다는 많은 고민을 통해 단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 인사들의 카르텔로 뛰어난 예술가가 기량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은 지역 무용단에서도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역 예술단에서 특정 인물의 줄 세우기 인사는 오래전부터 만연해온 고질적인 문제다. 요즘은 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올리는 공연 외에 다른 작품은 보러 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뛰어난 무용 인재는 많으나, 좋은 작품이 드문 이유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소위 말하는 기득권들은 이미 이렇게 훈련을 받아왔고, 그 과정을 거친 후 보장된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걸 깨뜨릴 수 있는 건 평론가와 언론뿐이다. 좋은 걸 좋다고, 나쁜 걸 나쁘다고 정확하게 집어내야만 사라질 폐단이다.

무용의 매력은 무엇이며 무용 평론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무용의 가장 큰 매력은 현장에서 예술가를 직접 만난다는 것이다. 무용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른 예술분야에선 기대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공연 기간이 짧다는 아쉬움이 공존하지만, 그만큼 희소성을 가진다. 찰나의 예술인 무용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평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직은 제대로 된 평론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점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장혜림
▲장혜림 ‘침묵’ 공연사진(제공=99아트 컴퍼니)

지금까지 관람한 무용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정영두, 안성수, 김용걸, 미나유, 장혜림 등 눈여겨 보는 안무가들이 많지만, 그중 베스트를 꼽는다면 장혜림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침묵>, <심연> 등 30대의 젊은 무용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평론가로 남고 싶은가?

예술적인 그리고 정직한 평론가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