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100년전 조선극장과 낙원아파트 ‘스튜디오 낙원’
[윤중강의 뮤지컬레터]100년전 조선극장과 낙원아파트 ‘스튜디오 낙원’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1.08.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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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대정권번(大正券番) 기생들이 조선극장에서 온습회(溫習會)를 했다. 가야금 차례가 되어 기생이 쭉 나와 앉아서 타기 시작했는데, 조선의 명물인 붉은 테 두른 친구가 나와 번쩍하고 들어갔다. 이후 가야금 타던 기생들도 슬금슬금 무대에서 사라졌다. 주인 편에서 "가야금 순서는 원래 없던 것이라고 경찰이 금지시켰다”는 거다. 이에 관중 편에서 "야, 가야금도 치안방해냐.” ‘경찰의 횡포’에 야단법석이 났다. 이따위 사소한 일에까지 경찰의 호기를 못 부리면 직성이 못 풀리나.“ 

1924년 6월 12일, 동아일보 기사를 옮겼다. 권번의 예기(藝妓) 공연에서 원래 프로그램에는 적혀 있지 않은 가야금을 공연하게 되자, 적모(赤帽)를 쓰고 칼을 찬 일본 순사가 갑자기 무대에 나와서, 가야금 연주를 금지한 내용이다. 

1922년 11월 6일, 조선극장 낙성식이 있었다. 주소는 인사정(인사동) 130번지이고, 승강기까지 갖춘 목조 3층의 신식극장으로, 특별히 가족관람석까지 마련했다. 요즘 말로, 프라이빗 VIP관람석이다. 윤백남(1888 ~ 1954) 연출의 장발장(Jean Valjean)이 개연((開演) 공연이었다. 조선극장은 활동사진(영화)을 중심으로 하면서, 당시 인기를 끈 다양한 레퍼토리를 수용했다. 

매우 ‘핫한’ 장소인 만큼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토월회의 연극 ‘월요일’(1930. 1. 22)에서 남녀배우가 불온한 대사를 했다고 해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다. 여배우는 저 전옥(全玉, 1911~1969)이다. 

‘눈물의 여왕’ 전옥과 ‘희극왕’ 이종철(李鍾哲, 1909~1972)은 ‘연기생활 40주년 기념공연’ (1966. 2. 17 ~ 20, 시민회관)을 할 만큼 가까웠다. 이종철은 조선극장에서 데뷔했다. 당시 러시아의 코팍춤(Hopak Dance)에 반한 이종철은 중학을 중퇴했고, 댄스에 빠진 후 코메디언으로 성공한다. 일제강점기의 ‘오케그랜드쇼’(조선악극단)로부터 1960년대까지 ‘극장쇼의 대명사’가 이종철의 코팍춤 데뷔무대도 조선극장이다. 

조선극장은 당시 구악(舊樂)이라고 했던 전통예술과도 밀접하다. 전통예술을 극장예술로 만드는데 조선극장이 역할을 했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전신은 ‘조선음률협회’로, 1930년 창단되었다. ‘조선악(朝鮮樂’의 정화‘를 목표로 한 이 단체의 처음 공연도 조선극장에 열렸는데, 심상건(1889~1965)에서 박록주(1905~1979)까지 당대 최고 명창명인이 출연했다. 

1930년 9월 22일, ’팔도명창대회‘가 조선극장에서 열렸다. 경성방송국(JODK)을 통해서, 전조선(全朝鮮)에 생중계되었다. 비유컨대, 그 시절의 ’미스트롯‘이라고 해야할까? 한성권번의 박부용(朴芙蓉)이냐 한남권번의 박록주냐. 당시 경성의 풍류객의 예상과는 달리, 서도소리의 장학선(張鶴仙 , 1905 ~ 1970, 서도소리 최초 인간문화재)가 일등의 영예를 안은 곳도 조선극장이다. 

일제강점기 종로통은, 조선사람의 왕래가 갖은 공간이었고, ’설’ 즈음의 이곳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1935년 구력원일 (舊曆元日), 곧 설날에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에 엄청나게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명절, 서울의 유명극장 세 곳 곧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이 인산인해를 이룬 기억이 있다면, 1930년대의 세 곳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될 것 같다. 

경성 최초 3층 신식극장 ‘조선극장’은 안타깝게도 세상에 울분을 품은 한 청년의 방화로 인해서, 아름다운 목조 3층건물이 다 타버리고 말았다. 1936년 6월 11일, 4시 20분쯤, 조선극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구경을 보러 몰려든 경성사람과 이동하는 소방차로 인해서 인사동은 물론이요, 종로통까지 교통이 마비된다. 

내년(2022년)은 조선극장이 세워진 지 꼭 100년이 된다. 인사동 1길에 위치한 한 문화공간(KOTE) 을 통해서, 다수가 조선극장의 존재를 알게 돼 다행이다. 앞으로 조선극장에 관한 모든 것은 더 넓고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서울은 정도 600년을 넘긴 수도라지만, 실제 100년 전의 서울도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 조선극장에서 가장 근접한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무엇일까? 서울미래유산이기도 한 ‘낙원아파트’ (1967년)이다. 바라건대, 낙원아파트를 중심으로 해서 ‘종로통’의 ‘근대문화’가 잘 정리되고 재창조되길 바란다. 그 시절의 종로통은 조선인의 자존심이자 해방구였다. 

낙원아파트에 위치한 ‘스튜디오 낙원’의 앞날을 기대한다. 문화기획가 오진이(전 서울문화재단)는 예술인들의 창작과 소통을 위해서 ‘열린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스튜디오 낙원’을 중심으로 ‘서울의 근대문화 100년’, 특히 조선극장을 포함한 지난 백 년간의 ‘종로의 기억’이 잘 정리되고, 새롭게 해석되길 기대한다. 

조선극장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끝이 없어서, 최소한 흥미진진한 백일야화(百日夜話)로 당신을 혹하게 하리라. 조선극장이 불타고 없어진 그 자리에선, ‘척사대회’로 내기꾼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곡마단 공연으로도 유명했다. 그 시절 미아가 발생한 곳은 경원(쳥경궁) 벛꽃놀이만이 아니다. 조선극장 자리에서 열린 곡마단 구경에서 아이의 손을 놓친 부모가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애절한 광고까지 신문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