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황재형 작가, 어두운 길 가장 오랫동안 밝히는 빛 꿈꾸며
[Special Interview] 황재형 작가, 어두운 길 가장 오랫동안 밝히는 빛 꿈꾸며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작가
  • 승인 2021.08.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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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전시 ‘회천(回天)’-‘카리타스(caritas)’ 실현을 향한 염원
감춰진 진실을 뒤집어 보이는 것, 예술가 역할
진정한 인간 관계망 형성 향해, 예술은 도덕성 회복
남북작가 함께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한반도 그리고 싶어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작가] 제 54회 휴스턴 국제 필름 페스티벌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플래티넘을 수상한 2019년 SBS스페셜 방영 다큐멘터리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은 ‘용현’이라는 본명과 ‘요한’이라는 세례명, ‘씨돌’이라는 자신이 지은 이름 세 가지를 갖고 살아간 인물을 조명한다. 용현은 2012년 한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 ‘자연인 김씨돌’로 괴짜처럼 등장했는데, 사실 김씨돌이자 요한으로 산 그는 한국 현대사 현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목소리를 높인 숨어있던 의인이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며 조용하게 사회를 밝혀오던 인물이었다.

▲인터뷰에 응하며 생각에 잠긴 황재형 작가 ⓒ김재성 작가
▲인터뷰에 응하며 생각에 잠긴 황재형 작가 ⓒ김재성 작가

지난달 30일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천回天》전시를 선보이고 있는 황재형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태백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기자는 막연하게 익히 알려진 ‘광부 화가’로써의 황재형을 떠올리며 태백으로 향했다. 하지만, 황재형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몰랐던 황재형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알게 됐다.

황재형 또한 용현처럼 화가‧교육자‧구도자, 그리고 전심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는 한 남자로 다양한 모습으로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진정으로 딛고 걸어 온 인물이었다. 화백으로 살아 온 그의 40년은 태백의 광활한 산맥과 시원한 공기를 닮아있었다. 4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는 시종 웃음과 눈물, 진지함이 교차되면서 태백의 시간은 늬엿늬엿 흘렀다.

국립현대미술관서 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 제목 《회천回天》에 여러 의미를 담은 것으로 안다. 구체적으로 풀어서 의미를 말해 달라.

회천은 ‘하늘을 휘두르다, 임금을 뜻하는 천자의 마음을 돌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나왔다. 아주 단단하게 고정돼 어떻게 할 길이 없는 천자의 마음도 돌릴 수 있는 것을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전시를 시작했다. 천자의 마음도 돌릴 수 있는 무엇,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혁명이라고 본다.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그를 때려잡는 물리적인 쿠데타가 아니라, 우리가 정신혁명을 이뤄내는 것이라고 본다. 전시에 그 답을 담아내고자 했다.

테이트모던에 초청받아 전시했을 때 수석 큐레이터 제시카 모건과 대화하며 그에게 앞으로의 미술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고 보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모건은 “앞으로의 미술은 미술을 모르는 자들이 미술을 이뤄낼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 혁명’은 배운 자들이 못 배운 자들에게서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이 안 가진 자들에게서 배우는 가치관의 혁명을 뜻한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그렇게 바뀌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계속해서 그 혁명을 지향하고, 그 뜻을 간직하자라는 의미로 ‘회천’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또 다른 의미 하나는 종교 언어인 ‘카리타스(caritas)’ 실현을 향한 염원이었다. ‘카리타스’는 자기포기라는 것이다.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사랑을 이어 인간의 길에서 구현한다는 의미다. 신의 뜻을 인간이 이어받아 인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 천주교인들의 믿음이고, 이를 바탕으로 구원이 실현된다. 근데 왜 이것이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장제일주의로 치달아가면서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 드러나고, 태초의 선한 상태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 혁명과 사랑의 실천은 하늘을 되돌릴 것이라고 본다. 그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인터뷰에 응하며 여러 감정에 휩싸이고 있는 황재형 작가 ⓒ김재성 작가
▲인터뷰에 응하며 여러 감정에 휩싸이고 있는 황재형 작가 ⓒ김재성 작가

스스로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리얼리스트 작가라고 했다. 창작활동을 시작한 지 40여 년이 흘렀다. 그간, 말하고자 한 진실은 변하지 않고 있는가. 아니면 시대별로 다른 진실들을 얘기해오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마다 말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참 쉽지 않다. (한숨) 차이가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시대가 변해도 미쳐버리게 차이가 없다. 현장에서는 ‘구두는 장화를 모르고, 장화는 구두를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구두는 경영자를 뜻하고, 장화는 노동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렇게 시대가 흘렀으면, 지금쯤은 그 골이 좁혀져야 하는데 여전히 똑같다.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작업을 하면서 많은 CEO와 많은 경영자들을 만나고 얘기해봤다. 사람을 고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만이 아니라 정신을 모두 뺏는 것이다. 월급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월급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성 기능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장도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영자와 노동자가 같이 살고 먹는 것이다.

