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역사적·예술적 흔적을 새긴 우리나라 행정도로명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역사적·예술적 흔적을 새긴 우리나라 행정도로명
  • 주재근 한양대 겸임교수
  • 승인 2021.07.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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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 한양대 겸임교수

‘스트리토노믹스’라는 신조어를 신문에서 보았다. 이 용어는 사회공학분석법 중 하나로 거리 이름을 통해 도시와 도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즉, 거리 이름을 통해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스트리토노믹스 연구팀은 서구 사회에 영향력이 큰 도시인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의 4,932개 거리명을 분석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로명에 역사문화예술 관련 명칭을 붙인 것이 있는가 하고 흥미롭게 살펴보았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서초동 소재 정효국악문화재단의 도로명 주소는 사임당로이다. 연유는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근처에 서울교육대학교가 있어서 교육의 어머니를 상징한 심사임당을 본떠 사임당로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밖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도 사임당로가 있는데 신사임당묘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강릉시 죽헌동에 태어나고 자란 연유로 강릉시에도 사임당로가 있다. 신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1536~1584)의 도로명칭을 붙인 율곡로는 서울시 종로구, 파주시, 강릉시에 있다.

고양시 덕양군 행주내동의 도로이름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1537~1599)의 이름을 따서 권율대로이다. 1741년부터 권율대로 인근 행주산성에서는 행주대첩 제례와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어 지역의 역사문화브랜드와 도로명을 잘 활용하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충남 부여군에는 백제의 훌륭한 장수 계백 장군(?~660)의 계백로와 향가 서동요(薯童謠)에서 유래한 서동로가 있다. 반면 부여 못지 않은 백제의 유적을 간직한 공주시는 백제의 역사지구 임을 나타내는 도로명을 찾아 볼 수 없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북 경주시에는 옛 명칭인 금성로와 신라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에서 유래한 화랑로가 있다. 가야시대의 유적을 간직한 경북 고령군에는 대가야로와 왕릉로가 있으며 경남 함안군에도 가야로가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명장 김유신(595~673)의 탄생지인 충북 진천군에는 김유신길이 있으며 활동무대였던 경북 경산시에도 김유신로가 있다.

신라말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846)의 본거지인 청해진이 있는 전남 완도군에는 장보고길이 있다. 전남 나주시에는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부인 장화왕후 오씨에 관한 전설로 인해 왕건길이 있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매창(1573~1610)의 묘가 있는 전북 부안군에는 매창로가 있고 현대 문학사에 「혼불」로 이름을 남긴 최명희(1947~1998)의 고향 전북 전주시에는 최명희길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동백꽃」, 「봄봄」등의 문학작품을 남긴 김유정(1908~1937)의 고향 강원도 춘천시에 김유정로가 있다. 미술가로 도로명을 붙인 것으로 이중섭(1916~1956)과 박수근(1914~1965)이 있다. ‘싸우는 소’등의 작품을 남긴 천재화가 이중섭이 생애 말기를 보낸 제주도 서귀포시에 이중섭로가 있으며 ‘아기업은 소녀’ 등의 작품을 남긴 박수근의 고향 양구에는 박수근로가 있다.

충청남도 지방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비교적 두드러진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동녕(1869~1940)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에는 이동녕길이 있다. 또한,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나 3·1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유관순로도 있다, 1932년 중국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날 폭탄을 던진 윤봉길(1908~1932) 의사의 고향 충남 예산군에는 윤봉길로가 있다,

춘향제와 흥보제가 열리고 있는 판소리의 고장 전북 남원시에는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 인물을 앞세운 춘향로, 향단로, 월매길이 있으며, 흥보가에 나오는 흥부로가 있다.

판소리 동편제소리축제가 열리고 있는 구례군에는 동편제 길이 있으며, 판소리 서편제보성소리축제가 열리고 있는 전남 보성군에는 서편제 유파의 하나인 강산제를 딴 강산길이 있다. 이밖에 전남 곡성군에는 판소리 심청가의 주인공인 심청이를 딴 심청로가 있다.

국악의 역사적 인물을 조망한 길로는 우륵로, 권삼득로, 일방울대로, 김소희길 등이 있다. 우륵은 가야국의 궁중악사였을 때 가야금을 제작하고 가야금곡을 작곡하였으며, 신라에 투항한 뒤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의 기틀을 세운 뛰어난 악사(樂師)이다. 옛 대가야의 고장인 고령군에는 우륵로와 가야금길이 있고, 신라 진흥왕이 우륵을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안정적 음악활동을 펼치게 한 것을 계기로 충북 충주시에는 우륵로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양반가문으로 판소리 명창이 된 비가비광대 권삼득(1771~1841)을 기억하고자 전북 전주시에 권삼득로가 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 등 뛰어난 소리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임방울(1904~1961)의 출생지인 광주광역시 광산구에는 임방울로가 있으며 해마다 임방울국악제가 펼쳐지고 있다.

일방울의 뒤를 이어 판소리 여류 명창이자 안숙선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이 시대 판소리의 가치를 최상으로 끌어 올린 김소희의 고향 전북 고창군에는 김소희길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 세종임금을 도와 우리의 음악이론체계를 정립한 박연의 고장 충북 영동군에는 국악로가 있고, 2007년 국립부산국악원 개원을 계기로 부산광역시 진구에도 국악로가 있다. 우리 음악사에 있어서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130여년이 지났고 그동안 세계적으로 뛰어난 클래식음악가도 많은데 아직 도로명에는 보이질 않는다.

행정도로명을 보면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예술자원을 비롯해 지향점 등을 볼 수 있다. 수천년 동안 당대에 큰 업적을 남기고 후대에 교훈과 감동을 준 인물과 유적 등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도로명에 극히 일부만 사용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자연과 벗삼아 걷는 둘레길은 몸에도 좋고 정신 건강에도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역사적·예술적 흔적을 새긴 도로명을 걸어보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담아도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