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정영두의 ‘제7의 인간’
[이근수의 무용평론] 정영두의 ‘제7의 인간’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1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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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3년에 한 번 꼴로 정영두의 공연리뷰를 쓴다. 2015년 '푸가'(LG아트센터)와 2018년 '심포니 인 C'(토월극장)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앞 작품은 바흐의 음악 ‘푸가의 기술(the Art of Fugue)’을 형상화한 작품이었고 뒤 작품은 스트라빈스키 음악을 춤으로 해석해낸 작품이었다. 음악이 주는 영감을 바탕으로 알맞은 형식의 춤을 안무함으로써 음악과 동작의 관계를 풀어가는 정영두의 춤 언어가 인상적으로 다가온 두 작품이었다. 푸가를 보고 이렇게 쓴 기록이 남아 있다.

“침묵으로 시작되어 소리를 불러내는 가운데 보여지는 춤사위가 청결하고 섬세하다. 한 개의 동작이 하나의 소리를 표현하듯 빠르고 경쾌한 몸놀림 속에 절제가 있고 클래식의 형식성과 컨템퍼러리의 자유성을 융합하고자 한 정교한 안무가 돋보인다.”

‘심포니 인 C’는 푸가와 다른 방식으로 음악과 춤의 관계를 조명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한 것이니 음악은 춤의 뇌가 되고 춤이 음악의 몸체가 되었다고 할까. 소녀들이 여행길에서 느끼는 흥분과 낯섦, 새로운 사람들과의 조우, 객지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외로움을 서정적이고 로맨틱하게 표현한 세련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7의 인간’(A Seventh Man, 6,4~5, LG아트센터)은 ‘심포니 인 C’가 묘사한 여정과는 사뭇 다른 여행을 그려낸다. 자의적으로 떠나는 즐겁고 여유로운 여행길이 아니다. 전쟁과 재해, 핍박과 위험을 피해 낯선 곳으로 향하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이주(移住)길이다. 그들은 아마도 떠나온 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요절한 헝가리 민중시인 아틸라 요제프(Attila Jozsef, 1905~1937)의 난해한 시와 이 시에 영감을 받은 존 버거/장 모르의 소설이 원작이다.

“네가 이 세상에 나서려거든/일곱 번 태어나는 것이 나으리라/한 번은 불타는 집안에서/한 번은 얼어붙은 홍수 속에서/한 번은 거칠은 미치광이 수용소에서/한 번은 무르익은 밀밭에서/한 번은 텅 빈 수도원에서/그리고 한 번은 돼지우리 속에서/여섯 아기들이 울어도 충분하지 않아/너는 제 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시의 원문 1부)

‘디아스포라’가 최근에 대두된 문제는 아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증한 유럽이주 난민으로 인해 세계적 이슈로 등장한 것에 정영두는 주목한다. 2010년 초연에 이어 11년 만에 그는 이들 유럽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운명과 일상을 8개 단락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추적한다. 불안한 먼 길을 떠나기 위해 그들은 나체가 되어 새 옷을 갈아입고 부정을 털어내는 의식을 행한다. 빠르고 날카로운 음악이 긴박감을 고조시키고 쫓기듯 그들은 고향을 등진다. 격렬한 몸 흔들기가 화산처럼 분출하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언어는 사라졌다. 수화(手話)가 그들의 소통방법이다. 무대는 푸른색으로 바뀌고 천정에서 네모난 마루판들이 내려와 새로운 환경을 조성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할까’ 심수봉이 부르는 처량한 곡조에 이어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호기심과 궁금증은 70년대 세샘 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으로 들려온다. 이주자들이 느끼는 그리움과 향수, 그러나 마냥 이들의 향수를 용납지 않는 고단한 일상 틈에 잠깐 씩 찾아오는 휴식과 안정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Three pieces in olden style'(Goereki)이 받쳐준다.

3부로 구성된 음악 중 1부의 서정성과 2부의 쾌활함, 3부의 고요한 선율이 서정적인 여성 3인무와 경쾌한 남성 4인무, 남녀혼성의 6인무와 순서대로 매치된다. 현지에 적응해가면서 이주 노동자들의 꿈은 점점 축소되어간다. 벽면에 투영된 세 장의 인체해부도가 이를 은유한다. 컨테이너박스를 탈출하는 피날레 장면은 낯선 곳에 정착지를 마련한 그들의 희망일까 아니면 또다시 나그네 되어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하는 절망일까. 구스타프 말러의 밝은 음악(Titan 3악장)처럼 그들이 발견한 것이 희망과 기쁨일 것임을 기대한다.

2000년 개관했던 LG아트센터의 역삼동 시대가 올해로 막을 내린다. 20년 정든 도심을 떠나 예술의 변방인 강서구 마곡지구에 새롭게 정착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들의 마지막 무용공연으로 ‘제7의 인간’이 선택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예술인들의 자존심으로 살아있던 LG아트센터의 운명이 낯선 땅에 새 삶을 개척하려 길 떠나는 작품의 플로트를 닮았기 때문이다. 도심 공연장 하나로 그룹의 예술적 품격을 높여주던 LG아트센터가 새 터에서도 희망의 소식을 계속 들려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