진정한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계속해서 물질로 표현되고 있다. 가치 또한 어쩔 수 없이 물질의 형태로 구현돼 전달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혼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결국에는 정말 흉측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경영자와 노동자가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여전히 바라고 말하고 있다.

▲《황재형-회천回天》 전시 전경 ⓒ서스테인웍스
▲《황재형-회천回天》 전시 전경 ⓒ서스테인웍스

화단에 주목을 받게 된 ‘황지330’ 작품 속 작업복 실제 주인은 1982년까지 황지광업소에 계약돼있었지만, 계약이 만료되기 전인 1980년에 매몰사고로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최근 택배 노동자 과로사 사건, 산업재해로 사망한 청년들이 떠올랐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요즘 황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작업복 주인이 있는지.

내가 기민한 작가라면 멋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질 못하다. 산업재해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은 우리 현실이다. 인간이 익명화되고 기호화 되는 사회는 분명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빨리 끝날수록 좋은데, 왜 이리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대학 졸업을 할 때 딱 두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왔다. ‘너무 편안한 잠자리를 이루고 있어 삶이 권태로운 사람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그림을,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드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을 주는 그림을 그리겠다’라는 주제였다. 젊은 청춘답게, 나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그 두 가지만 실천하자고 하면서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요즘은 불편한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이에게든,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이에게도 ‘안식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머리카락 작품 <새벽에 홀로 깨어Ⅱ(세월호 어머니)>는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작품이 뿜어내는 감정과 시대적 무게들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울지 않는 울음’의 소리를 찾아 그려내는 작업 힘들지 않은가.

예술가들은 어둠을 응시하는 사람들이다. 밝음이 아닌 어둠을 가져내며 세상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둠을 보면서 그 안에 매몰된다면, 그것은 어둠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둠을 본다는 것은 그 너머 빛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어둠 너머의 밝음을 본다는 것은 쾌락주의이고, 이 쾌락주의가 좌절된다면 허무주의로 빠져 사람이 아주 피폐해진다.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보는 행위를 실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예술가들이 해야 한다. 그게 예술가가 가진 시대의 책무다.

작업을 할 땐 굉장히 고통스럽다. 시대의 무게와 감정을 과장하지 않기를, 누군가의 생이 흐르는 머리카락이 헛되게 쓰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이어가기에 힘이 든다. 하지만, 작업을 할수록 정화됨을 느낀다. 화폭에 완성되는 힘과 선율, 그리고 머리카락의 역사가 전하는 정서적 감흥은 정말 다르다. 작품을 하면서 성숙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무엇을 하겠노라’라고 뻣뻣하게 서있는 이는 작가가 아니라고 본다. 작품을 하면서 몸살을 앓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진통이 시련이고 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본다.

▲《황재형-회천回天》 전시 전경 ⓒ서스테인웍스
▲《황재형-회천回天》 전시 전경 ⓒ서스테인웍스

‘어머니’라는 작품은 풍경화인데, ‘어머니’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풍경화를 떠올릴 수 없는 제목이어서 독특했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가.

동화라는 단어를 사물과 정신성의 일치로 구현했다. 부산에서 큰아들과 지내시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내게로 와 2년 반을 나와 함께 지내셨다. 당시 내가 가난한 시절이어서 잘 모시지를 못했다. 그런데 또 어느 날 갑작스레 형님에게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전하셨다. 그렇게 부산으로 어머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어머니를 좀 더 편안하게 모시지 못했는지,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어머니는 젊었을 적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우리 형제를 키워내신 분이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그 길로 산으로 뛰어 올라가 산 중턱에 멈춰 서서 종일 울었다. 눈물을 흘리는 내 앞에 헐벗고 긁히고 잘린 산이 보였는데, 그 자연 속에서 어머니가 보였다. 오남매를 키워내고도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 큰 울림을 줬다. 그림을 보면 헐벗은 산맥 아래에 3대의 집이 모여 있다. 한 가문을 만들어낸 어머니의 존재를 담아냈다. 그 때 부산으로 갑작스레 내려간 어머니는 3일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나마 2년 반을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참으로 감사한 지점이다.

