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평]여름날의 사랑, 낭만, 그리움을 담은 피아노 선율
[클래식비평]여름날의 사랑, 낭만, 그리움을 담은 피아노 선율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1.08.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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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원재연, 전국 투어 리사이틀 첫 무대
슈만 ‘환상곡’과 ‘숲의 정경’으로 청중 사로잡아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코로나 상황에서도 젊은 비르튜오소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쇼팽 콩쿨 우승자 조성진도 훌륭하지만 오로지 조성진만 찾을 일이 아니다. 탄탄한 실력과 명성으로 대관령 음악제를 이끄는 손열음, 최근 귀국한 자유와 열정의 아이콘 임현정, 젊은 세대의 어법으로 소통하는 신세대 피아니스트 한지호, 한국인 특유의 음악성으로 가난의 악조건을 돌파한 문지영, 잘츠부르크 유학 중 올해 몬트리얼 콩쿨을 석권한 김수연 등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이가 개성 있는 피아니즘을 선보이고 있다. 이 중 김수연은 2015년 쇼팽 콩쿨 결선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탁월한 감성과 음악적 지성으로 누구보다 뛰어난 모차르트와 쇼팽을 들려주어서 기대를 모았고, 몬트리얼 콩쿨을 통해 드디어 세계인의 인정을 받았다. 

또 한 명, 정직한 음악성과 학구적 태도로 꾸준히 내공을 더하고 있는 원재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17년 부조니 콩쿨 준우승과 청중상을 수상했지만 콩쿨 체질이 아니라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왔다. 모차르트부터 라흐마니노프까지 협주곡 레퍼토리를 확장해 왔고. 음악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기 위해 작은 음악회나 지방 연주회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바쁜 틈틈이 마리아 주앙 피레스에게 음악 지도를 받는 등 자기 연마를 게을리 않는 듬직한 음악가다. 이런 그가 이 더위와 코로나의 시련 속에서 슈만과 브람스로 전국 투어에 나섰다니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폭염의 절정인 7월 31일, 고양 아람누리 음악당. 로비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사랑 가득한 19세기 독일 낭만 시대의 꽃 슈만과 브람스를 원재연의 해석으로 만나는 시간…. 원재연이 직접 쓴 프로그램 노트를 보니, 그와 함께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으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겠다 싶었다. “이 음악이 좋다는 걸 알게 해 줘서 고맙다는 청중의 말을 듣고 싶다”는 그의 한결같은 바람이 프로그램 노트에 배어 있었다. 

▲지난 4월 원재연 피아니스트의  대구콘서트하우스 리사이틀 공연 모습 ⓒDAEGU CONCERT HOUSE
▲지난 4월 원재연 피아니스트의 대구콘서트하우스 리사이틀 공연 모습 ⓒDAEGU CONCERT HOUSE

첫 곡, 슈만의 <숲의 정경>은 더위에 지친 마음에 청량제로 다가왔다. 숲으로 들어가는 첫 곡, 사냥꾼 · 외로운 꽃 · 여인숙에서 · 예언의 새 등 일곱 개의 장면,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곡까지 모두 9곡의 성격소품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원재연은 새의 노래,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사냥꾼의 뿔피리 등 숲의 소리를 유연한 동작과 섬세한 터치로 들려주었다. 슈만은 이 곡을 작곡한 직후인 1849년 “음악은 잘 훈련된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이 곡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문학적 이상을 표현한다. 원재연은 특히 제4곡 ‘저주받은 장소’와 제7곡 ‘예언의 새’에서 슈만 내면의 갈등과 회의, 희망과 설렘을 직접 들여다본 듯 설득력 있게 들려주었다. 

