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오페라, '돈 조반니'
[클래식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오페라, '돈 조반니'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1.07.25 2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f라는 미지장소 설정, 자막 재미 요소 높이 평가 , 제작 여건 따른 오케스트라 아쉬워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오페라는 개성 있는 연출로 새 생명을 얻는다. 연출은 음악, 드라마과 함께 오페라를 이루는 3대 요소다. 과거 이야기를 오늘의 무대 위에 되살리는 현대식 연출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러한 창조적 연출은 원작을 망쳐놓을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만, 지금껏 관객들이 알지 못한 오페라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해 준다. 피터 셀라스는 17세기 스페인을 무대로 한 <돈 조반니>를 1980년대 뉴욕 할렘으로 옮겨 놓았고, 돈 조반니, 레포렐로, 마제토를 흑인으로 설정해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런 연출을 통해 모차르트 음악이 더 잘 들리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지난 23일과 24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의 <돈 조반니>는 아시아의 항구도시 ‘K’에서 펼쳐졌다. 한국에서 <돈 조반니> 하면, 1955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바 람둥이 박인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재벌2세를 사칭한 사기범, ‘미투’로 실체가 드러난 유명인사들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럴 경우 무대는 서울 이태원이나 강남 유흥가가 제격일 수 있다. 그러나 연출가 장수동은 아시아 항구도시 ‘K’를 설정했다. 돈 조반니는 마피아의 보스 정도 되는 듯 했고, 그의 여행 가방은 마약으로 채워져 있지 않을까 상상을 일으켰다. 현실의 인물과 장소를 차용한 것처럼 자극적이거나 도발적이진 않지만, ‘K'라는 미지의 장소에서 ‘Fantasy'를 느낄 수 있도록 여백의 아름다움을 선사한 좋은 선택이었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포스터 속의 모차르트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코로나와 폭염 상황이지만 객석은 거의 만원이었다. 관객들은 돈 조반니의 엽기 행각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그의 매력을 눈여겨 보았다. 레포렐로의 풍자에 폭소를 터뜨렸고, 돈나 안나의 분노, 돈나 엘비라의 연민, 체를리나의 발칙함에 몰입했고, 돈 오타비오와 마제토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연출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기 때문에 이처럼 폭넓은 공감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탈리아말로 된 레시타티보를 우리말 대사로 처리한 것은 일반 관객들을 배려한 친절한 연출이었다. 대사는 최대한 압축하여 간결하게 처리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미투 운동’이란 표현으로 현실을 상기시킨 것, 돈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할 때 “이런 항구도시에서 썩기엔 네가 아깝다”고 한 것 등은 생동감이 있었다. 다만, 대사에서 'K'라는 항구도시와 그 곳의 인물 군상을 짐작케 하는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넣었으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자막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간결한 의역이 많았는데, 마제토의 아리아 중 “돌대가리 총각들”이란 표현, 2막 파티에서 악단이 피가로의 아리아 ‘Non piu andrai’를 연주할 때 “음악 쥑이네”라고 한 대목은 미소를 자아냈다. 1막 피날레에서 ‘Viva la liberta’를 “맘껏 즐기세요”, “자유 만세!”로 맥락에 따라 다르게 번역한 것은 훌륭했다. 다만, 1막 돈 조반니와 체를리나 이중창 <손 잡고 저기로>에서 ‘Mi fa pieta Masetto’는 “마제토 용서하세요” 보다는 글자 그대로 “마제토가 불쌍해요”로 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체를리나가 떨리는 마음으로 망설이는 느낌이 흐려져서 아쉽다. 2막 돈 오타비오 아리아 <Il mio tesoro>는 단순히 돈 조반니에게 복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를 정의의 법정에 세우겠다”는 것인데, 자막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 돈 조반니를 응징할 수 없으니 기사장의 유령이라는 초자연적 힘이 심판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의 연결고리가 흐릿해진 건 아쉽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2막의 돈나 엘비라 아리아와 돈나 안나 아리아가 숭고한 느낌으로 전환될 때 배경 화면이 내려오도록 한 것은 음악을 돋보이게 한 훌륭한 연출이었다. 묘지에서 기사장이 등장하는 대목은 조명과 무대배치가 산뜻해서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났다. 만찬장의 기사장 위치 선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기사장 장면들은 오케스트라의 트럼본이 없는데도 그럭저럭 볼 만 했다. 커다란 갈고리를 소품으로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1막 레포렐로의 <카탈로그의 노래>에서는 태블릿 PC의 화면 - 돈조반니가 여성들을 유혹하는 장면들을 배경 스크린에 띄웠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스토리 전개에 별 지장이 없는 대목의 음악을 조금 잘라낸 것은 드라마를 간결하게 해 주었다. 다만, 돈나 안나가 약혼자에게 사건 전말을 설명하는 대목을 생략한 결과, 돈나 안나의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관객이 있었다. 2막 첫부분, 돈 조반니와 레포렐로가 옷을 바꿔입는 장면에서는 돈조반니의 빨간 조끼를 레포렐로에게 입혀야 두 사람이 선명하게 구별됐을 것이다. 체를리나의 발칙한 매력을 현대적인 이디엄으로 표현하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2막, 부상당한 마제토가 무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지휘자가 받쳐 주도록 한 연출은 큰 웃음을 자아냈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돈 조반니의 바리톤 김지단, 돈나 엘비라의 소프라노 이소연, 레포렐로의 바리톤 김태성, 돈 오타비오의 테너 민현기, 마제토의 바리톤 조병수 모두 한결같이 열연했다. 돈나 안나를 맡은 소프라노 김은미는 1막 아리아에서 음정이 불안했지만 2막 아리아에서는 열정적인 노래로 큰 감동을 주었다. 체를리나를 맡은 소프라노 이결은 정확한 음정과 신선한 목소리로 청중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기사장을 맡은 베이스 심기복은 초자연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훌륭한 뉘앙스의 목소리를 선보였다.  

<돈 조반니>의 숭고한 음악을 표현하기에는 오케스트라가 빈약했던 게 사실이다. 단 14명의 오케스트라, 트럼본이 없다고 투덜대는 것도 배부른 소리가 될 정도로 예산이 열악하지 않았나 싶다. 연주자의 기량과 열정도 아쉬움을 남겼다. 1막 체를리나 아리아 ‘Batti batti o bel Masetto’의 첼로 솔로는 잘 연주하면 매우 달콤한 앙상블을 만들 수 있는데, 그냥 흘려버리듯 연주해서 허탈했다. 목관은 너무 소심해서 성악과 안정된 앙상블을 이루지 못했고, 호른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잘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하긴, <돈 조반니>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렵기로 유명하다. 모차르트 시대에 피렌체에서 이 작품을 공연하려고 9번이나 리허설을 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연주를 포기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오케스트라의 미흡함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듯하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오케스트라 피트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된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지자체 공연장 중 구로, 노원, 마포, 강동 등 네 곳에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는데, 한결같이 협소하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나 국립박물관 용극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높아진 관객들의 요구에 걸맞게 양질의 음악을 제공하려면, 최소한의 울림이 있는 오페라 전문극장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코로나와 무더위를 뚫고 흥미로운 <돈 조반니>를 선사한 예술감독 장수동 예술감독, 그리고 모든 음악가들과 스탭들의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