<알혼섬> 작품을 인상 깊게 봤다. 칠흑 같은 암흑 속 은은하게 빛나는 물결에서 먹먹함을 느꼈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알혼섬>에 대한 인상 깊은 일화가 있다. 국현에서 전시 중인 그 그림 앞에서 어떤 젊은 예술가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며 울고 있는 사진이 SNS에서 이슈화가 됐다고 들었다. 내 그림에서 무엇인가 느꼈나보다. 감사한 일이었다.

알혼섬은 45억만년을 버텨왔다. 인간의 머리로는 잴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섬의 물주름으로 드러나는데, 그걸 보는 순간, 하, 정말 사람 죽이는구나 싶었다. 그 자연을 마주하고 작업을 시작하는데 내내 든 생각이 ‘아, 이게 뭐야, 100년도 못 살 내가 이거 그려서 어쩌겠단 거야’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흑연이 보였다.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하는데 ‘야, 이거 봐라’하는 감탄이 나왔다. 검정칠을 다 하고 그 위에 흑연을 툭툭 튕겼다. 아주 반짝반짝한 것이 윤슬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서 알혼섬을 그리게 됐다. 45억만년의 침묵과 시간을, 나의 행위를 극소화시키고 물성이 대변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림을 보고 눈물 흘린 이도 아마 그걸 느꼈지 않을까 싶다. <알혼섬>을 통해 부재의 실재를 얘기하고자 했다. 없는 것인데 실재화 되는 것, 어머니의 사랑은 있는 것인데 없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부재를 구현하는 것이 그림이구나, 흑연의 반짝임을 보면서 그것을 깨닫고 충만함을 느꼈다.

《황재형-회천回天》 전시 전경_사진 서스테인웍스_국립현대미술관 제공 (6)
▲전시장 한 가운데 놓인 최근작 메탈지그 ⓒ서스테인웍스

최근작인 설치작품 메탈지그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태백의 자연 풍광을 표현한 그림들 한 가운데 놓여있는 작품이 독특했다.

사실 그 작품의 원제는 “엄마 나 부츠 사줘”였다. 물질성과 물질문명 유혹에 휘둘리는 현대인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제목이 작품을 더 모호하게 할 듯해 변경했다. 거대한 미끼의 바늘은 유혹의 바늘이다. 미끼는 물질성을 뜻한다. 현대인들은 물질의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그 바늘에 걸리고 만다. 그래서 불행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그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불행으로 치달아가지도 않는다. 그 필요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공산품에 대한 편리를 끊어내야지만 행복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롱부츠를 사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있다. 왜 꼭 롱부츠를 사야하는 가? 그 필요를 절제해나가고 싶었다.

돈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기 위해 재봉과 의상디자인을 배웠다고 했다. 결혼식 때 사모님 웨딩드레스도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놀랍기도 하다. 두 분은 지금까지도 항상 같이 다니신다. 로맨스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가볍게 얘기해 주시라.

초등학교 5학년 때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선택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건데, 그럼 무엇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재봉을 배웠다. 로맨스는 뭐, 별 것 없는데.

▲젊은 시절의 황재형 작가와 아내 (사진=황재형 작가 제공)
▲젊은 시절의 황재형 작가와 아내 (사진=황재형 작가 제공)

혹시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사모님이 같이 계시니까.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황재형 작가 아내) 이 사람이 디자인 했다는 얘기를 꺼내니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기성복이나 기성품 신발이 흔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양장점에 가서 옷을 지어 입고, 신발을 맞춰 신는 것이 흔한 시대였다. 항상 이 사람이 내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자인해줘서, 그대로 옷을 맞춰 입고 다니면 정말 모든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했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이 실력이 좋았다. 그리고 어디를 여행갈 때면 이 사람이 모든 코디를 준비해왔다. 그 옷에 모두다 한자 한자 이름 자수를 놔서 준비해왔다. 정말 대단한 정성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을 돕고 운전도 해주고 하니까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 젊었을 적 나에게 들인 시간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황 작가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대학도 자기 돈으로 다녔고, 직접 돈을 벌면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 시절에 나를 만나서 자기도 힘들면서 정말 나한테 많은 공을 들였다.

정말 깊은 사랑이다. 도대체 아내 분 어디에 그렇게 반한 건가.

