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늑대 아이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늑대 아이
  • 윤이현
  • 승인 2021.07.1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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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내가 유치원을 갓 졸업했을 때, 작은 언니는 중학생이 되어있었고, 큰 언니는 고등학교 신입생이 되었다. 부모님은 공부를 곧잘 하는 언니들에게 기대가 크셨고, 나 또한 그들을 우상으로 삼았다. 일찍이 공부할 싹수가 보이지 않는 나는 대신 여러 예체능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가야금, 서양화, 운문, 농구 등 많은 것들을 배웠다. 배우는 족족 곧잘 했기에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다. 나에게 사랑과 관심은 과분하게 늘 함께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악을 쓰고 노력하기보다는 여유를 부리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반대로 두 언니는 칭찬을 쟁취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욕심이 많았고, 노력할 줄 알았다.

언니들은 각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들이 20대를 보낼 때,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의 예측은 정확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왜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뺏고 빼앗기는 경쟁이 우선 싫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처럼 거대한 보리수나무 아래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물감과 붓 뒤에 숨어서 언젠가는 직면해야 할 세상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사이 큰 언니는 새로운 꿈을 위해 대학을 자퇴했고, 작은 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이어갔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큰 언니는 유명 국립예술 대학에 합격했고, 작은 언니는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우리 세 명은 생김새만큼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큰 언니는 예술 학교를 졸업해, 한 달 후면 네덜란드로 유학길에 오른다. 작은 언니는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미국 간호사 시험과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한국에 남아서 글을 쓰는 목수가 되거나 사업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었다. 어쩜 한배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냐고. 엄마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더 물었다. 이제 곧 있으면 언니들이 해외로 떠날 텐데 슬프지 않냐고. 엄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슬프지 않다고. 각자의 삶을 잘 찾아가면 그만이라. 엄마의 답변을 들었던 그 날 이후, 내게도 무언가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 언니들처럼 삶을 잘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의 그 미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쯤에서 영화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2012년 작 늑대 아이. 동경에서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던 하나는 학교에서 한 남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비밀 가득한 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늑대와 인간의 피를 물려받은 늑대 인간이었다.

하나는 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딸 아이 유키와 아들 아메를 출산하게 된다. 아메가 태어난 날, ‘는 아내에게 먹일 짐승을 사냥하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그렇게 하나는 홀로 두 아이를 키우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늑대로 변하는 아이들 때문에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하나는, 유키와 아메를 데리고 먼 시골로 이사를 간다. 두 아이를 등에 업고 비가 새는 낡은 목조 주택을 고치고, 생전 해보지 않은 농사를 거듭 실패하면서도 하나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런 하나의 씩씩한 모습에 동네 주민들도 하나 둘 씩 마음을 열어간다. 몇 년이 지나, 활달한 성격의 유키는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늑대로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유키와 아메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금세 적응한 유키와는 달리, 아메는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다. 하나와 키가 맞먹을 때쯤 아메는 늑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2012년 작 '늑대 아이' (출처:https://blog.naver.com/)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2012년 작 '늑대 아이' (출처:https://blog.naver.com/)

그렇게 갈등이 시작된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유키를 데리러 가려고 준비하던 하나는 아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울부짖으며 산속으로 들어가 아메의 이름을 외쳐보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탈진한 채 쓰러진다. 늑대로 변한 아메는 엄마인 하나를 구조해 길가에 옮겨놓는데, 그제야 의식을 찾은 하나는 웃음을 지으며 온전히 아메를 자연으로 보내주게 된다. 유키는 중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떠나고 하나는 여전히 그 집에서 때때로 들려오는 아메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그날의 엄마와 하나의 웃음은 마치 예술의 찰나 같았다.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그런 미소였다. 가닿아 보지 못한 영역의 사랑을 해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피와 살을 내어주고 열 달을 품어 눈물로 키워낸 자신의 자식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과 아픔이 있었을까.

이제는 나와 언니들이 부모님을 지켜야 한다. 어린 시절처럼 무한한 사랑을 기대하기엔 엄마와 아빠는 너무 늙어버렸다. 사랑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각자의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내야 한다. 나는 그걸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언니들처럼 노력해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 두렵지만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영화 '늑대 아이' 속 한 장면. 유키, 아메 그리고 하나의 모습이다. (출처:https://blog.naver.com/)
영화 '늑대 아이' 속 한 장면. 유키, 아메 그리고 하나의 모습이다. (출처:https://blog.naver.com/)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얼마나 많은 경쟁에서 이겨야 각자의 위치에서 건재할 수 있을까. 유년 시절 잔잔한 냇물과 보리수나무 아래서 꿨던 꿈들은 정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일까. 여전히 미지수지만, 어딘가에서 나와 아메를 미소로 지켜보고 있을 엄마와 하나를 위해서 단단해져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