이어진 브람스의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원재연이 노트에 쓴 대로, ‘덜 알려진 브람스 작품 중 정말 보석 같은 곡’이다. 브람스는 이 곡의 초판에 ‘나의 가장 좋은 친구에게’라고 써넣었는데, 그 ‘친구’는 ‘브람스의 영원한 연인, 누나, 어머니’였던 클라라 슈만이었다. 브람스가 직접 작곡한 주제는 그리움과 애절함이 가득하다. 이 아름다운 선율에 사랑의 노랫말을 붙여서 나지막이 불러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재연은 11개의 변주를 하나하나 정성과 표정을 담아 연주했다.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제9변주와 제10변주에 이어서 차분하게 숨을 고르는 마지막 변주까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원재연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2부는 슈만의 <환상곡> C장조였다. 원재연이 지적한 대로, ‘C’장조는 클라라의 이니셜을 상징할 것이다. 이 작품은 클라라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원래 1837년 베토벤 서거 10주년 행사를 위해 1악장 ‘폐허’, 2악장 ‘개선문’, 3악장 ‘별의 화관’으로 된 소나타로 구상했지만,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이 곡을 자유로운 ‘환상곡’으로 이끌었다. 1악장 ‘시종일관 환상적으로, 열정을 다해’에 대해 슈만은 1838년 3월 클라라에게 “내가 쓴 곡 중에 가장 열정적”이며, “당신을 생각하며 작곡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악장 ‘규모 있게, 시종일관 힘차게’에서 슈만은 변화무쌍한 감정의 기복 대신 두꺼운 화음과 리듬으로 클라라를 향한 굳센 사랑과 신뢰를 그렸다. 원재연은 슈만의 마음이 된 듯 혼신의 힘과 열정을 바쳐서 두 악장을 연주했다. 

원재연이 가장 깊은 애정을 담아서 들려준 것은 마지막 악장 ‘느리게, 철저히 낮은 목소리로’였다. 이 3악장에서 원재연은 널리 연주되는 버전 대신 베토벤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주제가 들어 있는 오리지널 버전을 사용했다. 1악장 끝부분에 있는 베토벤의 ‘그리움’ 주제를 3악장 끝부분에 다시 넣어서 곡 전체의 아치형 구조를 살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방식이 “제 마음에 닿아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대목, 고조되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고요히 마무리하는 원재연의 모습에서 “젊은 비르튜오소는 사랑에 빠져 있으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지난 4월 원재연 피아니스트의 대구콘서트하우스 리사이틀 공연 모습 ⓒDAEGU CONCERT HOUSE

앵콜곡은 슈만-리스트의 <헌정> 정도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쇼팽의 녹턴 1번 B♭단조, 베토벤 <월광> 소나타 3악장, 그리고 멘델스존 <결혼 행진곡>(리스트-호로비츠 편곡)이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추억이 서려 있을 법한 쇼팽, 피아노가 박살 날 정도로 열정이 폭발하는 베토벤, 그리고 이어지는 <결혼 행진곡>…. 음악을 즐기면서도 “뭔가 의미심장하다”는 비음악적(?) 상상이 자꾸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연주는 예상보다 늦은 6시 반 경에 끝났고, 로비는 원재연과 인사 나누기를 기다리는 행복한 청중들로 가득했다.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사인을 받는 초등학생(예비 피아니스트?)이 눈에 띄었고,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나온 팬클럽 ‘원덕걸스’의 모습이 미소를 자아냈다. 이날 원재연의 연주는 유연했고, 부드러운 잔향으로 은은히 빛났다. 엄청난 연습으로 잘 다듬어진 연주였다. 이왕이면 리스트에게 어울릴 법한 커다란 콘서트홀보다, 슈베르트와 쇼팽이 사랑한 작은 살롱에서 그의 표정과 호흡을 느끼며 음악을 들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욕심이 들었다. 홀이 너무 커서 그런지 낮은 음역의 소리가 무게 있게 울리지 않은 건 아쉬웠다. <환상곡> 3악장의 클라이맥스, 상승하는 크레센도의 마지막 음표, 청중과 연주자가 혼연일체가 되는 감동을 느낄 만한 대목인데 아주 조금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모든 체중이 실리지 않았고, 이어지는 긴 침묵(Pause)이 다소 어색했다. 옥의 티였다.       

원재연의 전국투어 리사이틀은 8월 21일 저녁 7시 광주문예회관, 8월 26일 저녁 7시 반 부산문화회관, 9월 2일 저녁 7시 반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이어진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시작한 이 투어가 마무리될 무렵이면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때쯤 코로나의 긴 터널도 끝이 보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