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바그네리안 되기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바그네리안 되기Ⅱ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08.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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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니벨룽의 반지>에서 관현악 대목은 나를 열광시켰다. 로린 마젤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가사 없는 반지>(Der Ring ohne Worte)는 듣고 또 들었다. 유명한 ‘발퀴레의 말달리기’, ‘숲의 속삭임’, ‘브륀힐테의 깨어남’, ‘지크프리트의 라인 여행’, ‘지크프리트 장송곡’, 특히 마지막 ‘브륀힐데의 희생과 구원’은 꿈에 나올 정도로 머리에 깊이 박혔다. 하지만 텍스트는 좀체 친해질 수 없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은 물론,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의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쇼송, 클로드 드뷔시도 바그너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세기 예술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은 경계를 너머 니체의 철학은 물론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의 문학 세계까지 물들였다. 이러한 바그너의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 곤혹스런 일이었다. 이 ‘선택적 음맹’을 합리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신화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우리 현실과 별 관계가 없는 게르만 전설에 왜 내가 열광해야 하는가? 히틀러가 좋아해서 나치 이데올로기에 이용한 음악을 이해하려고 왜 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가? 하지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풍월당에서 발행한 <니벨룽의 반지> 해설서였다. “이 작품은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특히 <라인의 황금>은 현대 금전만능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이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이 작품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두 문장에 이 작품의 요약돼 있다고 해석하니 작품의 큰 윤곽이 한 눈에 들어왔다. ➀ “라인의 황금을 소유한 자는 사랑하는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 ➁ “이 반지를 소유한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죽음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천리안 고전음악연구회의 또다른 바그네리안 서정원님이 쓴 <바그너의 이해>는 나같은 사람이 바그너를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해설서였다. 류가미 작가가 소설로 풀어 쓴 <니벨룽의 반지>(호미, 2006)도 재미있게 읽었다. 4부작 오페라 대본을 4편의 전설로 읽는 느낌이었다. 이제 줄거리도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니벨룽’(Nibelung)은 북유럽 신화의 난쟁이 족속이다. 그들의 우두머리 알베리히는 라인의 세 처녀에게 사랑을 구하지만 비웃음을 살 뿐이다. 그는 앙심을 품고 라인의 황금을 훔친 뒤, 이 황금을 연마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반지를 만든다. 신들의 왕 보탄은 알베리히를 속여서 이 반지를 빼앗는다. 보탄은 거인 파프너와 파졸트에게 반지를 넘기는데, 파프너는 반지를 독점하려고 파졸트를 죽이고 용으로 변해 황금을 지킨다. 영웅 지크프리트는 신비의 칼 노퉁을 사용하여 파프너를 죽이고 반지를 손에 넣는다. 아버지 보탄의 명령을 거역한 벌로 잠들어 있던 브륀힐데는 지크프리트의 등장으로 긴 잠에서 깨어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라인의 세 처녀는 반지를 돌려달라고 지크프리트에게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지크프리트는 난장이 알베리히의 아들 하겐의 계략에 속아서 브륀힐데를 배신하고 죽음을 당한다. 결국 브륀힐데가 반지를 라인의 세 처녀에게 돌려주고 목숨을 바친다. 멀리 신들의 성 발할이 불타오른다.