그냥 사랑하니까 한 것이다. (웃음)

▲태백에서 황재형 작가 가족 (사진=황재형 작가 제공)
▲태백에서 황재형 작가 가족 (사진=황재형 작가 제공)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웃음)

사실 그 때 우리 집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내 주위에는 하이힐을 신고 완벽하게 드레스업한 여성들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그때 항상 하얀 고무신을 깨끗하게 닦아서 신고 다녔다. 깨끗한 면바지와 셔츠를 입고 그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데 그게 참 예뻤다. 하루는 눈이 많이 내려서 아내를 불러냈다. ‘눈 구경 시켜줄게, 나와’ 이렇게 불러서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슬며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손을 잡으면 여자가 (손을 포개며) 이렇게 딱 잡는데 아니 이 사람은 손을 딱 잡아 빼면서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예요!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러시나요!” 이렇게 성을 팍 내는 거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정말 새로웠다. (일동 웃음)

태백으로 와 두 분은 그림 작업 이외에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는가.

90년도인가, 80년도 후반 쯤 태백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꼭 한 사람을 만나달라며 간곡히 부탁을 해왔다. 한 장애 아이를 만나달라는 얘기였다. 그 때 나는 내 밥벌이도 못하고, 월셋방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데 누굴 도와줄 수 있겠나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니 그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어느 집의 깊은 골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아이가 짐승처럼 기어 나왔다. 정말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랫도리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는데, 하반신을 쓸 수 없어서 질질 끌고 다녔다. 바닥에 끌려 다니니 하반신이 다 문드러져있었다. 육고기가 썩는 냄새가 원래 지독한 법인데, 그 사람 살 썩는 냄새는 맡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정말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주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부탁은 그 아이를 교육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몸이 성치 않으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예술이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단 먹고 살 수 있게,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산수, 국어, 공예를 가르칠 네 사람이 모였다. 일주일 프로그램으로 2년 반을 가르쳤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아이는 정말 잘 따라 와줬다. 교육 중에 그 아이가 그리고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고 작품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이가 살 수 있게끔 되자, 그 가족은 태백을 떠나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데 그래도 잘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황재형 작가 ⓒ김재성 작가

그 당시 탄광촌의 현실이 그랬다. 노동으로 지친 마을 속에서 장애인들은 짐승처럼 버려져있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태백 사랑의 집’이라는 장애자 학교를 세웠다. 동사무소를 가서 장애자 아이들을 다 파악해서 한 명씩 모두 보살폈다. 그렇게 95년도까지인가 운영하다가 교육 인프라를 구축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당시 공동 운영하고 있던 목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나왔다. 정말 쌀알 한 톨까지 다 주고 나왔는데, 그렇게 일궈놨으니 잘 이끌어 갈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후로 장애인 교육에서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교육도 실현하게 됐다.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아이를 열심히 가르쳐봤자, 학교로 다시 돌아가면 다시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니 선생님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6년도 12월엔가 반야화숙(반야畵宿, 태백미술연구소로도 불린다)을 열어 선생님들을 교육했다. 첫 회 차에 뜻있는 선생님을 전국에서 모집했는데 딱 2명이 왔다. 그들을 가르칠 선생님은 10명이었다. 정말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그 후로 교육프로그램이 점점 확장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근간엔 코로나 때문에 열지 못했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다시 시작하려 한다. 예술은 도덕성 회복이다. 나는 그것을 행하고자 할 뿐이다.

▲황재형, 백두대간, 1993_2004, 캔버스에 유채, 206.5x496cm. 작가소장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황재형, 백두대간, 1993_2004, 캔버스에 유채, 206.5x496cm. 작가소장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앞으로 황재형 작가가 드러낼 진실과 지향해 나갈 주제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진정한 인간 관계성을 확보하는 것, 진정한 인간관계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작품으로는 좀 더 폭을 넓혀서, 해외의 문제도 담아낼 것 같다, 원하던 원치 않던, 해외와 관계성 형성이 될 것 같다. 이번 미얀마 민주 시위 같은 문제다. 그곳에 직접 가서 살고, 그쪽 사람들도 한국에 오게 하고 교육도 하고자 한다. 해외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지금 큰 고민이다.

(작업실 벽면의 걸린 큰 캔버스를 가리키며) 그리고, 저 화폭을 채우는 것이 나의 꿈이다. 우리는 허리가 짤린 환자다. 한반도가 두 동강 나있지 않은가. 불구를 벗어나기 위해서 통일의 발화점을 만들고 싶다. 정치적 차원이 아닌 번성회복을 통해서 같이 풀어나가고 싶다.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같이 항공촬영을 해 그 산맥을 담아내고 싶다. 남한 작가뿐 만이 아니라 북한 작가들도 함께 하실 바란다. 하늘이 가능하다면 도보도 가능할 것이다. 땅으로 같이 진행하고 싶다. 준비는 이미 완료됐다.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내가 하지 못하면 내 제자가 또 다른 이가 행할 것이다. 그게 내 지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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